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타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글귀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저 글귀는 ‘부학자 재적극박 어쩌구 하는 말이네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글귀잖아요. 저도 알겠는데 나으리만 모르겠다는 겁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11만3000번 읽었다는 사기 ‘백이열전’의 글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학자 재적극박은 무릇 학식이 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이라는 뜻이다.
책은 죽도록 읽지만 머리는 지독히 나빴다는 김득신의 일화는 이어진다.
어느날도 김득신이 한식날 말을 타고 들 밖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5언시 한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댓구를 찾지못해 끙끙댔다.
이때 말고삐를 잡고가던 하인이 대뜸 ‘도중속모춘(道中屬暮春)’를 외쳤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맞이했으니(馬上逢寒食) 길가는 도중에 늦봄 되었네.(道中屬暮春)"
라니 얼마나 멋들어진 시인가.
하인의 댓구에 감탄사를 연발한 김득신이 말에서 내려
“네 재주가 나보다 낫구나. 이제부터 내가 네 말고삐를 잡겠다”
고 했다.
그러자 하인은 팔을 내저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 구절은 나으리(김득신)이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唐詩)가 아닙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자기 머리를 쥐어 뜯었다고 한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의 시모음집인 <당음(唐音)>에 실린 송지문(656?~712)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이 아닌가.
"말 위에서 한식날을 맞이했으니, 길 가는 중에 늦봄 되었네. 가련하다, 강 포구를 바라보니 낙교 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네.(馬上逢寒食 途中屬暮春 可憐江浦望 不見洛橋人)"
이런 일화는 김득신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희화화 해서 전한 것이다.
놀림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득신이 노둔하고 오활(세상물정에 어둡다) 했다는 것은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등장한다.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 기사에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해서 쓰임받지 못했다”
는 인물평이 나온다.
순암 안정복 역시 김득신을 평하면서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했지만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고 했다.
이렇듯 김득신을 향한 모든 평가는 예외없이 그의 ‘노둔함’을 화제에 올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평가 뒤에는 어김없이 책읽기와 시짓기를 향한 김득신의 집념에 대한 찬사가 녹아있다.
한마디로 김득신은 ‘평생 노력한 둔재’라 할 수 있다.
김득신은 시를 지을 때 한 자 한 자를 떠올리느라 괴로워했다.
하겸진(1870~1946)의 <동시화>는 김득신과 관련된 일화를 전한다.
“김득신은 괴로이 읊조리는 벽이 있었다. 시에 몰두할 때 턱수염을 배배 꼬았다.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는 양념장은 올리지 않았다. 아내가 싱겁지 않냐고 묻자 '응 잊어버렸어'라 했다.”
후손인 김유헌은 김득신의 <백곡집>을 읽은 다음
“백곡 선조께서는 만년까지 손수 여러 책을 베껴 서서 늙어서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면서 김득신의 독특한 독서법을 소개했다.
“백곡 선조의 책읽기가 백번 천번 만번 억번에 이르렀다. 글의 맥락이 담긴 복선이 있는 곳은 밑줄 쫙,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다. 핵심의미가 있는 곳은 흘려쓴 글씨로 각주를 달았다. 삼가 필적을 살피니 쇠바늘과 은철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백곡집 서독수기후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에서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다.
김치가 김득신에게 당부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다.
한유 문장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 菫捷今年進士科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龍湖)」 「구정(龜亭)」 「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곡집(柏谷集)』을 남기고 80세에 죽었다.
“김득신은 당대 문단의 최고봉이다”
세간의 막된 표현대로 머리가 나쁜 김득신이었지만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가 어린 듯 (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는 옛말대로 였다.
그랬으니 다름아닌 효종 임금이 김득신의 시를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칭찬했다.
당대 한문사대가로 명성을 높았던 택당 이식(1584~1647)은
“백곡 김득신은 당대 소단제일(騷壇第一·문필가 사회의 1인자)이라 칭찬했다. 김득신을 ‘멍청한 둔재’라 평한 안정복도 뒤에 가서는 “밤낮으로 책을 읽은 김득신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고 칭찬했다.
안정복은 최고 1억번(10만번) 이상 다독하는 김득신의 독서법을 ‘대추를 맛도 보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는 것’이라 했지만 “이 노인(김득신)은 이런 다독을 통해 문장을 이루었다”고 치켜세웠다.
반짝했던 영재와 마음을 지킨 김득신
황덕길(1750~1827)이 김득신의 ‘독수기’에 쓴 후기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서우(1633~1709) 역시 “김득신은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칭찬했다.
“공(김득신)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고 독서에 힘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지킨 사람이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다.”
이서우는 그러면서 ‘세상에 어릴 때의 천재는 많지만 그 천재성을 평생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어려서 깨달아 날마다 천마디 말을 외워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게으름을 부리다가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다. 공(김득신)과 견주면 어떠하겠는가.”
ㅡ백곡집ㅡ
박세당(1629~1703) 역시 김득신의 치열한 삶을 상찬했다.
“공은 심신을 스스로 고달프게 하면서 시 한자를 짓는데 1000번이나 단련했다. 시짓는 일에 골몰하면 팔뚝을 들어 쓰는 시늉을 하면서 타고 가던 조랑말이 길거리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했다. 마부가 길을 비켜라 소리를 질러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쓴 시어이니 상황이나 물상의 자태를 묘사한 것이 참모습을 방불하게 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백곡 김득신은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정두경·임유후·홍석기·권항·김진표·이일상·홍만종 등과 시를 나누면서 17세기 시단을 이끌었다.
특히 경치를 묘사할 때 특유의 정조와 아울러 회화성을 표현함으로서 이른바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의 그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는다.
김득신은 7책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만고의 천재였다는 세종대왕도 모든 책을 100번씩 읽었다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취미가 뭐냐 물을 때 종종 ‘독서!’라고 대답했던 때가 불과 30~40년 전이다.
그때는 “무슨 취미가 독서냐. 촌스러운 대답”이라고 손가락질 했건만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이젠 프로필란에 ‘취미 독서’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 백곡(김득신)에게 병환이 없었겠느냐. 문밖출입을 안했겠느냐. 게다가 백곡은 타고난 효자이니 부모를 돌보는데 시간을 썼을 것이다. ‘백이열전’만 읽었다 해도 4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백이열전’만 읽는데 4년이 걸리는데 어느 겨를에 여러 책을 저토록 읽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다산은 “‘독수기’는 아마도 백곡의 작고 후에 누군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한 것 같다”고 단정했다.
다산은 백곡이 지은 시를 증거로 들이대며 백곡 김득신의 독서량을 추정한다.
“백곡의 시 중에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를 천 번을 읽고서야(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菫捷今年進士科)’라는 글귀가 있다. 이 시가 백곡이 읽은 독서량의 실제를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다산은 김득신의 독서량을 이렇게 ‘팩트체크’했지만 절대 폄훼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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