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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위화도 회군(1388년)

by Ajan Master_Choi 2022. 2. 14.
고려 말 이성계와 최영은 요동 정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고려는 최영의 주도로 명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했고, 이성계는 현실적인 한계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다.
우왕의 지시로 이성계가 지휘하는 요동 정벌군이 압록강까지 나아갔으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린다. 

1. 고려정부에 선전 포고하는 이성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렀다.
“만일 상국(上國)의 경계를 범해 명나라 황제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백성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을 청했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에게 친히 화와 복을 아뢰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려 한다”

우왕은 봉주에서 조전사 최유경에게 이 사실을 보고 받고 급히 개경으로 달려가 최영에게 이성계와 조민수를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6월 개경 근교에 이르러 진을 치고 우왕에게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종사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글을 올렸다.
이에 우왕은 ‘군신의 대의는 고금을 통한 의리’라며 이들을 책망하였다.
또한 개경 수비를 위해 급히 군사를 모아 개경 안팎의 골목 입구를 수레로 막는 한편, 조민수 들의 관작을 삭탈했다.


2. 창과 방패의 한판승부, 뚫리는 방패
 
이성계는 개경성의 숭인문 밖 산대암에 진을 친 뒤 지문하사 유만수를 숭인문, 좌군을 선의문으로 보내 성문을 뚫도록 했지만 최영의 방어에 막혔다.
조민수의 우군이 다시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개경성의 병력은 결국 이성계의 위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우왕과 최영은 궁성 내 화원 속에 있는 팔각전으로 몸을 피했다.
이성계와 그 군사들은 화원을 겹겹이 포위한 채 최영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최영이 나오지 않자 서너 명의 군사들이 곧장 들어가 최영을 사로잡았다.

3. 실권을 장악하는 이성계 일파, 공양왕을 내세우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귀양 보내고 우왕을 폐위한 뒤 중앙 정치의 실권을 쥐었다.
차기 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려 했으나, 세력이 약한 조민수가 문하시중 이색의 도움을 받아 우왕의 아홉 살 난 아들 창왕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성계와 그를 지지하는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등 개혁성이 강한 신진 관료들이 국정 전반의 혁신을 추진하면서 이에 반대하던 조민수는 유배되고 이색은 스스로 관직을 물러났다.
이에 조준과 정도전 등은 정몽주와 함께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명분 삼아 창왕1년 만에 폐위시키고 1389년에 공양왕을 옹립하기에 이른다.

4. 전제개혁을 단행하는 신진사대부, 몰락하는 권문세족
 
이성계의 실권 장악 이후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을 추진하게 되는데, 특히 조준이 전제(田制)개혁을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 개혁의 핵심은 사전(私田)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때 문제가 된 사전이란, 전시과에 의해 지급된 수조권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반납하지 않고 자손에게 세습한 토지를 말한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여러 사람에게 조세를 납부하게 되어 생활이 어려워졌고, 국가에서는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전제 개혁은 불법적인 사전을 없앰으로써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전제 개혁은 대대로 관인을 배출해 온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신진사대부는 개혁을 강행하여 새로운 토지제도로 과전법을 제정하였다(1391).
이로써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사전이 없어지고 국가의 공전이 확보되었다.
또한 신진 관료로서 수조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던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반면 권문세족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