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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행주산성 전투와 권율

by Ajan Master_Choi 2018. 11. 4.

 

1593년 3월 14일

 

맑은 날 행주산성에 한 번 올라가 본 적 있나?

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언덕빼기 정도지만 그 위에 올라가면 놀라울 만큼의 조망을 접할 수 있다.

여의도와 관악산이 훤히 내다보이고 강북쪽도 빌딩 숲만 없다면 사대문 안도 바라볼 수 있을만한 조망이지.

바로 여기서 양력 1593년 3월 14일 행주산성 전투가 벌어졌고 해마다 이날 행주대첩 기념제가 열리고 있지.

 

산이라고 부르기도 뭐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산성이 또렷이 있어서 그 안에서 농성한 것도 아니었어.

그들은 광주 목사 권율 휘하의 전라도 병력 2천8백 여 명이었는데 원래 명나라 군이 한양을 공격하면 그에 발맞춰 공격을 감행하여 수도를 탈환할 목적이었어.

그런데 비보가 들려온다.

기세등등 달려오던 명나라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코가 깨지고 물러선 거야.

원님 덕에 나발 불려 했는데 원님이 도망가 버린 격.

조선군은 당황했다.

 

아마 권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처에 있던 조경이라는 장수에게 말했을 거야.

 

“자네 아니었으면 정말로 큰일날 뻔 했네.”

 

애초 권율은 야트막한 산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명나라 군이 곧 서울을 공격할 텐데 목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우겼었거든.

하지만 체찰사 정철이 권율을 불러 둘이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사이 조경은 병사들을 독촉해 행주산성을 두르는 목책을 설치해 놨던 거야.

이제는 그 목책만이 희망이 된 거지.

하지만 조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을 거야..

 

“큰일은 지금부터입지요.”

 

이 목책이 완성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쓸어버리겠다고 열 배가 넘는 3만의 대군을 출동시킨다.

일본군 총대장은 풍신수길이 아들처럼 사랑한 스무살의 우키다 히데이에.

 

제1,2,3 공격이 연속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직 일본군은 넉넉히 남아 있었고 우키다 히데이에가 직접 공격에 나선다.

이 홍안의 귀공자는 부하들을 다그쳐서 목책에 달라붙게 하고 후퇴하면 죽인다고 으르댔지.

악에 받힌 일본군이 목책을 뚫는 데에 성공했을 때 조선군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이제 죽었구나.

그러나 아직 조선군이 죽을 때가 안됐다는 걸 깨우친 건 화차, 신기전, 그리고 각종 화포들이었어.

포수들은 죽자고 불을 당겨 일본군 지휘부를 겨냥해서 포를 쏘아 댔지.

그 포탄 한 방에 우키다 히데이에는 그만 중상을 입고 말았어.

풍신수길의 최측근 이시다 미쓰나리 (이 사람 이후의 일본사에 꽤 이름난 사람인데) 도 파편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하루 종일 일곱 번의 공격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화살도 거의 떨어진 상황에서 일본군이 목책을 뚫고 들어와 그야말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지.

원래 일본군은 전통적으로 칼싸움에 강한 군대였고 일본군이 돌파해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조선군은 대개 양떼처럼 도망가기 일쑤였지만 이 전라도 조선군은 ‘악으로 깡으로’를 수백년 먼저 실천했다.

물론 멋모르고 물러서다가 권율의 칼에 목이 날아간 친구들을 생각하면 달리 갈 곳도 없긴 했겠지만.

 

그러나 조선군의 전투에서 화살이 없다는 건 곧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간다는 것과 같았지.

절망적으로 선택된 무기가 돌이었어.

그 일대는 돌이 많은 고장이었으니까.

행주치마의 전설을 생각할 테지만 그건 뻥이다.

당시 행주산성에는 행주 치마 두른 여인네들이 없었어.

그 절망적인 순간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충청수사 정걸이 강화도에서 함대를 이끌고 와서 화살을 부리기 시작했고 아울러 전라도 조운선 수십척이 일본군의 시야에 나타난다.

일본군은 응원군이 왔다고 생각하고 또 피해가 너무 커서 더 버틸 수도 없다고 판단, 물러나게 된다.

이른바 행주대첩이지.

 

이 전투를 지휘한 권율 또한 원래 무관은 아닌 문과 급제자였어.

집안도 좋아.

아버지가 영의정 권철이었어.

그런데 이 권율은 사위 (사위가 오성 이항복)보다도 늦게 문과에 급제한다.

나이 마흔 여섯이었어.

명 짧고 결혼 빨랐던 조선 시대에는 손자를 볼 나이.

그 이전까지는 뭘 했느냐.

그야말로 권율은 문제아(?)였어.

공부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왈짜들과 전국을 유람하며 놀러 다니거나 별안간 당시로서는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지리책을 탐구한다거나 하여간 당시의 ‘주류’들과는 판이한 생활을 즐겼던 거야.

 

하지만 아버지 권철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

 

“때 되면 정신차리겠지.”

 

하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권철은 오성 이항복을 권율의 사위로 삼은 장본인이기도 해.

오성의 집이 권철의 집 옆집이었는데 오성의 집 감나무가 담 저편으로 가지를 뻗었어.

그러자 권철의 하인들이 냉큼 감을 따 먹고 가지가 넘어왔으니 우리것이 아니냐고 우긴다.

이에 오성은 권철 대감이 집에 있는 틈을 타 수챗구멍으로 팔을 넣은 후 외친다.

 

“이 팔이 누구 팔입니까? 왜 댁네 하인들은 감나무 가지가 넘어왔다고 자기 거라고 우긴단 말이오?”

 

권철은 이 맹랑하고 유쾌한 소년에게 반했고 손주사위로 삼은 거지.

이 장난꾸러기 사위가 장인 권율과 벌였다고 전해지는 일들은 가히 개그콘서트 ‘사위와 장인’ 코너를 만들만 해.

하나만 예를 들어 보면 권율이 집의 계집종과 재미를 보다가 그만 부인에게 걸려 광에 갇히는 신세가 됐는데 사위에게 SOS를 치지.

 

“사위 나좀 꺼내 주게. 제갈량이라도 여긴 못빠져 나갈 걸게.”

 

그러자 사위는 느물느물 대답한다.

 

“제갈량이면 그 속에 들어갔겠습니까요.”

 

이 사위는 벼슬길에 벌써 나아갔지만 그래도 장인은 창피한 줄 모르고 계집종 엉덩이만 쫓아다닌 모양이지.

(반대의 내용의 설화도 있지만 오성 이항복이야 원래 악동이잖아?)

이 파락호같은 권율이 나이 마흔 여섯 돼 취직(?)을 결심하게 된 건 아버지 때문이었어.

아버지 권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권율은 아버지에게서 묘한 소리를 듣는다.

 

“내가 널 낳았구나.”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괴물을 낳았다는 소리일까.

너 같은 걸 낳은 내가 문제라는 걸까.

별 수 없는 내 아들이라는 한탄일까.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니 앞으로 잘 하라는 다짐일까.

아니면 네가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영화같은 언술일까?

(이건 아닌 거 같음)

권율이 이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그는 이 임종 이후 과거 공부에 매진, 나이 마흔 여섯에 넷째 아들뻘 되는 과거 동료들과 함께 문과에 턱걸이로 급제한다.

아마 당시 관보에 이렇게 실리지 않았을지.

 

“권철 정승의 망나니 아들이자 이항복 장인 드디어 급제.”

 

그 늙다리 관리가 행주산성에서의 대첩을 일군다.

오랜 야인 생활 때문이었을까.

그는 문관으로서 무관의 충고를 들을 줄 알았고 유능한 무관들의 실력을 십분 활용했고 인생 전반기에 하나도 내지 못한 성과를 마흔 여섯 이후 가마니로 내기 시작했다.

조선군 최악의 참패라 할 (8만 대군이 몇십 명에 의해 무너져 내린) 광교산 전투 이후에도 자신의 병력을 질서정연하게 퇴각시킨 것이 그였고, 전라도를 지킨 이치의 승전자가 그였고 행주산성의 승리자가 그였다.

 

그의 나이 쉰 여섯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젊다.

너도 그렇고.

다 늙은 듯이 힘겨워 말고 다 잃은 듯이 슬퍼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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