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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분쟁의 역사 그리고 홀로도모르

by Ajan Master_Choi 2022. 2. 21.
홀로도모르Holodo(기아)+mor(대규모 죽음)

기원전 8~2세기 흑해 북쪽의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스키타이인이 살았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도시도, 성과 요새도 짓지 않고 이동할 때는 포장을 둘러친 마차에 가재도구를 실어 소나 말에게 끌게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생활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스키타이의 토지가 목초로 우거지고 여러 하천이 흐르는 평원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이때부터 비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은 능란한 기마술이 특징인 용맹한 전사였는데, 침공해 들어오는 페르시아인을 격퇴한 기록도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루스 공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키예프(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이름이 됐다)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직계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논리는 이렇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에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 영토가 됐고 나라 자체가 소멸해서 계승자가 없었으나, 키예프 루스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해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며,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평하며, 우크라이나 땅에도 키예프 루스 공국을 계승한 국가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 17세기 중반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땅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돼 언어도 제각기 다르게 사용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의 지배하에 놓였던 16세기 말에는 귀족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유로운 농민들 대부분이 영주의 농노가 되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농노가 사라지던 시대에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노가 출현한 셈”이다.

이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우크라이나 땅을 탐냈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족이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20여년간 우크라이나 영토의 80%는 러시아 제국,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나라들에 치여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볼셰비키 적군, 폴란드군, 루마니아군,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세력들이었다.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여러 세력의 충돌로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차 대전으로 러시아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탄생했다.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구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이뤘다.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의 어느 민족보다 긴 시간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이 시기에 독립에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의 조직력과 레닌의 전략적 능력, 러시아 차르 정부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돼 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와 낮은 인텔리 지도자의 비율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1922년 소비에트연방이 정식으로 성립한 이후 70여년간 우크라이나는 연방의 한 부분이 됐다.

지연된 독립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큰 시련을 겪는다.
소련 초기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상당히 자유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모스크바에 전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역은 좁아지고 결국 모스크바에 의해 완전히 통제돼 소련의 일개 행정 단위가 됐다.

스탈린은 1927년 집권 후 민족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민족주의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스탈린은 1928년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스탈린은 공업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며, 1928~1932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공장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고 집단농장으로 보내는 조치가 이뤄지자, 절망한 농민들은 자포자기에 빠진다.
이들은 자기 소유 가축의 절반 이상을 잡아먹거나 팔아 버렸다.
여기에 소련 공산당의 수확물 강제 할당과 흉년이 겹치면서 1932∼1933년 최대 6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한 대기근이 벌어졌다.

소련 공산당이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수확물을 무리하게 징발해 러시아 본토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재였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몰려있던 도시에 비해 우크라이나 전통이 잘 보존된 농촌지역에서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 중심부는 멀쩡한 채 유럽 최대 곡창지대에서만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스탈린은 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떠넘겨 약 10만 명이 숙청됐다.
학계에서 이 시기를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이유다.

오늘날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당시 아사자뿐만 아니라 기근과 함께 닥친 전염병의 희생자, 태어날 때부터 영양이 부실해 결국 삶을 이어가지 못한 영유아 등 홀로도모르가 직간접 원인이 돼 사망한 사람이 최대 2천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사망자 수는 200만명에서 700만명까지 다양하다.

통계가 부실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인데다 이 사건을 '반공산주의 선동'이라면서 한사코 부인한 소련의 통치가 6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자료가 사라지거나 왜곡됐기 때문에 아마도 정확한 피해 규모는 영원히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산하 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홀로도모르 당시 식인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2천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왜 이 사건이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게 됐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이 막 싹 트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려는 스탈린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한다.
홀로도모르 당시 우크라이나 하르키프 지역의 거리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일로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은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말살하려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마적 기획의 결과라는 인식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고 홀로도모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집단화의 부작용으로 생산력이 훼손돼 가던 터에 흉작까지 덮쳤다고 하더라도 수확된 곡물이 제대로 분배됐다면 대량 아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개별 농가와 집단농장을 뒤져 징발한 곡물을 외국에 수출했다.
종자까지 모두 빼앗긴 농민들이 이듬해 파종하지 못해 홀로도모르의 두 번째 해인 1933년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 당국은 '국내 여권'을 도입해 굶주림을 못 견딘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까지 막았다.
이중, 삼중의 억압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악명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이 뒤따랐다.

홀로도모르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다수는 몇 년 후 나치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오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나치군이 격퇴된 후 이들은 소련의 가혹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소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나치에 협력한 사실을 들어 홀로도모르를 '나치 부역자들의 날조'라고 선전했다.

소련의 해체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홀로도모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를 '민족말살'(Genocide) 범죄로 규정하자는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미국과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일부 국가가 호응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은 소련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등으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터져나오고, 우크라이나어 복권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약칭 루흐·rukh)이라는 조직이 결성돼 30만명 가까운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이끈다.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지면서 소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같은 해 8월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을 채택하고, 그해 말 폴란드·헝가리·미국·캐나다 등이 독립을 승인하면서 소련이 사실상 해체된다.

최근 와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의 갈등이 부각됐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강대국들의 전략적·산업적 요충지였기에 이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으며, 갈등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23년이 흐른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주민 비중이 가장 높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동부 2개주가 분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내전의 불을 댕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홀로도모르의 상처를 새삼 후벼파는 행위다.

홀로도모르가 없었더라면 합쳐서 돈바스로 불리는 이곳에 러시아인이 몰려들어 올 일도 없었다.
일할 만한 사람 대부분이 죽고 버려진 땅에 스탈린이 러시아인을 적극적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https://youtu.be/2addQGhA7OA
베트남 전쟁 2편, 영상링크 입니다https://youtu.be/ZWe6F7bDkQc?
베트남 전쟁 3편, 영...https://youtu.be/aYwF_mOBmxk
홀로도모르 당시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