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1월 WBA와 WBC에 이어 제3의 기구로 태동한 IBF는 경량급이 강세였던 아시아와 중남미권을 겨냥해 인지도를 높일 목적으로 1986년말 한계체중 -47.6kg이하의 미니플라이급을 신설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IBF의 체급 신설에 부정적이었고 팬들의 관심도 낮은 편이어서 초기에는 중남미권 국가들의 외면 속에 아시아 선수만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체급의 <IBF> 초대챔피언 결정전은 1987년 6월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무명에 가까웠던 이경연과 일본의 가와카미 마사하루 간에 펼쳐졌는데 홈링의 이경연이 첫회부터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를 퍼부은 끝에 경기시작 5분31초만에 KO승을 거두고 세계 최초로 -47.6kg이하 체급의 챔피언에 올랐다.
1985년 한국 J.플라이급 신인왕 출신인 그는 일발파워형은 아니었지만 경량급치고는 원투스트레이트와 좌우훅을 잘 쓰는 파이터 스타일의 복서였다.
이즈음 IBF의 미니플라이급 신설에 자극받은 WBC도 1987년 7월 스트로급을 신설했고 이를 계기로 WBC 본부가 소재한 멕시코는 물론 중남미권 선수들이 하나, 둘씩 이 체급의 랭킹에 이름을 올리며 비로소 세계타이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8일 각각 일본과 태국의 내셔널챔피언인 이오카 히로키와 메이 톰부리팜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격돌해 이오카가 대차의 판정승을 거두어 WBC 초대챔피언에 올랐다.
19세 9개월로 자국 최연소 세계챔피언 등극의 기록을 세운 이오카는 어려서부터 명트레이너인 에디 타운센트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고 큰 키와 스피드를 이용한 아웃복싱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편, IBF 챔피언 이경연은 당시 IBF에 대한 국내 여론이 좋지 않자 과감하게 타이틀을 반납하고 자신에게 톱콘텐더 자격을 부여한 WBC 타이틀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중반 이후 선전에도 불구하고 최종회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허용해 두차례의 스탠딩다운을 빼앗긴 끝에 TKO패 당해 사실상 이 체급의 첫 통합전은 이오카의 승리로 기록됐다.
1987년 10월 WBA 역시 한계체중 -47.6kg이하 체급 신설에 합류해 미니멈급으로 명명하고 같은 해 12월 랭킹을 발표했는데 한국의 김봉준과 베네수엘라의 레오 가메스를 각각 1, 2위로 랭크해 한국은 유독 이 체급에서 만큼은 남다른 대접을 받았다.
1988년 1월 10일 부산에서 열린 초대챔피언 결정전은 김봉준이 하드펀처로 소문난 가메스의 펀치를 원천봉쇄하며 선전을 펼쳤지만 회장국의 보호 아래 가메스가 도둑판정 논란속에 초대챔피언에 등극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에 따라 당시 직접 경기를 관전했던 힐베르토 멘도사 회장은 가메스의 차기도전자인 요코자와 겐지와의 승자와 60일내 재대결을 치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가메스는 세계도전 자체가 무리였던 약체 요코자와를 3R만에 가볍게 물리친 후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타이틀을 반납해버려 양자 간의 재대결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초대챔피언 이경연의 타이틀 반납 후 주인을 찾지 못했던 IBF는 필리핀의 프리티 보이 루카스를 11R TKO로 제압한 태국의 사무스 시스나루폴를 새챔피언으로 옹립했다.
Jr.플라이급 시절 별볼일 없는 복서였던 그는 미니멈급이 생긴 직후 자국 챔피언에 이어 OPBF 챔피언에 오르며 회춘한 노장이었다.
그러나 황혼녁에 찾아온 타이틀은 오래지 않아 승률 5할의 반타작 복서 인도네시아의 니코 토머스에게 두번이나 다운을 당하며 내줘 3차방어에 실패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우는 바람에 지저분한 링레코드를 소유했던 토머스는 단신의 사우스포로 회전속도가 빠른 연타와 상체의 움직임이 기민해 상대를 현혹시키는데 능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스파링 때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항상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챔피언벨트가 황송했던지 불과 석달 뒤 필리핀의 실력파 에릭 차베스를 만나 5R만에 캔버스를 구르며 바톤을 넘겼다.
어느 체급이나 신설체급의 초창기는 관심이 적기 마련이지만 이 체급의 경우에는 당시 한수 아래로 취급받던 IBF챔피언까지 뒤섞여 불신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이경연을 가까스로 제압했던 WBC챔피언 이오카는 2차방어전에서 뜻밖의 강타자인 태국의 나파 키아트완차이를 만나 시종일관 고전을 면치 못하며 무승부로 겨우 타이틀을 방어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상 일보 직전에서 왕좌를 놓쳐 버린 키아트완차이는 5개월뒤 재격돌하여 한발 앞선 공격으로 이오카를 괴롭힌 끝에 12R에 반칙으로 감점을 당하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2-0의 판정승으로 왕좌 찬탈에 성공했다.
이 둘의 대결은 나중에 한차례 더 치루어졌는데 입장이 뒤바뀐 키아트완차이가 홈링의 이오카로부터 두차례의 다운을 빼앗으며 11R에 넉넉한 TKO승을 거두어 천적임을 입증했다.
사우스포였던 키아트완차이는 파이팅력이 좋고 호쾌한 타격전을 즐겨해 자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가메스의 타이틀 반납으로 공석이 된 WBA왕좌는 석연치 않은 패배를 당했던 김봉준이 홈링으로 콜롬비아의 어거스틴 가르시아를 불러들여 초반부터 특유의 연타공격으로 쉴새없이 몰아붙이며 일방적인 경기를 펼쳐 7R TKO승으로 마침내 정상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김봉준은 데뷔초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WBC 챔피언에 오르는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를 적지에서 판정으로 꺽으면서 장래를 촉망받은 대기만성의 전형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한국 최초로 동국인 간의 세계타이틀전을 펼쳐 소형탱크 이삼중을 물리친 뒤 동양권의 존 아리프와 페타이 추바타나를 잇달아 KO로 물리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파나마의 복병 실베리오 바르세나스와의 두차례 경기에서 모두 뒷맛이 찜찜한 승리를 챙겨 국내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더니 6차방어전에서 엘리트 복서 최희용에게 아쉽게 판정으로 패해 왕좌에서 물러났다.
WBA 챔피언 김봉준이 여섯차례나 방어전을 치루며 이 체급의 인지도를 높이는 사이 1988년 제4의 기구로 창설된 WBO도 미니플라이급에서 초대챔피언 결정전을 치러 도미니카의 라파엘 토레스가 콜롬비아의 야밀 카라바요를 판정으로 제압해 초대챔피언으로 배출했다.
프로데뷔 10전만에 정상에 오른 토레스는 빠른 발과 스피드를 갖춘 전형적인 중남미 스타일의 복서였는데 단 한차례도 KO승이 없을 정도로 솜방방이같은 주먹을 갖고 있었다.
초창기 WBO의 인지도가 낮은 탓에 1년만에 첫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을 완전히 팽개쳐 버려 이 체급의 타이틀을 3년 가까이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방치되고 말았다.
WBC챔피언은 기대를 모았던 키아트완차이가 3차방어전에서 IBF Jr.플라이급 챔피언 출신인 우리나라의 최점환에게 제대로 걸려들어 3차례의 다운을 허용하며 고전을 펼쳐 왕좌를 넘겼다.
아마추어시절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허영모와 오광수의 벽을 넘지 못했던 최점환은 프로에서도 당대의 간판스타 장정구와 유명우의 그늘에 가렸던 비운의 챔피언이었다.
대기만성의 재목으로 비스듬히 달려드는 박진감 넘치는 파이팅이 인상적이었지만 메이저기구 챔피언의 영광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적지에서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의 빠른 발에 롱훅을 남발하며 졸전을 벌인 끝에 9R KO패로 무릎을 꿇어 백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에서 구시켄 요코의 뒤를 이어 150년만에 나타난 천재복서라며 칭송받았던 오하시는 우리나라의 복싱영웅이었던 WBC L.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에게 도전했다가 이미 두차례나 KO패를 당해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미니멈급으로 내려와 마침내 세계챔피언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끈질긴 대쉬와 파워가 눈에 띄었을 뿐 자국의 기대와 달리 기술적으로 평범한데다가 맷집도 강한 편이 못되어 롱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비교적 난적이었던 전 챔피언 키아트완차이를 가볍게 건너 뛰었으나 2차방어전에서 이 체급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으로 칭송받게 되는 멕시코의 미스터퍼펙트 리카르도 로페스를 지명도전자로 맞이해 1차 집권기는 넉달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26연승(19KO) 무패를 기록했던 로페스는 비록 적지였지만 파워는 물론 정확도와 스피드 모두 한수위의 전력을 선보이며 5R만에 오하시를 요절내고 화려한 대관식을 치뤘다.
언제 어디서나 냉정함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된 완벽에 가까운 복싱을 펼쳐 보인 그는 이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를 날아 다니며 무려 21차방어 성공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경량급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체급 신설 이래 주로 동양권 일대에서만 매치메이킹 되었던 미니멈급은 1991년 로페스의 출현과 함께 그동안의 불신감과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또 하나의 진정한 세계타이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니코 토머스를 통렬한 라이트어퍼컷으로 잠재우고 IBF왕좌에 오른 차베스는 사우스포로는 드물게 보디공격에 정평이 나 있었고 라이트도 레프트 못지 않은 대단한 화력을 소유했었다.
선이 거친 스타일로 테크닉은 결점으로 지적되나 후퇴를 모르는 왕성한 공격력이 이를 덮고도 남아 자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90년 2월 적지 방콕에서 열린 태국의 화란 루크밍콴과의 첫 방어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던 중 7R에 우연한 버팅으로 경기속행이 불가능해져 그때까지의 채점결과에 따라 부상판정승이 선언되어야 했지만 7R TKO패로 처리되면서 어이없게 타이틀을 강탈당하고 만다.
홈텃세의 희생양이 되며 단명에 그치는 불운을 겪은 차베스는 리매치에서 완패를 당한 뒤 급전직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부분의 태국선수들처럼 무에타이 출신 낙무아이인 루크밍콴은 사우스포 특유의 까다로운 복싱스타일로 2년 6개월간 왕좌를 지켜내며 일곱차례의 방어에 성공했는데 당시 해외토픽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챔피언으로 소개된 적이 있는 화제의 인물이다.
8차 방어전에서 필리핀의 복병 매니 멜초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플라이급과 J.플라이급을 오가며 60전이 넘는 캐리어를 쌓았다.
매니 멜초는 데뷔초 승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한 전적의 소유자였으나 1991년 들어 이 체급의 실력파였던 에릭 차베스와 프리티 보이 루카스를 연이어 낚아 채면서 세계 랭킹에 얼굴을 내밀더니 급기야 IBF 챔피언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바탕이 약해 첫 방어전에서 태국의 라타나폴 소 보라핀에게 2-1 판정으로 석패하면서 챔피언 벨트를 태국에 되돌려주고 말았다.
WBA챔피언 최희용은 전 챔피언 김봉준과의 리매치에서 군말없는 판정승을 거두어 자신이 진정한 챔피언임을 입증했지만 5차 방어전에서 로페스에게 패퇴한 전 WBC 챔피언 오하시 히데유키와 적지에서 맞서 체중고에 시달린 끝에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하시에게 양대기구 석권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당시 일본 복싱계는 J.밴텀급의 와타나베 지로에 이어 두 번째로 양대기구를 석권한 오하시 때문에 떠들썩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오하시는 첫 방어전에서 태국의 기대주 차나 포파오인의 배짱과 세기에 압도당하며 일찍 벨트를 풀었다.
이 체급에서 함께 활동한 송크람과 쌍둥이 복서였던 포파오인은 200전이 넘는 무에타이 경력을 바탕으로 챔피언에 오르기전부터 IBF 챔피언 리스트 루크밍콴과 멜초를 차례로 누른 적이 있을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냉정한 마스크에 야수성 짙은 복싱스타일로 주목을 받아 왔다.
나중에 WBA J.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는 카를로스 무리요와 전 WBO 챔피언 라파엘 토레스 등을 상대하며 8차례의 방어에 성공했다.
포파오인의 독주를 막고 나선 자객은 후일 WBC 챔피언 로페스와 통합전을 벌여 그의 연승가도를 저지하게 되는 니카라과의 강타자 로센도 알바레스였다.
군인출신인 알바레스는 최경량급이지만 슬러거로서 들소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파이팅넘치는 경기를 펼쳤는데 역대 이 체급에서 올타임랭킹 넘버투로 평가받을 만큼 수준높은 강타자였다.
WBO쪽은 초대챔피언 토레스가 첫 방어전 후 2년뒤 타이틀을 반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여 챔피언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J.플라이급 출신의 노장 페르난도 마르티네스를 7R TKO로 제압한 불과 5전짜리의 애송이인 영국의 폴 웨어를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웨어 역시 1차 방어전만 치루고는 J.플라이급으로 전향해 버려 WBO는 또 다시 결정전을 열어야 했다.
세 번째 챔피언에 오른 알렉스 산체스는 푸에르토리코 산으로 단신이지만 기교가 있어 6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하며 3년 넘게 왕좌를 지켰으나 워낙 보잘것없는 도전자를 상대한 터라 낮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체급에 비해 역사가 짧고 선수층이 얇은 탓에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지만 WBC챔피언인 로페스가 전 IBF챔피언 이경연을 비롯해 오광수, 록키 린, 사만 소르자투롱 등의 동양권의 신예를 맞아 월등한 기량차이를 보여주며 2년새 6연속 KO방어와 함께 9차방어에 성공하자 전문가들의 시선은 물론 팬들의 관심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한체급 위의 L.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인 마이클 카바할과 움베르토 곤살레스도 로페스에게 추파를 던지며 화제를 모은다.
하지만 로페스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타이틀 방어에 정진해 10차방어전에서 나중에 WBO 챔피언에 오르는 커민 가르디아에게만 판정승을 거두었을뿐 19차방어전까지 파죽지세로 연속 KO방어를 이어갔다.
아무리 선수층이 얇은 최경량급 챔피언이라지만 도무지 믿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챔피언 8년차에 들어선 로페스는 1997년 8월 WBO 챔피언 산체스와 통합타이틀전에 나서게 되는데 5R에 상대의 벌어진 가드 사이로 전매 특허인 섬광같은 레프트어퍼컷을 꽂아 넣어 침몰시키는 명장면을 연출해내며 통합챔피언에 오른다.
이 승리로 인해 로페스는 헤비급의 조 루이스와 래리 홈스에 이어 세 번째로 세계타이틀 20차 방어전 달성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듬해 3월에는 WBO 벨트를 내버린 채 WBA 챔피언인 알바레스와 양대기구 타이틀을 걸고 통합전을 벌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대와 달리 수준 높은 강타자였던 알바레스에게 2R에 기가막힌 타이밍의 카운터 블로우를 허용하며 생애 첫 다운을 맛보게 되었고, 시종일관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인 끝에 8R들어 상대의 헤드 버팅으로 오른쪽 눈에 큰 부상을 입게 되자 그 때까지의 채점결과에 따라 간신히 무승부를 기록해 그의 연승가도는 47에서 멈추게 되었다.
경기후 알바레스측은 8R에 받은 감점만 아니었다면 2-1의 판정승을 거둘 수 있는 스코어였기 때문에 버팅에 대한 감점에 항의하며 반발했는데 이 경기를 계기로 WBA와 WBC는 버팅때 감점과 쓰리녹다운제를 서로 받아들이는 등 일부 경기룰을 통일하게 되었다.
8개월 뒤 다시 맞선 로페스와 알바레스는 1차전과 마찬가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고, 2-1의 스플리트디시젼으로 로페스의 손이 올라갔다.
상대가 강하긴 했지만 미스터 퍼펙트라는 명성에 서서히 녹이 슬기 시작했다.
이 날의 경기는 한계 체중을 초과한 알바레스 때문에 WBC가 불인정한 가운데 WBA타이틀전으로 거행되었다.
아무튼 양대기구 타이틀을 손에 쥔 로페스는 통산 22차 방어의 대기록 수립은 물론 3대 기구를 넘나들며 지존에 오른 만큼 더 이상 이 체급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고, 1999년 IBF J.플라이급 챔피언 윌 그릭스비에게 도전을 선언하자 WBA와 WBC 모두 로페스의 타이틀을 박탈했다.
로페스의 독주에 가려 빛이 바랜 IBF 챔피언 보라핀은 타이틀 획득 이래 상대의 수준은 낮았지만 로페스 못지 않은 7연속 KO방어의 기록을 쌓아가며 쌍벽을 이루는 듯 했으나 13차 방어전으로 예정된 리 산도발과의 경기에 앞서 체중오버로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5개월뒤 결정전을 통해 다시 왕좌에 복귀하여 6차 방어를 더해 통산 18차 방어의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재임기간 중 실력이 의심되는 도전자와 모두 자국에서만 방어전을 치루고 가끔 계체량 의혹도 일어 장기간 챔피언 보유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평가는 높지 않다.
이로써 로페스와 알바레스, 그리고 보라핀의 연이은 퇴장으로 일단락된 미니멈급은 세기말 뉴페이스의 등장을 기대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갔다.
WBO는 로페스가 내팽개친 벨트를 당시 극도로 가까워진 영국의 품에 안겨주기 위해 플라이급까지 오르내리며 활동하던 미키 캔트웰을 결정전에 내보냈지만 불행하게도 캔트웰이 대수롭지 않은 상대였던 필리핀의 에릭 자밀리에게 8R TKO로 무릎을 꿇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국내에서 승패를 번갈아하던 무명복서로서 뜻밖에 챔피언 자리를 꿰찬 자밀리는 라스베이거스까지 날아가 벌인 호사스러운 첫 방어전에서 중남미의 강호 커민 가르디아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5R종료 TKO패를 당해 타이틀을 넘겼다.
그동안 WBC의 로페스와 WBA의 알바레스의 벽에 막혀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WBO나마 챔피언에 오른 콜롬비아 출신의 가르디아는 자밀리와 벌인 리매치에서 컨디션 난조로 두차례나 다운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며 간신히 타이틀을 방어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2차례 더 방어전을 갖기는 했지만 체중고로 인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타이틀 반납 후 L.플라이급으로 이동했다.
WBC는 로페스가 재임 중이었던 1998년 8월 록키 린을 제압한 태국의 완데 초 차로엔을 이미 잠정챔피언에 올려 놓고 로페스의 타이틀 박탈 직후 차로엔을 정규챔피언으로 승격시켰다.
불과 15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하여 밑바닥부터 시작한 전형적인 헝그리복서였던 차로엔은 경량급 특유의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힘이 좋고 타점높은 스트레이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세기에 접어들어 벌인 첫 방어전에서 북미챔피언출신의 강타자인 멕시코의 호세 안토니오 아기레를 만나 홈링에서 2-0의 판정으로 패해 단명했다.
재규어라는 별명답게 빠르고 영악한 경기운영으로 소문난 아기레는 일발 펀칭파워도 갖추고 있어 4년간 벌인 7번의 방어전 중 5번의 KO승을 기록할만큼 안정된 왕좌를 유지했다.
그러나 L.플라이급 전향을 앞두고 벌인 8차방어전에서 태국의 신예 이글 덴 준라판에게 예상외로 완봉을 당하며 왕좌에서 내려왔고, 이 패배를 계기로 L.플라이급에 전향해서도 연패를 거듭한 채 잊혀져 갔다.
WBA도 로페스의 재임중 이미 전 챔피언 차나 포파오인의 쌍둥이 형제 송크람 포파오인을 잠정챔피언에 올려 놓고 있었는데 그가 논타이틀전에서 패하자 이를 박탈하고 1999년 10월 베네수엘라의 노엘 아람블렛과 필리핀의 호마 감보아 간에 다시 결정전을 치루게 해 압승을 거둔 아람블렛을 새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별다른 특징없이 평범했지만 위력적인 연타능력을 보유한 아람블렛은 2차 방어전에서 체중초과로 타이틀을 박탈당한 채 링에 올라 다시 만난 호마 감보아에게 근소한 차의 2-1 판정패를 당해 일찍 왕좌를 내려왔고 필리핀 출신이지만 일본으로 이적해 활동하고 있었던 감보아도 넉달 뒤 일본의 호시노 게이타로에게 아쉽게 판정패를 당해 단명했다.
감보아는 아람블렛에게 패하고 두달 뒤 잠정챔피언에 올라 1차방어에 성공한 바 있었다.
데뷔초 반타작 승률을 기록하며 별볼일 없었던 호시노는 내셔널챔피언에 오른 뒤 기량이 급성장해 세계타이틀까지 거머쥐었으나 5년만에 왕좌 복귀에 나선 차나 포파오인의 노련미에 압도당해 금새 왕좌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숨은 병기였던 니이다 유다카는 어느새 노장이 되어버린 포파오인을 판정으로 따돌리고 새 챔피언에 올랐지만 매니저와의 잦은 불화 때문에 단 한차례의 방어전도 갖지 않은 채 곧바로 은퇴를 선언해 버려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로페스 이후 근 3년여간 동양권의 지역 타이틀 수준으로 전락한 WBA 타이틀은 여러명의 챔피언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1998년 3월 보라핀의 장기집권을 역전 4R TKO승으로 끊어 내고 IBF의 새 챔피언이 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졸라니 페텔로는 내셔널챔피언에도 오르지 못한 철저한 무명이었지만 의외로 5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한 뒤 체급 이동을 위해 타이틀을 반납하는 업적을 남겼다.
2000년대에 들어 다니엘 레예스를 누르고 페텔로의 뒤를 이은 멕시코의 로베르토 카를로스 레이바는 사우스포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펀치력이 강해 챔피언에 오르기전까지 18연승 중 17KO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롬비아의 교타자인 미구엘 바레라와의 3연전에서는 파워를 발휘하지 못한 채 타이틀을 내주더니 리매치에서 오히려 KO패를 당해 기대만큼 큰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강타자 레이바를 완벽히 셧아웃시키며 등장한 바레라는 2차 방어에서 멕시코의 12년차 노장복서인 에드가 카르데나스에게 뜻밖의 역전 KO패를 당해 타이틀을 상실했는데 이 경기에서 뇌를 다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해 일찍 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공석중인 WBO왕좌를 차지한 스페인의 호르헤 마타는 국제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는데 잠정챔피언으로 있다가 정규챔피언으로 승격된 행운아였다.
하지만 그 행운은 몇달 뒤 니카라과에서 날아 온 에두아르도 레이 마르케스에게 밑천을 드러내며 11RbKO패해 오래가지 못했다.
데뷔초 연승가도를 달리며 유망주 소리를 듣다가 자국의 리 산도발을 넘지 못해 승패를 오락가락하는 3류로 통했던 마르케스의 왕좌 재임도 첫 방어전에서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는 바람에 40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후일 로페스의 계보를 잇는 리니얼챔피언으로 인정받았던 푸에르토리코의 이반 칼데론은 경쾌한 아웃복싱의 대가로서
발놀림을 멈추는 순간 터지는 레프트스트레이트와 회전이 빠른 연타가 펀치력이 약한 단점을 커버해 주었으며, 갈수록 노련해지는 경기운영 능력을 통해 4년간 12명의 도전자를 상대했다.
그에게 희생당한 도전자 중 절반가량이 전 세계챔피언일 정도로 칼데론의 방어전은 순도가 높았다.
모처럼 WBO에 챔피언다운 챔피언이 배출되어 철옹성을 구축하는 동안 나머지 3대 기구 타이틀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비교적 안정된 챔피언인 아기레를 꺽고 WBC 타이틀의 새주인이 된 준라판은 2000년에 프로데뷔하여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이적했고 이글 오쿠다, 이글 아카쿠라, 이글 교와 등 수차례 닉네임을 바꿔가며 활동했다.
5년여간의 아마추어복싱으로 다져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선수층이 얇은 이 체급에서 롱런이 예상됐지만 불과 2차 방어만에
멕시코의 아이삭 부스토스와의 경기도중 어깨부상을 입어 4R만에 경기를 포기하는 불운을 겪었다.
럭키가이 부스토스는 선배 아기레와 마찬가지로 북미챔피언에 올라 4년간 재임하면서 미래의 WBC L.플라이급 롱런챔피언인 에드가 소사를 꺽기도 했던 실력파였지만 첫 방어전에서 빠르고 부지런한 일본의 루키 다카야마 가쓰나리에게 끌려 다닌채 석패해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카야마 역시 넉달 뒤 벌어진 첫 방어전에서 부상에서 회복한 이글 덴 준라판의 능숙한 솜씨에 희롱당하며 벨트를 풀었다.
다카야마는 이후 WBA쪽에서 잠정챔피언에 오르며 2차례 더 기회를 잡았지만 챔피언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왕좌에 복귀한 준라판은 1, 2차방어전을 손쉽게 갈 수 있었지만 3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로렌소 트레호에게 두차례 다운을 빼앗기며 혼쭐이 나더니 태국 원정전으로 열린 5차방어전에서 사우스포인 올레이동 시트사머차이에게 압도당해 심판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하며 왕좌를 물려주었다.
무주공산이 된 WBA타이틀은 2002년 1월 전 챔피언 간의 맞대결을 통해 호시노 게이타로가 다시 한번 감보아를
대차의 판정으로 제압하고 투타임 챔피언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역시 첫 방어전에서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던 전 챔피언 노엘 아람블렛의 벽을 넘지 못해 6개월만에 야인이 되었다.
재집권에 성공한 아람블렛은 리매치에 나선 호시노와 2년만에 컴백한 니이다를 적지에서 상대해 잇달아 짜릿한 판정승을 거두며 모처럼 2차방어에 성공한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3차방어에서 또 다시 체중초과로 타이틀을 박탈당한 채 맞이한 니이다 유다카에게 완패를 당해 프로복서로서 정신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챔피언에 복귀한 니이다는 뚜렷한 컬러는 없지만 순간적인 스피드가 좋고 잠시도 쉬지않는 부지런한 복싱으로 정평이 나있었고, 상대의 수를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재임기간 중 잠정챔피언에 올랐던 후안 란다에타와 다카야마 가쓰나리를 포함해 7차 방어에 성공했고, 마지막이 된 8차방어전에서 니카라과의 강타자 로만 곤살레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S.플라이급까지 넘나들며 활동하다가 말년에 최경량급에서 세계챔피언의 영예를 안게 된 IBF챔피언 카르데나스의 왕좌는
예상대로 실력파인 다니엘 레예스를 상대로 한 첫 고비를 넘기지 못했고, 염원하던 타이틀을 획득한 콜롬비아의 레예스도 구적인 레이바를 불러들여 3R TKO로 앙갚음 했지만 인도네시아의 무하마드 라흐만을 만나 홈타운디시젼에 울어야 했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판정으로 타이틀을 찬탈한 라흐만은 60전이 넘는 캐리어를 갖고 있을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으로서 12년만에 왕좌복귀를 노리던 루크밍콴에게 3R부상무승부를 기록한 이후 벌인 두번의 방어전에서 깨끗한 KO승을 선보여 불안감을 씻어냈다.
후에 39살의 나이로 다시 WBA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라흐만의 뒤를 이은 필리핀의 플로란테 콘데스는 내셔날챔피언 출신으로 타이틀 획득전에서 라흐만으로부터 두차례나 다운을 빼앗을만큼 일발 펀칭파워를 소유한 강타자로서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첫 방어에서 멕시코의 샛별 라울 가르시아를
한차례 쓰러뜨리고도 판정패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이렇게 IBF 타이틀도 WBA 타이틀 못지 않게 뚜렷한 강자를 찾지 못한 채 중남미를 중심으로 자고나면 챔피언이 바뀌는 양상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반 칼데론의 품에 안긴 WBO 타이틀을 제외한 나머지 기구의 챔피언쉽은 동양권과 중남미권의 고만고만한 챔피언만 양산한 채 팬들의 관심은 커녕 오히려 냉소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흠없는 25연승 끝에 2007년 11월 WBC의 새 챔피언에 오른 태국의 <올레이동 시트사머차이>는 3전만에 WBC의 마이너 타이틀을 거머쥐고 국제 경기 감각을 쌓아 온 정석플레이어로서 한 차례의 무승부를 포함해 6차방어를 기록했지만 3차방어부터는 매 경기 도전자와 접전을 벌여 강한 이미지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불과 7전만에 세계도전에 나선 일본의 <이오카 가즈토>에게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하며 5R TKO로 패퇴해 그의 퇴장은 더욱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WBC 초대챔피언이었던 이오카 히로키의 조카로서 아마추어에서 100전이 넘는 캐리어를 통해 탄탄한 기본기를 쌓아 온 이오카는 큰 키와 스피드를 바탕으로 복부공격에 일가견이 있어 곧잘 KO승을 이끌어 낸다.
아직은 이 체급에서 언제까지 얼마나 실적을 낼지 의문이지만 서서히 대물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WBA쪽은 이 체급의 베스트였던 로페스의 재래로 불리운 니카라과의 강타자 <로만 곤살레스>가 출중한 기량과 파워를 겸비해 오랫동안 왕좌를 지킬 것으로 예견됐으나 3차례 방어 후 L.플라이급으로 월장해버려 아쉽게 되었다.
이후 잠정챔피언에 올라 있었던 새미 쿠티에레스가 후임을 자처했지만 WBA는 2010년 11월 새로운 결정전을 치러
피그미 무앙차이야품을 접전 끝에 2-1의 판정으로 누른 태국의 <콴타이 시트모셍>을 정규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무패의 시트모셍은 오랫동안 PABA 타이틀을 방어하며 기회를 노리다 챔피언에 올랐는데 첫 방어전에서 39살의 노장이었던 전 IBF 챔피언 <무하마드 라흐만>에게 한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던 중 상대의 강력한 라이트훅 한방을 보디에 허용하고 9R KO로 무너지는 비운을 맞아 단명했다.
경량급에서 보기드문 노익장을 과시하며 투타임 챔피언에 오른 라흐만은 첫 방어전에서 세차례나 세계도전의 경험을 갖고 있던 태국의 <폰사완 포프라묵>에게 시종일관 선전을 펼쳐 타이틀방어가 기대됐지만 오히려 홈링의 희생양이 되어 눈시울을 적셨다.
33살의 나이에 타이틀을 획득한 폰사완의 왕좌도 오래갈 수 없어서 석달도 않돼 벌인 첫 방어전에서 일본의 <야에가시 아키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쉽게 벨트를 풀어야 했다.
오랜 아마추어를 경험하고 프로 전향 5전만에 OPBF 챔피언에 올랐던 야에가시가 재수 끝에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면서 일본은 WBC 챔피언 이오카와 함께 양대기구를 석권하며 이 체급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IBF에서는 무패의 <라울 가르시아>가 4차 방어에 성공하며 비교적 강인한 모습을 보였는데 나중에 WBO J.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는 라몬 가르시아와 쌍둥이 형제 복서다.
데뷔 초에는 탄탄한 기본기에 강력한 펀칭파워를 발휘해 KO승이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련미와 지능적인 복싱에 의존하면서 판정까지 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렇게 가르시아가 방심한 사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숨은 진주 <은코시나티 조이>가 전 챔피언인 콘데스를 제압한 뒤 톱콘텐더에 올랐고, 홈링으로 가르시아를 불러들여 대차의 판정승으로 누르고 새 챔피언에 올랐다.
이반 칼데론이 상위 체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된 WBO타이틀은 필리핀의 <도니 니에테스>의 차지가 되었다.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타겟을 흐리는 재주를 가진 니에테스는 우리나라의 최요삼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헤리 아몰을 누르고 급성장해 챔피언 결정전에서 후일 WBA 챔피언에 오르는 폰사완 포르라묵을 꺽어 챔피언에 올랐다.
약체를 상대로 4차례 방어에 성공한 후 L.플라이급으로 월장해 이 체급에서의 활약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후임으로는 무패의 신예 루이스 데 라 로사를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잠정챔피언에 오른 전 IBF 챔피언 <라울 가르시아>에게 승계됐지만 이미 전성기를 넘긴 듯 2차 방어전에서 동국의 <모이세스 푸엔테스>와 다운을 주고 받는 난타전끝에 석패했다.
한계체중 -47.6kg 이하의 새로운 체급이 신설된 지도 벌써 4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얇은 선수층에 동양 또는 중남미 지역타이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이 체급에 대한 존재의 이유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제왕회관 휴게실 >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일본 한국의 젖가락 이야기 (0) | 2004.05.30 |
---|---|
석가모니와 나무 (0) | 2004.05.30 |
자살,,, 삶과 죽음의 선택 (0) | 2004.05.30 |
자존감과 자존심 (0) | 2004.05.30 |
복서 여배우 이시영 (0) | 200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