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대한제국기에 문을 연 우리나라 1호 공원이다.
한 가운데 팔각정은 처음 이왕직 소속 군악대의 연주장소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노인들의 쉼터가 됐다.
고종의 근대화 상징…한국 1호 공원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3·1운동의 점화지로 상징화된 탑골공원은 대한민국 1호 공원이다. 1897년 영국인 해관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이 고종의 명을 받고 설계에 들어가 1902년 개원했다.
마침내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근대화 의지를 불태우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광무 원년에 서구식 개혁의 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탑동공원,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곳에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2호)이 있기 때문이다.
중종과 연산군 시대를 거치며 절은 멸실되고 이 탑만 탑비만 남았다.
멀리서 보면 흰 탑만 우뚝 솟아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홍대용 등 북학파 지식인들이 이 탑 주변에 모여 교유했다.
그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어쨌건 새 시대가 열렸다.
이곳은 대한제국 근대화의 상징이 됐다.
브라운이 거북이 모양의 타원형으로 디자인한 공원 한 가운데는 팔각정이 세워졌다.
그저 정자가 아니었다.
정부가 군악 교사로 초청한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지도를 받은 이왕직 소속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어진 것이다.
이내 연주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돼 바가지 형태의 지붕을 한 호자식 음악당도 이듬해 축조됐다.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군악대의 음악이 울려 퍼지던 이곳은 이 시기에는 일요일에만 개방되는 이왕직 소유의 공원이었다.
밤나들이 명소에서 룸펜 쉼터로 전락
대중에게 공개되며 명실상부한 공원이 된 건 일제강점기 들어서였다.
김해경 교수(건국대 녹지환경계획학과)가 쓴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공원 산책’에 따르면 1910년 이후 유리온실과 일본식 정자(사아옥), 다리가 있는 일본식 연못, 공중변소는 물론 전등과 수도를 비롯한 최신 시설과 설비를 차례로 갖추게 됐다.
공원 안에 끽다점과 식당도 생겨났다.
1913년부터는 야간 개장도 했다.
여름밤이면 산책 나온 경성 시민들이 낮의 더위를 식히며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소파 방정환이 ‘잔물’이라는 필명으로 1922년 ‘개벽’에 기고한 야간 개장 르포를 보자.
“그 무서운 해가 인제야 졌습니다 그려. (중략) 그러면 '자아 들어오시오'하고 녹음의 집 탑동공원의 둥근 전등은 반짝 켜진다. (중략) 삶는 듯한 더위에 괴로이 지내면서도 가깝게 땀 식힐 곳조차 가지지 못한 경성 시민에게 참말로 이 탑동공원은 좁으나마 얼마나 귀엽고 서늘한 중요로운 마당이랴.”
실로 작은 공원이다.
겨우 1만5000㎡ 면적인데 출입문은 동서남북 4개나 있다.
그 출입구를 중심으로 드나드는 계층이 달랐으니 흥미롭다.
방정환은 이 글에 따르면 전등이 없어 컴컴한 북서쪽 일본식 정자에는 노동자, 직공, 가난한 고학생들이 모여들어 쉬었다.
동문 쪽은 ‘양복장이와 분바른 매음녀’가 쏠렸다.
정문과 팔각정 사이로 뚫린 서편은 유리 온실과 연못 등이 위치하고 전등 불빛이 가장 밝아 아늑하고 꿈나라 같은 곳이었다.
덕분에 꽤 야심한 시간에도 ‘내외처럼 보이는 남녀’가 손 맞잡고 들어가는 곳이 정문이었다.
젊은 중학생, 전문학생, 신사, 갓쓴이, 양복장이, 가지가지 사람들이 찾는 탑동공원은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김해경 교수는
“대공황과 만주전쟁을 치르며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거주지역인 남촌(청계천을 경계로 한 서울의 남쪽)에서 가까운 효창공원과 장충단공원 등은 전등 등 시설 보수를 지속했다. 반면에 조선인이 사는 북촌의 탑골공원은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하여 “갈 곳 없는 룸펜, 실직자 등이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됐다”
는 것이다.
해방 후 슬럼가→아케이드→노인공원
해방 후에도 탑골공원의 남루한 행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 판자촌과 빈민가옥이 형성됐다.
인근엔 ‘종삼’이라 불렸던 사창가도 있었다.
박정희 시대가 시작되며 풍광이 달라졌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의 도시 개발 바람은 이곳도 비켜가지 않았다.
1967년 공원 주변의 불량주택이 철거됐다.
공원 바깥으로 2층짜리 아케이드가 생겼다.
우아했던 철제 정문은 일제 잔재라 없애고 지금과 같은 전통적 이미지의 맞배지붕 문으로 교체했다.
그러곤 공원을 유료화했다.
룸펜도, 노인도 더는 어슬렁거리기 힘든 공간이 됐다.
운명은 다시 바뀐다.
1983년 무료 사용 계약이 종료되며 아케이드가 철거됐고 보수공사를 거쳐 1988년부터 무료개방이 된 것이다.
1992년엔 이름도 파고다공원에서 옛 지명을 딴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노인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1981년 노인복지법이 제정되고 이즈음 65세 이상 노인에게 경로우대증 발급되며 대중교통 무임승차가 가능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 분석했다.
1990년대 들어 탑골공원의 노인지대화는 가속화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명예퇴직자들까지 가세했다.
근처 종묘공원이 더 판이 큰 노인 왕국이었지만 종묘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걸 계기로 풍선효과처럼 노인들이 탑골공원으로 더욱 몰려들며 지금의 ‘노인 공원’ 이미지가 완전 구축됐다.
서울시는 2000년 탑골공원을 독립운동 성역으로 세우고자 1년간 정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곳은 무료 급식을 쫒아, 파격적이리만치 저렴한 인근 식당과 이발소를 찾아, 외로움을 삭혀줄 말동무를 찾아 탑골공원으로 출근하는 남자 어르신들의 세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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