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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힘에 대한 갈망…고대인도 모피를 탐했다

by Ajan Master_Choi 2009. 12. 4.

인간의 동물 가죽에 대한 욕망은 고대의 역사를 이어왔고, 고조선이 중국과 교류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피는 온대와 한대 사이의 교역을 이어주는 세계사의 커다란 축이었다.

고조선은 그 귀한 모피의 공급을 통제하고 조정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와 겨루었다.

모피는 고조선의 역사를 세계 문명사적 보편성에서 해석할 수 있는 고리다.

고조선이 중국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관포지교’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관중의 이야기를 담은 <관자>이다.

당시 제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얘기를 하는 중에 관중은 조선의 얼룩무늬 모피를 수입할 것을 건의했다.

기원전 7세기에 산둥반도에서 세력을 키워 중원의 패권을 잡은 제나라가 다른 제후국들을 압도할 명품으로 고조선의 얼룩무늬 모피코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제후국들은 고조선과 멀어서 이 모피를 얻기 어려웠다.

그러니 산둥반도에 위치한 제나라가 고조선과 해상무역을 하여서 이 고조선의 모피를 독점하면 다른 나라들은 제나라에 굴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관자>라는 책 자체는 관중 사후에 여러 차례 쓰인 것이지만, 내용은 관중 시절의 얘기를 담은 것이다.

도대체 고조선의 모피가 무엇이기에 춘추시대 제후들을 굴복시키는 도구가 된단 말인가.

이 한 줄의 기록은 춘추시대에 고조선이 중국과 모피를 중심으로 원거리 교역을 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문명세계에서 차지하는 모피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천년 만에 발견된 모피

동물은 인간에게 단순한 식량 또는 애완동물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힘과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구석기시대 이래로 샤먼은 동물의 가죽을 두름으로써 그 동물의 힘을 얻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도구로 썼다.

이런 전통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러시아의 코사크인들이 시베리아에 진출하고 프랑스가 캐나다에 진출한 주된 이유는 바로 모피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여진과의 주요 교역품이 모피였다.

모피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세계사를 움직여온 명품이었다.

모피는 단순히 방한을 목적으로 하는 짐승 가죽과 다르다.

고급의 모피코트는 시각적인 강렬함과 특유의 감촉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주요한 모피동물인 담비, 삵, 스라소니, 표범들은 하나같이 인적이 아주 드문 한대의 산속에서만 산다.

반면에 명품 모피는 주로 온대 지역에서 발달한 나라가 소비한다.

그러니 모피의 교역은 필연적으로 문명지대와 인적이 아주 드문 지역 간에 원거리로 교역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모피동물은 대부분 먹이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사나운 육식동물이니 사냥도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모피의 값은 황금보다 비쌌다.

사람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북극해나 험난한 시베리아의 탐험도 무릅쓴 이유다.

모피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미지의 땅과의 교류로 이어졌고, 또 고조선을 실증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다.

이렇게 세계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물건이 모피지만, 정작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모피같이 썩기 쉬운 유기물질은 거의 발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적 같은 자료가 나왔다.

1990년대 중반에 러시아 알타이 우코크 고원에서 2400년 전 유목민들이 남긴 모피코트 두 벌이 완벽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당장 입어도 될 정도로 생생하게 털이 한올 한올 살아 있는 모피코트였다.

추운 고원 산악지대의 영구동결대(땅속에 얼음이 사계절 남아 있는 지형)의 얼음을 파고 무덤을 만들어서 유기물질이 완벽히 남아 있었다.

난방시설이 미비했던 고대 사회에서 모피와 짐승의 가죽은 사람들이 선호했던 방한복이었다.

특히 모피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방한복을 넘어 높은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명품이기도 했다.

이 알타이의 모피코트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술장식을 달아서 <관자>가 말한 고조선의 얼룩무늬 모피와 유사했다.

북한에서 발견된 항아리

알타이 파지리크 고분의 모피코트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이다.

고조선 지역에서 모피의 실물이 나온 적은 없다.

대신에 당시의 유적에서 발굴된 동물의 뼈로 모피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고고학 자료를 분석하면 고조선이 있었던 요동~평양 일대엔 모피동물이 없다.

모피동물은 인적이 드문 춥고 험한 산악지역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지금도 백두산 일대가 만주 일대에서 모피 산지다.

그렇다면 고조선 사람들은 중국과 교역할 모피를 얻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험한 백두산 일대를 다니는 모피 사냥꾼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백두산 일대의 모피 사냥꾼과 연결했던 증거로 흥미로운 자료들이 있다.

 

바로 압록강과 청천강 유역의 산간 오지에서 다수 발견된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과 철제 농기구를 가득 담은 항아리들이다.

유물이 발견된 유적들은 북한에 있어서 직접 조사할 수 없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평안북도 위원 용연동에서 이 명도전 항아리 유적을 조사한 일본인 고이즈미 아키오의 수기가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은 산을 따라 이어진 작은 비탈길이 유일한 통로인데,

그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명도전 항아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항아리들은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에 진열되어 있다.

 

이밖에 다른 40여개의 평안북도 명도전 유적들도 다 비슷하게 산간 오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다가 뜬금없이 발견되었다.

 

이 길을 따라 백두산 일대의 모피 사냥꾼들과 교역했다는 증거다.

철제 농기구는 산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돈만큼이나 중요할 테니 물물교환용으로 들여온 것이리라.

그런데 왜 돈이 든 항아리를 그렇게 길가에 두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것은 모피 무역의 특징이다.

중국 기록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담비를 교역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담비굴 앞에 칼을 두고 가면 담비와 같이 사는 ‘괴물’이 그 칼을 가져가고 대신 담비 가죽을 두고 간다고 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두고 가는 일종의 블라인드 무역이다.

길가에 단지를 두고 가면 다른 시간대에 모피 사냥꾼이 모피를 두고 가져가는 식이다.

또 다른 발굴 형태는 모피 상인들이 다음 교역을 위해 숨겨둔 항아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모피동물은 겨울에만 사냥하기 때문에 교역도 주로 추운 겨울에 이루어진다.

추운 산간지대에서 모피 무역 시즌이 끝나면 상인들은 남은 무거운 돈과 농기구는 이듬해의 거래에 사용하기 위해 땅에 숨겨두고, 대신에 황금처럼 귀한 모피만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혹자는 명도전은 연나라의 화폐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연나라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나라의 영토라면 명도전 이외에 다른 연나라의 성터나 무덤도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 모피 교역 길의 단지에서는 주로 명도전이 나오며 때때로 명도전과 함께 그다음 시대인 한나라의 화폐가 같이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고조선이 자체적으로 화폐를 만드는 대신에 중국의 화폐를 들여와서 모피 무역에 이용했다는 뜻이다.

고조선은 모피동물이 많이 나오는 백두산 일대에서 모피를 받아서 가공하여 중국에 공급하는 모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제나라에서 고조선의 모피를 받아 집결한 항구는 산둥반도의 척산이라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 기록 중에는 엉뚱하게 모피의 산지가 척산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중간 집결지를 착각한 것이다.

지금도 산둥반도는 근대 이후 화교들이 들어오고 가장 많은 한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수천년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화려한 호피로 세상을 호령하던 전통은 고조선 이후 우리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었다.

2010년에는 6·25 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됐던 명성황후의 모피 카펫으로 추정되는 카펫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시 발견되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또 1920~30년대에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 사이에는 너구리 코트가 널리 유행했다.

이때 유행한 너구리 코트는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신 코트로 가격이 비싼 것은 물론, 무겁고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악취가 심하게 나는 결코 실용적이지 않은 옷이었다.

하지만 너구리 코트는 전신을 감싸는 가장 확실한 신분의 상징으로 등장하면서 젊은 백인들은 필사적으로 이 너구리 코트를 입고 자신들도 주류에 끼고자 했다.

모피는 직접 사냥을 해야 그 가죽을 두를 수 있다.

그렇기에 힘에 대한 원초적인 갈망이 표현되어 있다.

얼마 전 방영된 영화 <마약왕>에서 홀로 남아 경찰에 쫓기는 송강호가 마지막까지 벌거벗은 상의에 모피코트 한장을 걸친 장면은 이런 모피의 의미를 잘 상징한다.

인간의 동물 가죽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고대의 역사를 이어왔고, 심지어 고조선이 중국과 교류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피는 온대와 한대 사이의 교역을 이어주는 세계사의 커다란 축이었으며 고조선은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고조선은 그 귀한 모피의 공급을 통제하고 조정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와 겨루었다.

모피는 고조선의 역사를 세계 문명사적 보편성에서 해석할 수 있는 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