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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명성황후

by Ajan Master_Choi 2020. 7. 9.

 

 

 

 

 

 

 

 

 

 

조선 왕비 중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황후가 된 명성황후!

그러나 살아생전에는 황후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죽고나서 (을미사변 1895)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조선을 황제국으로 칭하는 대한제국(1897)으로 재건국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이러니한게 우리나라가 가장 힘이 없어, 외세에 의해 바람 앞에 등불일 때 우리 민족의 숙원이었던 황제국을 칭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비라고 불리우다가 죽은 뒤에야 명성황후로 호칭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근에 와서야 부르게 되었고 우리 학창 시절에도 민비로 불리어졌습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 못지않게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흥선대원군을 높이려면 명성황후를 심하게 까야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이라는 소설입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민비로 불리며 나라를 말아먹은 대표적인 여자로 상징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KBS에서 방영한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한 풍운이라는 역사 대하드라마에서도 대원군 역할을 한 이순재가 가장 많이 썼던 말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 잘못들인 며느리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는구나"라고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민비라는 명칭과 그녀의 행적은 일제강압기에 일본에 의해 왜곡된 일제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도 뽑히면서 요즈음은 명성황후라는 제목의 뮤지컬, 드라마, 영화, 노래로 까지 각광받고 있고 새롭게 긍정적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는 조선의 국모다!"
이미연의 한맺힘 외침과 열연, 일본 자객 역을 한 허준호의 냉혹함 그리고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 텐데 내가 이 세상..."
조수미의 애절한 노래와 가사로 우리에게 각인된 뮤직비디오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명성황후를 재조명시켰습니다.

비극의 여인 명성황후!

나라를 사랑한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여인으로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일본 놈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조선의 국모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뮤지컬에 나온 것처럼 진심으로 조선과 백성을 사랑했을까요?
역사적 사실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명성황후는 조선의 왕비로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여인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슬퍼하며 그리워해야 할 인물은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써 나가는 글을 읽다 보면 명성황후가 우리 민족과 조선에 긍정적인 일보다는 부정적인 일을 훨씬 더 많이 행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행위들에 크게 분노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분노시킬 명성황후 행위가 그녀 개인 잘못만은 아닙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조정 관료 그리고 조선 사대부들과 구한말이라는 격동의 시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의 나라에 대한 잘못된 행위들은 한미한 가문 출신의 조선의 왕비로서 당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와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능력한 남편이자 왕인 고종 대신에 괴팍하고 끝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명성황후가 의도했던 안 했던 그녀의 잘못된 행위들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많이 주게 됩니다.

조선에게 구한말은 엄청난 혼란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일본은 조선보다 20년 앞서 개항을 했고 20년 만에 근대산업 국가로 발돋움 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도 영국과 아편전쟁으로 처참하게 깨지고 나서 서양 과학 문물의 우수성을 깨닫고 양무운동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도층들은 대외 정세에 너무 무지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오로지 조선의 빗장만 걸어놓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로 끝까지 버텼습니다.

명성황후가 정권을 차지하고 나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개항을 합니다.

그리고 수도 없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기어코 경술국치로 나라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조선이 세계 추세를 못 따라가고 이와 같은 상황까지 빠지게 된 책임은 당시 집권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게 있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책임은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입니다.

그중 노론세력입니다.(세도정치도 노론세력 중 일부가 변질된 것임)

그들은 조선 오백 년 내내 기득권층으로 모든 혜택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흡혈귀처럼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자기들 배만 채워 갑니다.

 

또 그들은 그때까지도 유교 성리학 질서에만 빠져 있었고 중화 사대주의 세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을 소중화로 여기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와 자기 가문 배만 채워가며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너무 살기 좋고 안락한 자기들만의 나라인 조선에서 영원히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조선을 바꾸고 변혁시키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조선을 망하게 하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말지만 그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로 살아 남아 조선 때와 마찬가지로 호의호식을 누립니다.

명성황후의 잘못된 점 대부분도 이런 조선 사대부들 무책임한 권력 놀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 망국의 가장 큰 원인은 조선 사대부 양반 세력 그중에서 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한말 혼란의 시기에 조선 왕은 고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시기의 주역은 아닙니다.

초기 십 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주인공이었고, 그 이후는 오랫동안 민비로 불리어왔던 명성황후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왕비를 간택합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눈에 쏙 든 여인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여주 출신 민자영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그동안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들의 세도정치에 치를 떨었기 때문에 외척의 발호를 없애려면 왕비 집안은 최대한 한미 하고 외척 수도 적어야 했습니다.

여흥 민 씨인 자영의 집안은 조선 땅에서 알아주는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일찍 죽어 그녀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혈혈단신 외톨이였습니다.

가문의 세력이 대원군이 바라는 만큼 거의 없다 할 정도로 미약했습니다.

대원군이 생각하기에 이런 여자가 왕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더 이상 외척의 발호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흔쾌히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이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국모가 된 명성황후에게 민 씨 세력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종이 장성하자 명성황후는 고종을 조종하여 나랏일에 깊숙이 관여하며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대원군의 위세는 어떻게 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대원군 집권 초기부터 시작한 서원철폐는 1871년에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철폐를 완결 짓습니다.

이에 성리학에 찌들 대로 찌든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 납니다.
특히 골수 성리학자였고 위정척사의 대표주자인 최익현의 반발이 가장 거셌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 상소가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빌미가 되고 맙니다.

대원군의 가장 큰 개혁이 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그만큼 서원철폐의 개혁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조선은 유교 사대부의 나라였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 사대부들은 흥선대원군이 기세 등등할 때는 조용히 죽어지내다 대원군 힘이 빠졌다 싶을 때 들고 일어섰습니다.
최익현이 그 일에 앞장섰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이 '대외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할 때 까지는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뼛속까지 성리학 중화주의에 젖어 있었습니다.

최익현에게 중국 유학자들을 모시는 서원철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최익현의 정신세계 속은 오로지 중화사상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모든 세계는 배척해야 할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최익현이 일본 및 외세에 절대 굽히지 않았고, 일본에 까지 끌려가서 대마도에서 죽을 때까지 조선 유학자의 자존심을 지킨 위정척사의 의기는 높이 살만합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중국도 외세라는 생각을 끝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최익현을 대원군에 대항하는 상소를 처음으로 올리게 만든 것이 명성황후라는 설이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스무 살이 되자 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을 해야 한다면서 고종을 자꾸 꼬드겼습니다.

하지만 심약한 고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아버지를 내 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명성황후가 직접 나섭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단행한 것에 불만이 많고 반발하던 유학자 중 가장 강경하고 강직한 최익현에게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쓰게 합니다.

최익현의 상소를 시작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난 상소가 봇물처럼 터지며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는 세력이 힘을 얻습니다.

이 당시는 흥선대원군을 발탁하고 효명세자의 못다 한 개혁을 같이 이루어 낸 조대비도 대원군과 등을 돌리고 대원군의 정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최익현의 상소를 시작으로 비로소 대원군에 대항하는 연합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민 씨 세력, 최익현을 비롯한 사대부 성리학자들, 조대비의 조 씨 세력 등 이 연합군의 대표 명성황후는 고종을 꼬드겨 기어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당시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은 섭정 공으로서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그 어떤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종이 대원군을 내 칠 명분도 없었습니다.

고종이 고육 직책으로 내놓은 것이 흥선대원군의 궁실 전용 출입문인 금호문(金虎門)을 막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문 하나 막아 버린 것으로 십 년간 조선 팔도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시대는 허무하게 막이 내리고 맙니다.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선의 권력세계였습니다.
어쩟든 권불십년이란 말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드디어 명성황후 시대가 열렸습니다.

명성황후가 권력을 쟁취하자 명성황후 주위로 민 씨 세력들이 구름처럼 몰려 옵니다.

명성황후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민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에 민씨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 중국은 개항을 하고 근대산업국가로 나가고 있는데 조선은 다시 세도정권 시대로 뒷걸음질이나 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조선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더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히는 일들이 조선에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은?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부터 일본 자객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을미사변 1905년까지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를 실제 모습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천연두 자국까지 남아있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왕비들의 초상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마 왕비들의 실제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는 것을 아주 꺼렸던 것 같습니다.
신정왕후(조대비) 초상화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명성황후가 생존해 있을 당시는 사진기가 발명되어 조선에서도 한창 사용되어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고종이나 순조의 실제 사진은 상당히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명성황후로 추측되는 사진은 있지만 확실히 명성황후라고 확인된 사진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명성황후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을미사변 때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찾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일본 자객들은 한 번도 명성황후를 본 적이 없었고 사진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명성황후가 얼굴 콤플렉스 즉, 곰보에 추녀였기에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생전에 아예 사진을 찍은 적이 없거나, 있었다 해도 몇 장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기도 합니다. 

명성황후와 같이 궁궐생활을 했던 분으로부터 들었다는 분이 남긴 말입니다

"연세 여든이 넘은 집안 고모들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어 나서기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마마 자국 같은 게 얼굴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고모님들도 어릴 때 집안 어른들께 전해 들은 이야기니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요"

명성황후가 약간 희미한 천연두 자국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심한 곰보에 추녀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무리 괴팍하다 해도 그래도 조선의 국모인 왕비를 그런 인물로 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명성황후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외모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실린 글이 전부입니다.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이었던 신동식 위원은 칼럼 '취재와 함께 놓쳐버린 이야기들'에서 명성황후의 외모를 짐작할 만한 짧은 글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조 23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 외증손녀 윤백영 할머니는 60년대 초 궁중 관련 문화재 고증, 보전 활동에 소리 없이 공헌한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총기가 대단하고, 눈이 밝아 문화재 관련 취재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윤 씨는 덕온공주가 직접 입었던 당의를 보관해 오다가 복식학자 석주선 교수에게 기증했고, 단국대에 석주선 박물관이 개관되며 이곳에 소장케 한 분이다. 이분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명성황후를 뵌 어른들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뚝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집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황후를 만난 또 다른 인물로는 영국 고위 성직자의 딸이었던 비숍 여사가 있는데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까지 4차례 조선을 답사했습니다.

그녀는 조선 방문 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가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의 스 호턴 언더우드 역시 저서 "상투 튼 사람들 사이에서의 15년"에서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라고 명성황후를 묘사했다.

이렇듯 간간이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측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고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명성황후를 직접 봤던 여러 사람들이 명성황후 외모에 대해서 '아름다웠다'라는 표현보다는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뚝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란 식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해놓은 글을 보아 명성황후가 추녀가 아니고 지적인 모습의 조금은 싸늘한 표정의 여성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잡지 '삼천리'는 1933년 9월 호에 "민비의 낯을 보았다는 이가 없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당시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목숨을 건 정치싸움 때문에 암살을 우려해 노출을 기피한 것이 아닌가도 여겨집니다.

사실 명성황후의 사진 찾기 노력은 100여 년 전, 고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학자 문일평이 1920년대에 쓴 '사외 이문(史外異聞)'에는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궁중에서 사진 촬영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진짜 명성황후의 사진은 어디에 있을까?
명성황후는 사진으로 된 초상을 남기지 않았던 것일까?
또는 명성황후가 남긴 사진은 모두 유실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말살된 것일까?

지금까지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것들은 많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명성황후의 생전 성격과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사진과 초상화가 있을 리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1994년 작가 이수광 씨가 교과서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이 허구라는 지적을 하며 불붙은 명성황후의 어진(御眞, 실제 얼굴) 찾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내 개인적 생각은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후 시신과 함께 사진을 전부 불태웠다는 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분명코 어딘가에 명성황후의 사진은 존재하리라 봅니다.

첫 번째 사진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인의 사진첩에 있는 사진.

이 사진의 설명에는 `Die Ermodete Ko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시해된 왕비'라는 뜻.
명성황후의 인상이 표현된 기록과 이 사진이 가장 일치한다고 봄.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명성황후 실제 사진 임.

지금까지 알아왔던 명성황후의 인자하고 유순한 외모와는 사뭇 다르게 날카로움이나 차가움과 카리스마가 느껴짐

두 번째 사진

전 러시아 영사였던 아나톨리 샤프 킨 부인으로부터 입수한 사진으로 이 명성황후 사진에 대한 진위를 놓고 한때 학자들 간에 논쟁이 심화됐던 첫 사진임.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역사교과서에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나오기도 했으나 지금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녀로 판단하고 있음.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 사진을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음.

세 번째 사진

다보성갤러리가 광복 72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에서 명성황후라고 공개한 초상화 임.
이 초상화에 나타난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착용한 고급스러운 신발과 옷, 족자 뒷면에 '민비 살해범'이라고 적혀있는 명성황후 살해범 미우라의 글씨 작품과 함께 발견된 점 등을 들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주장.

네 번째 사진

한상 문화연구단(단장 임채환)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 자 별지 8쪽에 실린 명성황후 세밀화를 동아일보에 공개했는데, 이 세밀화는 가로 5cm, 세로 8cm 크기로 밑에는 '시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적혀 있음.

세밀화 속 명성황후는 중국식 복장과 머리 장식을 하고 외모가 다소 서구적임.

다섯 번째 사진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명성황후 초상으로 얼굴이 일 그러 들어 변조의 흔적을 남기고 있음.

마지막 사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초상.

얼굴은 검고 마마자국이 가득함.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어떤 사진이 가장 명성황후답게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