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드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희도 흴사 오얏꽃이
향기 쫓는 벌떼들은 떼를 지어 따라가고
보기 좋은 범나비는 너픈 너픈 날아든다
판소리의 아버지 신재효가 제자이자 정인인 진채선을 그리며 지은 '도리화가(桃李花歌)'의 첫부분이죠.
한국의 세익스피어 신재효와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의 복숭아꽃보다 더 붉고 오얏꽃보다 더 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한토막 소개합니다.
1.만남
1812년 전라도 고창에서 중인의 신분으로 태어나 당시 천대받고 멸시받던 광대들을 위해 4천 여평의 부지에 소리학교를 운영하며 우리말로 판소리를 정리하는데 일생을 바친 '판소리의 아버지' 동리 신재효.
1847년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무당이었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소리를 익혔던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 진채선.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열일곱 살(?) 때 마음껏 소리를 공부해 보고 싶은 욕심에 그가 운영하던 동리정사로 찾아오면서 부터죠.
남녀는 유별해도 소리는 공평해야 하고, 아녀자라고 하늘이 내린 재주에 차별을 두는 건 온당치 않다는 신념의 동리.
이미 그가 가르친 여류 기생만 80여 명에 이르렀던 그는 그녀의 재능을 첫눈에 알아보고 바로 제자로 받아 들이죠.
이후 그의 열성적인 지도와 천성산 폭포 아래서 여러 차례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끝에 드디어 득음을 한 그녀는 얼음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순풍에 돛단배 노는 소리, 만길 산봉우리로 치솟는 소리, 폭포수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소리 등을 두루 갖춘 조선 최고의 여류 명창으로 성장하게 되죠.
2.사랑
송도삼절 서경덕과 황진이의 애틋한 동지적 사랑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존경이 변해 사랑이 될 수도 있는 것.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그녀는 어느새 그를 '남자'로 좋아하게 되죠.
당시 세 번이나 쓰라린 상처를 하여 외로운 기러기의 처지에 있던 그도 그녀의 사랑에 위로를 받게 되고 결국 두사람은 '사제지간'에서 '정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죠.
존경하는 스승 밑에서 최고의 소리를 얻고자 했고, 소리의 끝을 알고자 했던 그녀는 결국 스승에게서 '소리'뿐만 아니라 '사랑'까지 배우게 된 것이죠.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남자만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시대적 편견을 깨트리고 자신만의 고유한 소리를 만든 선각자 진채선.
결국 그녀는 '소리'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진정한 선각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죠.
3.이별
만남의 기쁨보다 이별의 슬픔이 더 많은 것은 불변의 사랑법칙, 그들도 결국 짧은 만남 끝에 긴 이별을 하게 되죠.
고종 4년 경복궁이 세워지자 경회루에서 8도 명창을 초청하여 축하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때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녀가 더 큰 무대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낙성연에 보내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큰 실수가 되죠.
바로 그 자리에서 남장을 하고 성조가와 방아타령을 불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녀가 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대령기생(待令妓生)이 되고 만 것이죠.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흥선대원군.
당대 최고 권력자인 그도 갸름한 얼굴과 나긋나긋한 몸매에 춤 솜씨 또한 일품이며 성량이 풍부하여 가창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난 그녀를 보는 순간 첫눈에 빠져들게 된 것이죠.
4.그리움
강호 위의 호걸들이 왕래하며 하는 말이
선낭의 고운 얼굴 노래 또한 명창이라
듣던 바에 으뜸이니 못들으면 한이 되리
그중에 기묘한 일 쌓인 병이 절로 낫네
이 말을 듣고 일어 앉아 어서 바삐 보고지고
주야로 응망하니 하루날이 삼추로다.
이후 그는 그녀 때문에 대원군이 하사한 높은 벼슬을 받지만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닌 것,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리던 그는 끝내 몸져눕게 되죠.
이때 그는 '도리화가'를 지어 간절한 심정을 토로하는데 이 노래는 결국 구중궁궐에 갇혀있던 그녀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죠.
이에 그녀는 답가로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을 지어 대원군을 모시는 몸으로 그리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표현하는데..
잠들어 꿈속에나 그리운 님 볼 수 있나
그러나 잠들려 해도 잠못 드는 이 내 신세
바람에 지는 낙엽, 풀 속에 우는 벌레
무심히 들으면 관계할 일 없건마는
구곡에 맺힌 설음 어찌하며 풀어낼꼬
평생 동리만을 사랑하고, 동리만을 그리고, 동리만을 바라본 진채선.
역사 속에는 그녀가 대원군의 여인으로만 나와있으나 결국 그녀는 동리의 여인으로 봐야겠죠.
5.마지막 재회
"언젠가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소리의 한계는 없다고. 소리는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고. 그 말씀이 지금의 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소리가 그러하듯 사랑도 끝이 없는 것, 선생님을 향한 제 마음은 영원히 끝이 없습니다. 제가 그립거든 부디 눈물을 거두시고 북녘 하늘을 올려다봐 주세요. 하늘에서라도 저를 볼 수 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봐 주세요. 그리하시면 저도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
소설 '진채선(이정규 작)'에서 그녀의 마지막 편지인데, 결국 그녀는 운현궁을 탈출해(?) 동리정사로 향하고 그의 임종 무렵 마지막 재회를 하게 되죠.
이후 그녀가 떠난 나루터에 ‘아소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녀를 기다리던 대원군은 민비와의 갈등으로 실각하여 야인이 되고, 동리는 병사하고,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영원히 행방을 감추었다고 하네요.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작가로 종래 계통없이 불러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등 6마당으로 체계를 이루고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한 '판소리의 아버지' 동리 신재효.
미려하면서도 웅장한 성음과 춤 등 다양한 기량으로 남자 명창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조선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
못 다 이룬 그들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지금까지 아름다운 노래로 전해지고 있는데..
류승룡, 수지 주연으로 곧 영화화된다고 하니 관심있는 회원님들은 꼭 한번 보시길..
ㅡ 서정욱변호사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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