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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Shakespeare in Nazis

by Ajan Master_Choi 2014. 7. 29.

 

대부분의 독재정권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치독일하에서 문화공연예술들이 공연될수있느냐의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것이 집권세력이 보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아닌가였습니다.

물론 이 기준이 마치 언론보도에 대한 규제처럼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것이 명확했다면 모르겠지만, 이른바 문화 예술의 은유성, 상징성등으로 인해 그리 쉽게 명확화될수있는 것이 아니었죠.

이런 상황적 배경으로 인해, 나치 시대의 공연예술가들은 특별히 프로파간다부의 지도를 받아 시도하는 것이 아닌 이상,자칫하면 다하우로 끌려갈 위험이 있는 창작보다는 비교적 안전하고, 검증된 고전희곡을 바탕으로 공연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 이조차도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치가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른 검열에서 고전조차도 자유롭진 못했기 때문이죠.


나치의 기준으로 봤을때, 괴테는 지나치게 비애국적인데다가, 그의 작품들은 감상적인 인본주의에 불과했죠.

또한 독일문화권 희곡문학의 아버지라 지칭 되는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도 나치 기준에는 아리아적으로 순결치 못했습니다.

레싱은 계몽주의자로 유대인에 대한 관용에 적극적이었고, 그의 작품, 현자 나다니엘에선 살라딘에게 종교의 진리에 대해 설파하는 유대인 랍비가 나오는게 나치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될수 없었던거죠.


그렇다면 또다른 독일희곡문학의 거두,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어떠했을까요?

실러 역시 이 나치의 정신 나간 검열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나치는 실러가 신성로마제국에 저항한 스위스반란군의 이야기를 왜 그의 작품에서 다룬 것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선택의 제한하에서 가장 안심하고 유용하게 선택할수 있었던 희곡은 아이러니하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독일인이 아닌 영국인이었기에 문화의 영역을 각국의 문화들의 우월성 투쟁으로 바라본 나치에겐 매우 꺼려지는 선택이었겠지만, 햄릿이나 멕베스, 리차드 3세같은 그의 작품들은 "노르딕인종의 전형"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인식되었고, 덕분에 그와 그의 작품은 브리튼 섬을 넘어, 게르만인종 공통의 재산으로 포장되었죠.

 

물론 나치스 내부에선 이 외국인 작가의 작품을 다른 외국작품들처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히틀러 본인을 비롯한 나치스 갈색제복의 올드가드들은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팬이었습니다.

1936년에는 아에 대놓고 더많이 상영되도 좋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다한 샘이죠.

이런 분위기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은 나치정권 집권 첫해인 1934년 235개에서 36년에는 320개로 증가하죠.

이 다음해인 1937년에는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참석하에 히틀러 유겐트의 셰익스피어축제까지 열립니다.


나치스에겐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프로파간다의 소재였습니다.

나치스는 퇴폐한 영국대신 아리아인종의 위대한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지켜나갈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강조했고, 이건 전쟁기간동안에 더욱 강조되면서, 1940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셰익스피어 탄생기념축제에선 "오늘날 영국인들이 기억하는 셰익스피어는 축구선수의 이름뿐이다"라는 왜곡된 이미지조차 생성됩니다.

더불어 그가 살던 시대적 배경조차 하나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되는데, 나치는 이른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시대의 영국이 오늘날 자신들의 통치를 받는 독일과 동일하다는 식의 레토릭을 사용하게됩니다.

강한 리더에 의해 통솔되는 젊은 국가로 부패에 저항하며 유대인이 없는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거였죠.

그리고 역설적이게 처칠과 로얄 네이비는 엘리자베스의 영국함대에 패한 펠리페2세의 아르마다에 비교되었고요.


하지만 나치독일하에서 이런 비교적 우대를 받던 셰익스피어작품이었습니다만, 나치스식의 평가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순 없었죠.

많은 셰익스피어의 왕실서사극들은 "옹졸한 영국식 애국주의"로, 그리고 일부 희극은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폄하되고 맙니다.

 

일부 희곡들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중에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베니스의 상인"도 포합됩니다.

사실 반유대주의를 위한 훌륭한 전범이 될것 같고, 실제로 나치스가 장악한 독일교육기관에서 그런 의도로 활용된 작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스가 그냥 좋게 수긍하기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바로 샤일록의 딸이 아리아인인 로렌조와 결혼하게 된다는 결말이었죠.

아무리 아버지와 등을 돌린 딸이라지만, 타 인종간 혼혈을 병적으로 경멸한 나치스에겐 이건 난감한 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샤일록의 딸, 제시카는 로렌조와 결혼하지 않던지, 아니면 원래부터 유대인이 아닌 샤일록의 아리아인이 양녀로 내용을 교체해야했죠,


개인적으론 멕베스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희곡으로 꼽는 오델로도 나치의 가위질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나치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계 무어인 오델로를 비교적 피부가 흰 아랍게 무어인으로 교체시켜버렸죠.

나치에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골치 아픈 작품이었습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그의 조국이상으로 한 여인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나치에겐 그저 경멸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영국항공전의 실패로 끝나고 타이푼작전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조기종전의 희망이 사라진 1941년 11월, 괴벨스는 그동안 나치체제하에서 비교적 우대받는 위치에 있던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대한 규제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공연되는 모든 셰익스피어희곡들은 모두 그의 개인적인 허가를 받아야했고, 한 극장이 상영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작품은 한 시즌 당 하나로 제한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지난해까지만해도 짙은 프로파간다 성격을 띄며 바이마르에서 진행된 셰익스피어의 날 행사는 금지되죠.

이에 대해 또다른 나치 간부 발두르 폰 쉬라흐는 항의하면서 빈에서 독자적인 셰익스피어의 날 행사를 개최하려했지만 괴벨스의 권력에 밀려 결국 구상으로만 끝났죠.


괴벨스의 이러한 조치는 아마도 전쟁의 장기화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프로파간다 매체들을 전시체제에 맞게 완전한 통제를 수립하려는 기도이자, 전쟁장기화의 또다른 결과인 반영감정의 반영으로 정리할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그이 개인적인 악몽 때문일수도 있죠.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전인 1937년의 어느 날, 괴링이 내무장관 및 수상을 맡고 있던 프로이센주의 베를린에 위치한 프로이센주립극장에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가 공연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공연을 연출한 감독은 작품의 일부를 현실에 맞게 번안했었죠.

작중에서 두건을 두르고 등장한 리처드의 수하들이 두건을 벗어 던지자, 어깨 견장이 달린 어두운 색 셔츠로 복장을 통일한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을 연출했던거죠.

정작 프로이센주의 수상인 괴링은 이 장면이 꽤나 재밌게 즐겼다고 하지만 괴벨스에겐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는 햄릿이 준비한 연극을 관람한 클로디어스나,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뱅코의 유령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멕베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1941년 괴벨스의 조치는 버남의 숲이 움직이는 것을 막고, 맥더프가 자신의 눈앞에 서는 것을 막고자 했던 멕베스의 심정와 유사한 심정(혹은 리처드 3세나)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국 나치스의 운명은 그들이 남겨두고자 했던 그 모든 노르딕 인종의 운명앞에서의 결연함을 묘사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주인공들의 최후처럼, "장엄한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