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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이회영(1867년 ~ 1932년)

by Ajan Master_Choi 2019. 3. 3.

이회영(李會榮)은 대한제국의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경주 이씨 백사공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대 후손으로 자는 성원(聖元) 호는 우당(友堂)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 정씨는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다.

 

이회영 가문은 명문가로 선조(先祖) 10대조 영의정 이항복, 9대조 부사 이정남, 8대조 이조참판 이시술, 7대조 형조참판 이세필, 6대조 좌의정 이태좌, 5대조 영의정 이종성, 증조부 이조판서 이석규, 조부 이조판서 이계조, 큰 아버지 영의정 이유원, 아버지 우찬성 이유승 등이 있다.

 

이회영의 형제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년 ~ 1940년),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년 ~1934년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큰 아버지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년 ~1925년 신흥무관학교 교장 역임),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는 계획을 세우고 6형제와 함께 서간도로 망명을 하는데 주도적 역활을 함),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

여섯째 이소영(李韶榮 ? ~ ?)

일곱째 이호영(李護榮 1875년 ~ 1933년 신흥무관학교 재무담당 중국 북경에서 광복운동을 하던 중 1933년 북경에서 행방불명 일본군에게 살해 당함) )

1녀 이름 ?(해공 신익희의 여섯째 형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복무원을 지낸 신재희의 부인)

2녀 이름 ?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이회영은 어려서 부터 한학을 배우고 대원군이 음직(蔭職)으로 탁지부 주사에 임명했으나 사양하였다.

이회영은 서울의 상동교회(중구 남창동)에 나가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고 상동교회에서 이상재와 나인영을 만나고 신분 철패에 앞장서고 혼로된 여성의 재혼을 장려하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을 제혼시키고 봉건잔재를 타파하는데 힘섰다.

1885년 판서를 지낸 달성 서씨 서신보(徐臣輔)의 딸과 교회에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04년 8월 22일 일본은 제1차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關한 協定書 :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앞두고 일본은 서구 열강과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을 펼처서 미국과 1905년 7월 29일 대한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내각총리 대신 가쓰라 다로가 일본 도쿄에서 협상 회담을 하였다.

 

1905년 8월 9일 미국 뉴우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하고 그 해 9월 5일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비밀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에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받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을미사변으로 일본 낭인(浪人)들로 부터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천궁에서 시해를 당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11월 일본은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친일 매국노들을 매수해서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같은 사건을 지켜보던 이회영은 힘 없는 나라를 한탄하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회영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받치겠다고 다짐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먼 일족인 이상설(李相卨) 친동생 이시영과 함께 을사조약 을 철회하는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고 나인영, 기산도와 함께 조약쳬결에 가담한 을사오적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재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암살해기 위해서 모의하였으나 사살하는데 실패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 그리고 안창호, 이갑,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전덕기, 김규식, 이동녕, 이동휘, 김홍량, 신채호, 최광옥,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황제의 아관파천(俄館播遷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함)을 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을 호소하기 위해서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네들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안 일본은 그 해 7월 20일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지시하여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에 올리고 그 달 24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였다.


(촤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화영은 1896년 항일 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풍덕군에 인삼을 재배하는 삼포농장을 세우고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활동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시켰다.

1906년 이회영은 이상설, 이동녕, 여준, 장유순, 유완무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 해 10월 만주 간도의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였다.

 

그 무렵 이회영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는 설득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집안을 공신의 후예 집안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다가 조선의 산하가 왜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 가문은 명문 호족으로서 목슴을 연명하기 위해서 구차하게 살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싸우던 백사(이항복)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왜적과 싸우는 것은 명문 가문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형님과 아우들은 따라주기를 바랍니다."

 

당시 이회영의 형제가 소유한 재산은 큰 아버지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형 이석영은 양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경기도 양주군 가오실(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마을에 별서 홍엽정이 있는데 화도읍과 가곡리에는 그의 땅이 192만 평이 (현 여의도 면적 254만평) 있어서 가오실 별서에서 지낼 때는 자신의 땅만 밟고 지냈다고 한다.

그외에도 양평의 땅등을 빨리 처분한다고 시세보다 싸게 팔아서 거금 40만원을 마련했다.

또 서울 명동에 있던 8,000평의 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팔지도 못하고 후일 일본은 이회영 일가가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자 압류하여 분활해서 판매하였다.

그 왜에 다른 형제들이 소유한 재산도 많았다.

 

※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과 가곡리 그리고 양평군 양서면의 땅은 지금의 시세로 하면 임야는 몇십만원부터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중에는 몇천만원 하는 땅들이 있는데 192만 평을 지금 시세로 하면 약 2조원이 넘는 거금에 해당된다.

 

1907년 1월 중순 이회영의 부인 달성 서씨가 사망하고 1908년 10월 18일 진사를 지낸 연안 이씨 이덕규(李悳珪)의 딸 이은숙(李恩淑)과 상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회영은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계몽 운동을 하고 공옥학교의 학감으로 초빙되고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은숙(李恩淑) 열사)

 

1908년 비밀리에 만주에 가서 이상설과 독립운동을 협의했는데 이상설은 만주에서 활동을 하고 자신은 땅이 팔릴 때까지 국내에서 활동하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만주에 다녀온 이회영은 후손들의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지식인들을 모아서 평양의 대성학교, 안동의 협동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등에 파견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의 학감으로 취임하고 교육에 힘을 쏟았다.

 

1909년 서울 행촌동 양기탁의 집에서 이회영,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도희, 주진수, 김구, 안태국,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 총회를 소집하고 만주 봉천성 삼원보 신한민촌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1910년 7월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장소를 시찰하고 되돌아왔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만주 서간도에 세우기로한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 인사160여 명과 함께 검거된 안악사건(安岳事件)이 터졌다.

안악사건이 터지자 그 해 12월 재산을 다 처분하지도 못한채 이회영의 7형제는 40여 명의 집안 식솔들과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 중에서 따라오겠다는 사람들 60여 명까지 모두 100여 명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통화현 광화진의 합니하 강가에 도착한 이회영 일행은 그 곳에서 잠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정착했다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 원세개 중국의 정치가 1912년 ~ 1916년까지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을 지냄)의 도움으로 1911년 4월 만주 지린성 지린시로 주거지를 옮기고 땅을 매입하였다.

원세개의 도움으로 땅을 매입한 이회영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이상룡, 재무부장은 이동녕이 맡았고 이회영은 내무부장을 맡았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에 종사하고 군사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위안스카이(袁世凱 : 원세개)

 

1911년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소장 이동녕, 교관 김창환, 남상복, 이장녕, 이세영 등을 임명하고 운영하였다.

1912년 4월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 : 1954년 국무총리를 역임), 성준용(成駿用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정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대표)등 40여 명을 배출하였다.

 

1913년 강습소 건물을 증축하는데 돈이 모자라자 둘째 형 이석영이 전답 6,000평을 팔아서 충당하여 건물을 준공하고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운영하였다.

그 해 흉년으로 경학사는 해체되고 이회영은 국내로 들어와서 독립군을 육성하는 학교를 세우기 위한 군자금 모금을 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그 후로 군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여러번 국내로 들어와서 여러 인사들과 접촉을 하였다.

 

1917년 이회영은 둘째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고종황제의 왜 조카딸 조계진(안기부장 이종찬의 어머니)과 혼례를 올리자 귀국하여 혼례 식장에서 고종과 접촉하고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고 고종과 논의 하였다.

1918년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서 국내로 들어온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만나서 고종의 망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여 계획을 세우고 시종(侍從) 이교영을 통해서 고종의 승락을 받았다.



고종이 중국으로 망명을 하고 중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계획을 세웠다.

고종은 내무대신을 지낸 민영달을 시켜서 망명 자금과 독립자금으로 쓰라고 거금 5만원을 주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을 시켜서 북경에 고종이 거처할수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고종 망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해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이회영은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을 돌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동립운동을 종용하였다.


(노년의 고종황제 중앙)

 

1919년 5월 각지역에서 애국 청년들이 신흥강습소로 몰려들자 전부 수용할 수 없어서 신흥중학교는 다른 학교에 위임하고 신흥강습소는 유하현 고산자가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

 

1919년 초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자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내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 분쟁이 일어날것을 우려해서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그 해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했다.

그 후 이회영이 우려했던데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저마다 파당을 짓고 기호파와 서북파로 갈라지고 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로 갈라저서 서로 주도권을 놓고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921년 이회영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중재를 맡았다.

 

1923년 이회영은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하는것이 옳은 길”이라는 무정부주의를 찬양(贊襄)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회영은 신채호,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 주의자 연맹을 결성했고 그 기관지인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하면서 패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소작 농민운동을 위해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흐터져 있던 독립군이 상해로 집결하자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이회영은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비밀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행동강령을 일본군 각 기관과 일본군 수송부대를 파괴하고 일본국 중요 요인과 친일파를 사살하기로 하고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약속받았다.

 

흑색공포단의 단원인 이강훈, 유기문,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 등을 동원해서 중국 국민당의 친일파 수장인 왕정위(汪精衛)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왕정위의부관을  사살하고 중국 푸챈성(福建省) 샤먼시(厦门)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폭파했다.

그 해 11월 중국 천진에서 가난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어서 여러 날을 꿂은 상황에서도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서 만주로 가는 도중에 중국 대련에서 밀고로 일본 수상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수상경찰에 체포된 이회영은 대련의 일본 수상경찰의 고문 끝에 1932년 11월 17일 향년 65세로 옥사하였다.

(앞줄 중앙 이종찬 우측 눈물을 흠치는 분이 이회영)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열사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西間島 始終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에 잘해야 한끼를 먹는데 그것도 한달이면 절반은 죽으로 먹었다"


고 회고하면서 생불여사(生不如死 :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못한 삶)한 어려운 삶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상훈

 

첫째 이건영 :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

둘째 이석영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셋째 이철영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넷째 이회영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다섯째 이시영 :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일곱째 이호영 :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 : 1977년 건국훈장 애족장

 

참고 건국훈장 종류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등급: 건국훈장 대통령장

3등급: 건국훈장 독립장

4등급: 건국훈장 애국장

5등급: 건국훈장 애족장

 

서울 종로구에서 제11,12,13,1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마지막 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은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의 아들이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이종걸은 이회영의 친 손자로 이종찬과 이종걸은 사촌지간이다.


(이종찬)


(이종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