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30일,
동토의 시베리아 깊숙한 무인지경이었던 퉁구스카 지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력으로 따지면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1천 배 규모의 것이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집들의 유리창이 박살이 났고 지구를 반 바퀴 돈 영국과 스웨덴의 밤이 대낮같이 밝아질 정도로 규모가 큰 폭발이었다.
제주도만한 넓이의 삼림이 쑥대밭이 됐고 순록들도 떼죽음을 당했다.
화산 폭발을 제외한다면, 그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어떤 폭발보다도 규모가 컸다.
퉁구스카는 워낙 오지였다.
1908년이면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정부가 국내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혁명 분위기를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을 즈음이었고, 인명 피해 하나 보고되지 않은 퉁구스카 폭발에 여유를 둘 형편이 아니었다.
제국 정부가 쓰러진 후 새로이 건설된 소비에트 연방도 내전이다 사회주의 건설이다 해서 퉁구스카 폭발의 원인 따위를 궁금해 할 정신이 없었다.
결국 퉁구스카 폭발 조사단이 현지에 접근한 것은 폭발이 일어난 지 20여년이 흐른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단은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운석 충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지만 조사단은 어디에서도 운석공(隕石孔)같은 충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수천만 그루의 나무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쓰러져 있던 것은 폭발 후 폭풍의 영향으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정작 폭발 중심부의 나무들은 불에 타 버리기는 했으나 꼿꼿이 서 있었다.
훗날 인류는 이런 현상을 히로시마에서 경험하게 된다.
즉 중심부보다 주변부가 더 피해를 입는 원자폭탄의 폭발 양상과 매우 비슷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호사가들은 외계인의 우주선이 폭발했느니 하는 상상력까지 발동하게 되지만 현지에서 방사능은 일체 검출되지 않았다.
온갖 설들이 난무했지만 아직도 폭발의 원인과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만한 확실한 이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퉁구스카 폭발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규모 가운데 하나의 폭발이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또는 심지어 지금의 인류의 상식을 넘어서는 대폭발이었으며, 일어날 수 있는 대자연의 공포 (이게 모스크바에 떨어졌다면?)를 실감하게 해 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실제로 지질학적 시대로 들어가면 퉁구스카 폭발보다 더 심후한 영향을 가져왔을 운석 충돌과 폭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로부터 81년 뒤인 1989년 6월 30일 경우는 다르지만, 그 위력만큼은 유사하다 할만한 폭발이 남과 북의 코리아를 동시에 뒤흔들었다.
폭발의 진원지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의 관문 순안 공항이었다.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여대생이 마이크 앞에서 또랑또랑한 서울 말씨로 그리고 가끔씩 배어나오는 운동권 사투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씨가 무려 9일간의 여행 끝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나 황석영 등 유명인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그 때문에 형극을 치룬 일은 있었지만 평범한 학생, 공기업의 간부를 아버지로 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대한민국의 대학생, 그것도 여대생이 그 험난하던 시절, 북한에 잠입하여 왔노라 보았노라 전대협이노라 외치고 선 모습은 퉁구스카 폭발같은 놀라움이었고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 모두는 말문을 잃어버릴만큼 충격에 휩싸였다.
그날, 그 순간 나는 서울역에 있었다.
그때 서울역 대합실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화면에 눈을 못 박은 채 멍하니 서 있던 풍경은 앞으로도 잊기 힘들 것 같다.
서울역 경내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그 시끄러운 서울역 경내에서 노인들의 가래 끓는 소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으니.
소설가 이문열은 그의 소설 속에서 맹랑한 소리를 토하고 다니는 그녀가 꼭 마녀 같았다고 토로했지만 옥중의 문익환 목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이라며 감격해 했다.
그 저주 섞인 욕설과 감격적인 찬사 사이에서 한국 사회는 폭발 후의 퉁구스카처럼 요동쳤다.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눈 앞에 벌어진 것이다.
임수경은 그대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가 남긴 성명이나 언행은 실시간으로 대자보화하여 대학 곳곳에 붙여졌으며, 조금 민망하게도 임수경과 그 연인과의 생생한 대화, 심지어 함께 테트리스 오락하던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까지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의 일면으로 공개 회람되어 대자보로 붙여지기도 했다.
그 해 추석,
학교 총학생회가 마련한 귀향버스는 임수경의 사진과 석방 구호를 덕지덕지 붙인 채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그 충격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스물 갓 넘은 남조선의 여대생의 행동 하나 하나에 북한 인민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녀의 손 한 번 잡아보자고 몰려드는 인파는 그 지엄한 북한 당국의 통제선을 무너뜨렸다.
"우리 인민들이 이렇게 말을 안들은 적이 없다"
고 사회안전원이 입을 벌릴 정도였다.
임수경은 북한에서도 하나의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금단의 땅에 내린 처지로 주눅도 들만한데 그런 낌새가 없었다.
황공하옵게도 김일성이 준 선물을 깜박하고 두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도 대수롭지 않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며, 무리한 요구에는 거침없이 고개를 저어 끝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한 당찬 여대생이 일으킨 폭발이었다.
북한 인민들에게도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남한 여대생은 문화적 충격이었고 일종의 파열구였던 것이다.
“야 남조선 처자레 우리가 생각했던 거하곤 좀 다르단!”
직업상 만났던 탈북자들 가운데 림수경을 기억하는 이들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린 가는(걔는) 남조선 내리가문 죽는다 생각했댔어요. 아 근데 내일 죽을 아이가 어캐 저리 태연할 수 있나 저리 의연할 수 있나 눈물이 났댔지.”
그리고 당시 임수경 또래였던 탈북자 아주머니의 한 마디,
“림수경 옷 보고 놀랐슴다. 옷이 매일 달라지더란 말임다. 자는 대체 옷을 몇 벌 개지고 온 거가 우리끼리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다시 남한으로 넘어온다.
임수경이 일으킨 폭발에 몸을 가누지 못하실 정도로 흥분하셨던 아버지는 매우 과격한 상욕과 저주를 퍼부으시며 식탁을 내리치셨다.
내려오면 무슨 벌을 내려야 하고 어떻게 죽여야 한다는 얘기까지 한 순배 돈 다음, 조금 열이 가라앉으셨을 때 아버지는 다소 엉뚱한 말씀 한 마디를 남기셨다.
"그래도 쟤는 역사에 남겠다."
1989년 6월 30일,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다.
그것은 철벽같은 분단의 철석 위에 터졌던 메가톤급의 폭탄이었다.
그래도 철벽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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