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19일 만 아흔의 할머니 한 분이 세상과 이별했다. 이름은 허은.
그 연배의 한국인들 가운데 삶이 평탄한 사람이 어디 그리 흔했을까마는 허은 할머니의 인생도 구절양장 아흔아홉굽이였다.
어려서 시집온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다.
남정네들은 식구들 건사는 커녕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나라 찾겠다고 발이 부르트기에 일쑤였던 바 그 많은 식구들 먹여 살리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은 거진 여자들의 몫이었다.
해방 되기 전이나 후나 고생은 비슷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는 속설은 부끄럽게도 진실에 가까웠다.
허은 할머니도 이런 사무치는 회고를 남긴다.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 미국 등에서 외국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렸으니 훌륭하게 성공할 수 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운 산 교육이었다. 목숨을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허은 할머니가 보고 배웠던 어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다름아닌 석주 이상룡이었을 것이다.
허은 할머니는 이상룡의 손주 며느리였다.
온 가족과 일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른바 ‘독립운동 3대 명문가’로 일컫는 집안이 있다.
의병장 왕산 허위의 가문, 경주 이씨 이회영 가문, 그리고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가문이다.
이상룡 가문은 아득한 옛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찬탈당할 때 그 꼴을 보기를 거부한 이증이라는 사람이 안동에 터를 잡으면서 누대를 이어온 지방 명문가였다.
안동역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낙동강변에 임청각이라는 아흔아홉 칸 옛 양반 가옥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석주 이상룡의 생가였다.
이 아흔아홉 칸 가옥은 그 위세를 적잖이 잃어버리고 있는데 중앙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임청각 행랑채 태반을 헐고 철로를 놓은 탓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것이 일제의 복수라고 수군거렸다.
한 집안이 몽땅 독립운동에 뛰어든 집안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석주 이상룡은 경술국치 때 이미 쉰 넷의 유학자였다.
당시에는 손자를 볼 연배였고 환갑상 앞에서 그 재롱을 보며 일가친척의 절을 받고 ‘이제는 살날이 멀지 않았구나’ 하며 수염을 쓰다듬을 나이였다.
하지만 일찍이 의병에 가담했으며 경술국치를 앞두고는 ‘역적들의 목을 치라’고 상소를 올린 이 꼬장꼬장한 선비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올려놨다가 국권을 찾은 뒤에 읽어도 된다.”
평생 유학 서적을 파 온 유학자의 일갈이었다.
당시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에는 국권 상실을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는데 이 순절(?)들 앞에서도 이상룡은 냉담했다.
“우리가 죽으면 쾌재를 부르는 것은 일본이다. 따라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해 고향을 떠나기 전 그는 유학자로서, 또 당시의 안동 분위기에서 까무러칠 만한 일을 벌인다.
지금도 우리가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하느냐” 하는 관용 어구를 쓰는 것처럼 양반 가문에서는 목숨과도 같았던 신주들을 땅을 파고 묻어 버린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치면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나라가 없는데 신주가 무슨 소용인가.”
을사조약이 있은 해 1만 5천금을 투자하여 가야산에 항일 기지를 만들기도 했던 이상룡은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고 ‘경학사’, 즉 밭 갈며 배우는 이주민 자치단체를 조직한다.
그와 그 동지들의 노고를 통해 끝도 없이 가을바람에 출렁이던 억새밭은 누런 벼들이 고개를 숙이는 논으로 변해 갔다.
만주에서 논농사를 짓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상룡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을 묶어 세웠고, 또 중국옷을 일상적으로 입는 등 현지인과의 조화에도 앞장서면서 항일 투쟁에 나선다.
국경을 넘을 때 그의 詩를 읽어 보자.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朔風利)於劍
나의 살을 에는데 漂漂削我肌
살은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肌削猶堪忍
창자는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腸割寧不悲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旣奪我田宅
또 다시 내 처자를 넘겨다보니 復謨我妻努
차라리 이 머리는 잘릴지언정 此頭寧可斫
내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此膝不可奴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선비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 등 분분한 방안들 가운데에서 이상룡이 견지했던 것은 독립전쟁론이었다.
일단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 다음에는 무력항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도대체 그게 무슨 ‘정부’냐며 탐탁치 않게 여기며 각개전투를 벌이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설득하여 연대를 이룬 것도 이상룡이었고 제멋대로 놀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하고 그 뒤를 이은 박은식도 힘을 쓰지 못하자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동분서주한 것도 이상룡이었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씨는 “워낙 성품이 관후해서 서로군정서 독판 때 나이 어린 병사들에게도 꼭 공대를 하고 동지라 불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상룡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결심만큼은 칼날 같았다. 항일 자금이 모자라자 임청각을 팔겠다며 아들을 국내에 들여보내자 문중에서‘그것만은 안 된다’며 돈을 걷어 주었던 것은 일화 축에도 들지 않는다.
손자가 청년단체의 장으로 추대됐을 때 손자가 자신은 2대 독자이니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사양하자 “나라도 없는 놈이 무슨 가족을 챙긴다고!”라고 호령하던 위인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놈들이 왔다’며 박해하기 시작했다.
손주며느리 허은의 회고에는 이상룡의 집이 마적들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등장한다.
“추위를 막고자 토담집 벽에다 흙을 한 벌 더 바르고 있는데 마적단 수백 명이 다시 마을을 덮쳤다. 그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조금 남아 있는 쌀마저 다 빼앗고는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마침 사다리 위에서 흙을 바르던 남편을 끌어내려서는 목을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다. 마적단 두목인 듯한 자가 “너희 조선 놈들이 왜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뺏기게 하였느냐? 우리도 너희를 죽이겠다”
고 했다.
그때는 수중에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대들보에 목이 매달린 남편은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때 마침 당숙 광민씨와 길림 중국학교 동창생으로 이웃에 살고 있었던 금테 두른 군인이 뛰어 와서
“이 집 사람들은 살려 주라”
고 말렸다.
그래도 그놈들은 막무가내로
“조선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
고 윽박질렀다.
변명할 틈도 주지 않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때, 뒤에서 다른 한 금테 두른 이가 쫓아 나와서 말렸다.
“이 집은 그렇게 하지 말라. 조선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이니 우리가 해칠 수는 없다”
고 했다.
그제야 마적 떼는 슬그머니 남편을 풀어줘서 위기를 모면했다.
나라를 빼앗긴지는 이미 수십년.
그나마 삶을 영위하며 후일을 도모하던 만주의 중국인들까지 조선인들을 적대하고 나섰을 때 만주 각지의 조선인들의 심경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일제는 이런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있었다.
만주의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죽였다는 오보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의 중국인 수백 명이 며칠 만에 학살당했던 만보산 사건은 그 한 예였고 신흥무관학교장 여준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이 마적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은 또 다른 단면이었다.
호랑이와 싸우다가 멧돼지에 옆구리를 들이받힌 격이 돼 버린 상황에서 노구의 이상룡은 급격히 기력을 잃어간다.
임종 직전 대구에서 동생이 찾아왔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은 형 앞에서 동생은 통곡한다.
“형님,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고생하시다니…”
한국 사람이라면 이 말에 따라붙는 관용구를 떠올릴 것이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더하여 동생은 이렇게 울부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독립운동도 사람 살자고 하는 짓이지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다 때려치우고 돌아갑시다.”
그게 범연한 사람들의 마음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상룡은 죽음 앞에서도 고향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인생은 다할 때가 있거늘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만주 땅에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장부가 나라를 찾겠다고 출가해서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혼령에 사죄하겠느냐? 나는 만주 땅에 씨나 떨어뜨리고 갈 테니,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이나 들어가게 하겠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 공명의 임종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갈량에게 촉의 신하들은
“누구에게 당신 일을 맡기실 겁니까”
를 묻는다.
“내 뒤는 장완, 그 다음은 비위가 잇도록......”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그 다음을 묻지만 이미 제갈량은 세상을 뜬 뒤였다.
바로 그처럼 임시정부 대표 이진산이 이상룡에게 물었다.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십니까? 통화현, 환인현, 영길현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강건하셔서 독립사업 성공하는 걸 보실 줄 믿었습니다. 나라 일이 암담하니 한 말씀 주십시오”
그러자 천하 통일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뼈에 사무치게 토로했던 제갈량처럼 이상룡 역시 격정적이지만 서글픈 유언을 남긴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 되게 여러 동지들의 추천으로 중책을 맡아 조그마한 공로도 없이 죽을 병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원컨대 여러 동지들은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 늙은이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게나.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 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어떤 목적이라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1932년 6월 15일 임시정부 3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은 숨을 거두었다.
인근의 조선 사람들이 모여든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유해를 조선에 옮기기로 했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 사람들이라면 이를 갈던 마적들이 또 길을 가로막았다.
모든 물건을 탈탈 털어버린 마적들이 이상룡의 관까지 뜯어내려 하자 손주며느리 허은은 시집올 때부터 간직했던 저고리와 치마까지 건네야 했다.
마적들은 그 옷감을 갈갈이 찢어 총에 매달고서 날뛰었다니 그 공포와 암담함이 오죽했으랴.
마적들은 조선인들에게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했고 이상룡의 유해는 만주에 묻혔다.
본의 아니게 그의 유언이 지켜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룡의 유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어른의 영이 있긴 한 모양이다.”
독립이 되면 자신을 고향 땅에 데려가라는 이상룡의 유언도 지켜졌다.
그러나 너무 뒤늦게 지켜졌다.
1990년 9월 2일 일단의 한국 공무원들과 유족들이 중국 흑룡강성 아성시에서 이상룡의 유해를 모시고 들어왔던 것이다.
해방된 뒤 45년이 지나도록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의 집안에 독립운동 훈포장을 받은 이가 아홉 명이 넘고 더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일제와 싸웠지만 그 후과는 참담했다.
외아들 준형은 만주에서의 고단한 삶을 정리하고 국내로 들어왔지만 일제의 계속되는 회유에 시달리다가
“일제하에 사는 것은 수치일 뿐이다”
라며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 손자는 끝까지 만주에서 투쟁하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 병사했다.
해방된 조국의 군경의 총에 죽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증손자는 고아원에 맡겨지기까지 하는 등 곤궁한 삶을 보내야 했다.
이상룡의 유해는 돌아왔지만 그 국적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의 호적은 일제의 호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어서, 단재 신채호나 이상룡 등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많은 이들이 그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잡힌 것은 2009년이다.
이상룡이 고향을 떠난 근 1백 년 만에 이상룡은 후손들의 나라의 국적을 회복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글픈 얘기가 있다.
국적 회복 관련 법률은 제정됐지만 그 뒤처리는 개인에게 떠맡겨졌기에 이후 변호사 비용 등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것은 이상룡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다.
임청각에는 이상룡의 詩 한 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
"好住鄕園休悵惘 昇平他日復歸留.”
그는 돌아왔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그가 돌아오던 날의 한 풍경이다
1990년 4월 13일 김포공항에서는 때 아닌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5위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독립운동단체 통의부 간부였던 박위승 옹 (당시 91세)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김포공항에 나와 독립운동가들의 때늦은 귀환을 맞았다.
대형 태극기로 석주 이상룡의 영정을 감싸던 박옹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80년만에 돌아오는 석주 선생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그러면서 만세를 선창하자 공항에 나와 있던 관계자들은 물론 대합실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하늘 저편에서 석주도 웃었으리라.
“그래 나 돌아왔도다.”
♣ 去國吟(거국음:나라를 떠나며) ♣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山河寶藏三千里
冠帶儒風五百秋
何物文明媒老敵
無端魂夢擲全?
已看大地張羅網
焉有英男愛??
好佳鄕園休??
昇平他日復歸留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
5백년 동안 예와 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늙은 적을 불렀나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만하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이미 내 집과 토지 다 빼앗고/ 내 처자도 넘보는데/ 이 머리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 국경을 넘으며 지은 석주 이상룡(1858 ~ 1932)의 거국시(去國詩)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정초, 망명의 길 도중 압록강을 건널 때에 비통한 감회를 읊은 시.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 "내 아내와 자식들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비분한 심경을 이처럼 토로했습니다.
'Jewang Muaythai GYM > 제왕회관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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