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제2대 정종(방과)의 여자들 ㅡ
煮豆詩 (자두시)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깍지를 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가마솥 속의 콩은 울고있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느뇨
ㅡ 조식
형님인 조비가 동생인 조식에게
죽기 싫으면 일곱 걸음 걸어가기 전에 시를 지으라고 하자
이렇게 시를 지었단다.
대저 권력이 뭐길래 저럴까?
형제지간에..
부자지간에..
모자지간에
그 무슨 해귀한 짓들인가?
그깟 권력 때문에...
누구는 권력이 소태맛이라고 하는데 소태를 먹어 본 적도 없고,
권력의 옆다리도 끼지 못했던 우리 눈에는 그저 미친 짓들로 보인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힘들다.
창업할 때는 힘을 모으지만 창업이 되고나면 모두가 자기 지분을 차지하려고들 하니 아귀다툼을 하는 것이다.
마치 세랭게티의 하이에나처럼...
신덕왕후 강씨는 비운의 여자였다.
씰데없이 과욕을 부려서 자식 셋도 비명횡사를 시켜 그 씨를 말려버렸다.
기냥..
''방원아! 고생했데이. 비록 내가 니 새엄마지만 니는 훌륭하다.''
이렇게 방원이를 인정하고 칭찬한 후에,
''내도 방번이와 방석이를 낳았으니 내 피붙이가 얼마나 소중하것냐? 내 솔직히 내 자식을 왕으로 앉히고 싶다.''
이렇게 자기의 맘을 터놓고,
''그러나 우짜냐? 그것은 이 속좁은 아녀자의 생각이고, 공功은 공이고 정情은 정이 아니것냐? 조선 창업에 니가 제일 고상혔고, 니가 과거에도 합격한 우리 이씨 집안의 재목이니 니가 다음에 대권을 이어 받아라.''
이렇게 통 크게 양보한 다음에,
''이 새엄마가 니하고 몇 살 차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니 아버지와 살을 부비고 살면서 니 동생 셋을 낳았으니 새엄마도 엄마가 아니겠냐? 내가 내 자식만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천륜이었다. 그동안 섭섭한 것이 있다면 이 애미를 용서하거라!''
이렇게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를 약간 인용한 다음,
(아! 그때는 림태주 시인은 없었구나...^^)
''나는 내 혈육에 대한 대권 욕심을 버렸다. 니가 비록 돌아가신 형님의 아들이지만 내 아들이나 다름없으니 니가 용상에 오르면 돌아가신 형님도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니가 과거 급제할 때처럼...''
요렇게 감정이입을 하고,
''내가 그리 오래 살 것 같지 않구나. 내가 눈을 감아도 우리 방번이와 방석이 그리고 경순이가 걱정이 돼서 눈을 감기가 쉽지 않구나. 방원아! 부디 대권을 잡아 용상에 오르면 우리 새끼들 잘 부탁한데이. 내 니만 믿는다.''
그러면서
방원이의 손을 살~포시 잡았으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것도 쬐끔 젖은 눈망울을 하면서...
이랬다면
이러했다면,
방원이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강씨 소생의 아들들을 잘 보호했을 것이다.
감동ᆞ감화ᆞ감격해서...
역사나 인생지사나 'if'(만약에)는 없다!
만약에 신덕왕후 강씨가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웠다면
자식들이 지금쯤 우리 마을 익안대군(방의) 자손처럼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아쉽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이 아쉬움이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지혜롭게 살게 만드는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와 대비되는 삶을 사신 분이
정종의 여자, 정안왕후 김씨다.
신덕왕후와 비록 한 살 차이지만...
참 현명하신 왕후이셨다.
지분知分ᆞ수분守分ᆞ안분安分!
지 분수를 알고..
지 분수를 지키면..
지 분수가 안전하다는 것이다.
정안왕후 김씨!
무릇 말로 백번 하는 것보다
한번이라도 행동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언百言이 불여일행不如一行!''
정안왕후 김씨는 공민왕 4년(133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주 김씨, 김천서이고 엄마는 담양 이씨였다.
담양 이씨?
좀 희귀한 이씨다.^^
그래도 좋은 성씨임을 알 수 있다.
여자를 들여올 때 ㅡ옛날 버전임ㅡ
가장 고려 대상은 친정 어머니였다.
왜냐면 그 엄마에 그 딸이기 때문이다.
정안왕후 김씨를 잘 교육시킨 것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 방과와 결혼했다.
두 살 연하의 남자와...
태조 7년(1398)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방과가 세자로 책봉되자 덕빈으로 함께 책봉되었다.
그리고 9월 태조가 건강(화병?)상 이유로 하야 하여 태상왕으로 물러나자
방과가 제2대 조선왕으로 등극했다.
남편 방과가 한 일은 무엇인가?
왕이 되기 위해 아무 한 일도 없이 방원이에 의해 허수아비 왕이 된 것이다.
김씨,
졸지에 남편이 왕이 되니 왕비가 되었다.
남편이 '허수아비'이니 자신은 '허수애미'이라는 걸 알았다.
즉 '실수實數애미'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정안왕후 김씨..
현모양처가 아니라 양처였다.
무신 소리냐 하면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녀를 위해 신덕왕후 강씨처럼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무소유의 철학>을 터득하신 것이다.
무소유!
무소유란 무엇인가?
이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안왕후 김씨를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 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 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무소유!
참 말로는 쉬운데 행하기가 어렵다.
삶의 무게는 어떻게 결정될까?
집착의 정도이다.
바람처럼 살다가신 정안왕후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볍게 살다가셨다.
가장 모범적인 왕후로서...^^
정안왕후 김씨!
소위 말하는 끗발도 없고 얼굴도 저 중국의 4대 미인인 서시 ᆞ초선ᆞ왕소군ᆞ양귀비들과 견줄 정도의 미인도 아니고 영조의 후처 정순왕후 김씨 처럼 머리가 샤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수더분한 방과의 본부인으로 심덕과 후덕함을 겸비한 현처이다.
정종은 무려 아홉 명의 후궁과 17명의 아들, 8명의 딸들을 두었다.
일반적인 아녀자 같으면 시기와 질투심이 극에 달할 텐데
꾸욱 참고 남편을 내조하고 집안을 다스렸다.
자고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정종!
정안왕후 김씨의 말을 잘 들었다.
왜냐하면 남편에 대한 그녀의 진심과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땅과 여자는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이것은 옛날 버전이다.
영어로 하면 old fashioned proverb이다.
지금은 남자가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정안왕후 김씨, 정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마, 아니 서방님! 초심을 잃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저 이스라엘에 사셨던 Jesus 라는 예수께서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샤 것은 가이샤에게!'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 용상은 방원이 도련님 것이니 빨리 주인에게 돌려 줍시다.''
그러자 정종, 그렇잖아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인데 흔쾌히 OK 한다.
그래서 1400년 11월 방원이에게 옥새를 넘기고
훌훌 개성 백룡산 기슭에 인덕궁을 짓고 상왕 생활을 한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격구, 온천, 연회를 즐기며 현대의 골프인 사냥도 하면서 해피하게 살다가 1419년 9월 63세로 해피하게 가셨다.
참 복도, 처복도 많았던 왕이었다.
정안왕후 김씨,
여느 왕비처럼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부렸다면
방원이에게 찍혔을 것이고 정종을 비롯한 가솔들도 제 명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세상의 무상함과 무소유의 개념을 터득하고
욕심을 내려놨던 정안왕후 김씨!
정안왕후 김씨는 정종보다 7년 앞선
1412년 6월 인덕궁에서 남편과 아홉 동생(첩)들,
그리고 25명의 양자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58세로 먼길을 떠났다.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사자의 운구가 지날 때 문상객들이 박수를 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그리고 저 세상에서 잘 살라고...
정안왕후 김씨의 글에서는
좀 표현이 저속스러운 것은 피했다.
글의 품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안왕후 김씨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 조祖와 종宗에 대하여
祖는 공功이 있는 왕에 대하여 붙이는 묘호이고
宗은 덕德이 있는 왕에게 주로 붙인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이도 태조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태조다.
* 대군大君과 군君에 대하여
大君은 정실 소생 즉 왕비에서 나온 왕자를 말하고,
君은 첩인 후궁의 왕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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