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에게서 우편이 오면 밀러는 두서없이 형식적으로 반응을 했다.
그대로 답장은 썼다.
드디어 새 작품이 나왔다.
매카시와 그의 정화위원들의 행위를 적절하게 묘사한 희곡 ‘마녀 사냥(The Crucible):세일럼의 마녀들이라고도 한다)을 완성한 후 ’다리 위에서 바라보다(A view from the bridge)'를 완성하였다.
이 두 작품 모두 주제가 갖는 매력을 빼고 나면 삼각관계로 축약이 된다.
밀러가 ‘마녀 사냥’에서 공산주의자 사냥꾼들이 판치던 그 시대, 청문과 진술이 이어지고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던 그 시대를 비유로 들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형제와 같은 엘리아 카잔이 조사위원회의 요구를 쫓아 명망있던 동료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밀러는 직접 겪었다.
밀러는 검열과 사전검열, 그리고 내면을 향해 망명하는 것으로 대개 끝나게 마련인 작가들의 자체검열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밀러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역사적 함의를 폭넓게 감싸는 또 하나의 현실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마녀 사냥’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작품이 삶에 대해 가진 근접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삶과 그 뒤에 있는 삶 모두를 피해갈 수 없게 하였다.
‘마녀 사냥’은 밀러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마녀 사냥’은 장소와 시간이 바뀔 때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의미들을 담아내었다.
당시 브로드웨이는 재미를 찾는 관객의 욕구를 공격하며 갈수록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밀러에 회의하고 있었고 브로드웨이 초연 후 ‘마녀 사냥’은 역사가 짧은 다른 기획사로 넘어가서 문화 중심지를 떠나 변두리에서의 공연으로 계속됐다.
밀러의 마비 상태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밀러는 마릴린을 향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고 털어놓은 후였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처녀가 더 이상 그렇게 지내지 않기로 한 순간, 밀러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애인이 또 다른 미국의 애인과 오가고 있었다.
이 놀라운 소식이 온통 신문 일면을 장식한다.
그들의 행복은 2년간 거듭 뉴스거리였다.
당시 밀러는 고립상태를 떨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막극 하나를 찾던 연출가에게 극을 하나 써주었다.
이제 마릴린은 디마지오의 정식부인이 될 상황이었다.
신경이 어수선하던 밀러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다’ 공연 준비를 하다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실수였다.
마릴린은 내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경탄과 결혼생활에 대한 절망이 뒤범벅되어 난 배우 선정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마릴린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밀러는 저 높은 곳으로 떠올라가기도 하고, 그의 삶이 아닌 새로운 인생으로 미끄러져 내린다는 두려움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제 마릴린은 디마지오 여사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그리워하던 아서 밀러가 1951년 초 헐리웃을 떠난 후,
마릴린은 여전히 폭스사 전속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다른 제작사에 임시 고용되기도 하면서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맡은 역할은 그때까지도 너무나 하잖은 스테레오 타입일 뿐이었다.
하지만 팬들의 편지는 매주 3천 장 정도가 왔고, 기자회견도 잇달아 열렸다.
과거에 대해 질문이 던져지자 마릴린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답변한다.
차라리 잊고 싶은 기억 때문이다.
아서 밀러에 대한 기억을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미루어진 아이로서 어딘가에 남기 위해 애썼던 기억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마릴린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고 어머니도 얼마 가지 않아 아이 곁을 떠났다.
병이 들고 정신이 혼란하여 아기를 돌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요양원과 병원을 전전하였고,노마 진은 5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마릴린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며 잊으려 애썼고 새로운 傳記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꾸민 이야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에 마릴린은 스스로 발목을 잡힌다.
공식 여론통에서 마릴린은 고아로 남는다.
동정이나 공감 같은 것이 결코 사랑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마릴린은 전혀 몰랐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마릴린은 실제로 그녀가 살았던 고아원 하나에다 대여섯 개도 넘는 고아원을 덧붙여 이야기를 꾸며냈다.
성공하고 싶은 열망에 비례해서 출연 공포증도 커져만 갔다.
출연하기 전 토하는 일이 잦아졌다.
언론은 계속해서 마릴린을 사랑하고 칭찬했다.
라나 터너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매력에 조안 크로퍼드가 가진 지능과 사회적 영향력, 부활한 진 할로우 한국에 파견된 미군 병사들이 옷장 속에 붙인 사진들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것도 마릴린이었다.
로버트 칸이라는 언론인은 마릴린이 정말 독서를 하는 것 같다면서 놀라워하고 소문을 내기까지 했다.
마릴린의 집에서 휘트먼과 릴케와 밀러와 톨스토이와 샌드버그의 책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칸의 동료에 따르면, 마릴린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촬영소에 지각이 잦아지기만 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마릴린의 공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릴린은 촬영소로 올 때면 지옥에 오는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늘 지각을 하고 대사도 자주 잊어버렸다.
작업 속도가 늦어진 것은 항상 마릴린 때문이었다.
촬영에 대해 그렇게 공포를 가진 배우는 없었다고 한다.
역할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릴린의 분장을 오래 맡았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마릴린은 자신이 아주 잘 생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공포에 질렸다고 한다.
자신 없어 떨게 하고,
목소리를 잠기게 하고,
지극히 간단하고 짧은 문장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그 믿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는
그냥 얼굴이 아주 예쁘지 않아 근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릴린을 상당했던 숱한 심리분석가들도 그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 수 없었다.
아서 밀러는 이런 것들을 거의 예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릴린과 디마지오가 손을 마주 잡는 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시작은 디마지오가 했다.
온 미국이 사랑하던 그 청년은 1952년 초 야구복을 입은 마릴린의 사진을 보고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고 마릴린이 그 의상을 입은 것을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 여겼다.
선셋 대로에 있는 레스트랑에서 첫 만남이 있었는데, 마릴린은 두 시간 늦게 그곳에 나타났다.
서로 마음이 끌렸다. 서로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스물다섯 살의 마릴린보다 열두 살 많은 디마지오
둘은 모두 빈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런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온 나라가 그를 사랑했던 조 디마지오는 한번 결혼을 했었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사실 조는 퉁명스러운 남자인데다 누가 그의 명성을 그늘로 삼으려는 것 같으면 사람을 곧잘 의심하곤 했다.
사춘기 기질의 성격에다 자기도취에 빠지곤 했고 팔에는 척하고 여자 걸치기를 좋아했다.
한때는 정말 미국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은퇴한 상태, 아니 퇴장이었다.
너무 많이 다친 데다가 체력의 한계가 그를 자꾸 괴롭혔다.
돈보다 명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릴린이 그때 조에게 왔다.
마릴린은 야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조는 이 여자를 미국에서 제일 눈부신 아내로 만들고 싶었다.
마릴린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즐거웠지만 다른 사람들까지도 이 여자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참기 힘들었다.
조는 마릴린을 위해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녀가 노출이 심한 옷이나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옷을 입는 것은 아주 싫어했다.
‘나이아가라’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를 촬영한 뒤 마릴린은 진지한 것이든 우스운 것이든 기막히게 잘 소화해내는 배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촬영 공포증은 더 심해졌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1954)’을 찍으러 캐나다에 갔던 촬영팀이 헐리웃으로 돌아오는 날,
로버트 미첨과 마릴린 먼로에 관한 소문 때문에 마릴린의 뒤를 밟아 캐나다까지 따라갔던 조도 함께 돌아왔다.
공항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릴린이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 수백 명의 기자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때 그 소동을 회상하던 미첨은 마릴린은 군중들이 다른 사람을 환영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마릴린은 종종 그랬다.
어쨌든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더욱이 존 바움가가르트 사 달력의 그림에 들어간 벌거벗은 여자가 마릴린이라는 것이 알려진 후, 그녀가 기습처럼 행한 언론 플레이 덕분에 인기는 더 치솟기 시작했다.
도덕과 예의범절을 지키려 안간힘 쓰는 태도가 매카시 정화위원들의 견인차가 되고,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청교도 국가의 본질이 어느 때보다 부각되는 시절이었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통제하는 시절이었다.
알아서 자체 검열하고 사전 검열하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릴린은...
폭스사의 경영진과 보도 담당자들은 당황하여 마릴린에게 조언을 했지만 마릴린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언론에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탄의 대상이 된 그 그림 뒤에 자신의 진실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아직 어리고 가난했던 시절, 먹을 것이 없고 살아나갈 길이 아득했어요. 그렇게 포즈를 취하고 50달러를 받았어요.”
미국 안팎의 신문과 방송은 너나할 것 없이 그 이야기를 미친 개처럼 덥석 문다.
머릿기사 거리다.
그러나 마릴린은 그 모든 것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되풀이했다.
마릴린이 거짓말하지 않고
“육체가 바로 자기의 귀한 재산”
이라고 선언한 것에 아서 밀러는 탄복했다.
그러나 마릴린은 장사 세계에 허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앞으로 좀 더 배워야 했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한 마릴린의 말은 옳았다.
‘마릴린’은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이 ‘노마 진’이라는 재료에서 만들어낸 합성품이다.
그 합성품에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은 다른 세상에 대한 꿈과 생활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생활로부터 격렬하게 탈출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함께 녹아 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숨쉬고 느끼고 떨고 실수하는 것은 노마 진의 몫이다.
거물들과 유명인사들, 마릴린을 경탄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객석에서 기다릴 때, 배우 대기실에서 출연에 대한 공포와 싸우는 자는 노마 진이다.
조명이 들어오고 카메라가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마릴린이 존재한다.
마릴린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었고 요구사항도 끝없이 불어나기만 했다.
그러나 노마와 마릴린이 성공적으로 공생할 때에는 끝없는 행복감도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였던 나는 찬란한 일들이 생길 것 같은 상상에 잠기곤 했어요. 그게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개봉 기념파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고
그때 세상은 그 여자의 발아래 엎드리고 있었다.
마릴린의 영화 출연으로 제작사는 수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본인인 손에 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폭스사와 7년 계약을 맺을 무렵 주당 500달러에서 시작한 출연수당은 매년 조금씩 오르긴 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 출연할 때는 1만 5천 달러를 받았고 같이 출연한 제인 러셀은 꼭 열 배를 더 받았다.
사실 정작 금발은 마릴린이었다.
마릴린도 이 점을 강조하며 불평을 한 적이 있었지만 돈 문제에 관해 마릴린은 백치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디마지오가 마릴린을 도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질서를 새로 잡으려 하고 있었다.
마릴린은 이 무렵 마릴린의 사진사였던 밀턴 그린을 다시 만난다.
밀턴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릴린과 함께 구상하고 있었다.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MMP)
전보다 나은 역할과 전보다 나은 수당과 전보다 나은 조건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마릴린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때 영화 ‘핑크 타이츠’의 출연 교섭이 들어온다.
마릴린은 대본을 보고 실망하여 거절했다가 곤궁에 처한다.
폭스 집행부가 압력을 넣은 것이다.
화를 낸 것은 아니지만 슬픈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은 마릴린 먼로라는 사람을 보고 있지만 내 앞날을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폭스 집행부는 오로지 노마 진만 보았다.
그리고 노마 진을 다루듯 나를 다루었다.
마릴린은 로스앤젤레스를 그냥 떠나버린다.
폭스사는 그녀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릴린과 디마지오는 1954년 1월14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한다.
당시 미국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두 스타가 이제 함께 살게 되고 온 세상은 달콤한 사랑이 넘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전성기를 넘긴 야구선수 디마지오는 마릴린이 디마지오 여사가 되어 서부극과 맥주와 당구와 낚시와 야구경기에 대해 정열을 나눌 것과,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않고 친구들도 집으로 데려오지 않을 것을 기대했다.
아예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그 아닌 다른 남자가 마릴린을 바라보고 마릴린이 눈길로 응수할 때면 시칠리아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디마지오는 미칠 지경이었다.
디마지오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지만 마릴린은 아직 한창 전성기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인물을 찾던 마릴린은 이제 매일같이 텔레비전 앞에서 소일하는 조기 퇴직자와 함께 사는 것이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같은 인물을 찾던 디마지오는 이제 거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부러워할 정도로 육체파인 여배우, 게다가 자기 직업에 충실한 배우를 얻었다.
그러나 가정 살림에 충실한 주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잘될 리 없었다.
역시 잘 되지 않았다.
1954년 2월
일본에 갈 일이 있어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그렇게 해결하기로 했다.
그때 디마지오는 야구와 관련하여 일본에 초빙받은 터였다.
실용적으로 사고하는 디마지오는 그 일정을 신혼여행과 연결하여 누리려 했다.
여행은 마릴린 먼로가 승승장구하는 계기가 된다.
부부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팬들은 폭발하듯 환영한다.
마릴린 때문이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한 장군이 와서 물었다.
“일본에 주둔하는 우리 병사들 앞에 한번 나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일본 여행 기간 중에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말한다.
“조 디마지오 씨에게 여쭌 것이 아닙니다. 부인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마릴린은 기뻐하며 승낙했다.
한국 주둔 미군들 앞에서도 노래를 했다.
폭풍 같은 갈채와 열광과 휘파람을 응답으로 받으며 눈보라 속에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서서, 감독과 촬영기사와 연기 선생이 없는 그곳에서 마릴린은 끝없는 자유를 맛본다.
“갈채하며 소리 지르는 군인들 앞에 섰을 때 눈송이가 춤추며 날리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포를 잊었다. 행복하기만 했다. 내가 겪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것 같다.“
처음으로 한 라이브 공연이었다.
나흘 동안 계속된 공연에서 마릴린은 열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조는 별수단을 다 동원해도 마릴린을 막을 수 없었다.
결혼생활은 벌써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곧 드러나게 됐다.
잡지 ‘Photo play'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을 들어 마릴린을 다시 수상자로 정하자 디마지오는 마릴린과 동행하지 않는다.
시상식 후 축하파티에서 마릴린은 친구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와 결혼하려는지 아니?”
“결혼이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아서 밀러와 결혼할거야”
마릴린 먼로의 전기 작가 중 최고로 꼽혔던 작가는 이 무렵 마릴린은 부부생활의 고민을 엘리아 카잔이나 아서 밀러에게도 찾아가 의논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별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감정만 흘렀다.
그 무렵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내가 무엇을 바랐을까? 모르겠다. 현재 결혼생활을 정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릴린을 내 결혼생활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들다. 나의 세계는 저절로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켜온 과거사 무너지고, 디디고 선 땅이 흔들린다.불안하다.“
결혼생활의 고통이 심해진 마릴린은
잠을 자고 안정을 취하기 위해 약을 머고,
깨어나기 위해 약을 먹고,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었다.
생활과 시간 질서가 뒤죽박죽되면서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대화로 풀 줄 모르는 남편과 다툰 날이면 마릴린은 곳곳에 피멍이 들고, 분장사가 분을 거듭 덧칠하는 일은 갈수록 잦아졌다.
그 무렵 촬영한 영화 중 마릴린과 함께 작업한 할 세퍼는 마릴린은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며 그녀의 재능을 높이 산 적이 있다.
마릴린에게 세퍼가 남편보다 필요하고 남편보다 더 믿음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퍼 이야기를 듣는 디마지오는 질투에 불타올랐다.
영화 ‘7년 만의 외출’(1955)에 들어갈 ‘Heat wave'라는 노래를 춤과 함께 마릴린이 연습하고 있을 때, 조가 촬영장에 들어왔다.
마릴린은 조에게 인사를 했지만,실오라기 하나 겨우 걸친 듯한 옷을 본 조는 호통을 치더니 촬영장을 떠났다.
한번은 마릴린이 조에게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글귀가 새겨진 부적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거든.”
이라는 구절이었다.
아서 밀러라면 그 때문에라도 마릴린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제기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역시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이 일종의 영화 디자이너로 영입한 샘 쇼는 영화사업에 능란한 광고 사진각가로서,
당시 영화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대단한 사진을 기획하고 있었다.
지하철 환기통 위에 마릴린이 서고, 그 아래에는 지하철이 털털거리며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야간 촬영인데도 2천 명 가량의 구경꾼들이 나와 환호한다.
환기통에서 나온 돌풍으로 그야말로 돌풍 같은 광고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제작소에서 반복 촬영을 하고, 빌리는 면밀히 연출을 하였다.
그 사진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대성공을 거두고 휘날리는 치마와 휘날리는 머리칼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디마지오는 이제 KO상태가 되었다.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끝이 왔다. 헤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이혼 소식은 헐리웃에 핵폭탄처럼 떨어졌다.“
히로시마에 최초의 핵폭탄이 떨어진지 십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다음날, 마릴린은 예전보다 더 분을 많이 바르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화장을 짙게 했다.
몇 주 후인 1954년 10월,마릴린 디마지오 여사는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
직업생활을 계속하려는 처지에서 도저히 타협하기 힘든 부부생활이 이혼 사유였다.
세상 언론은 이혼 소식일 전하고 당연히 아서 밀러도 소식을 들었다.
밀러는 집에 들어앉아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있어서 안 될 일은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은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조 디마지오는 코멘트를 하기는 했지만 거세게 이는 질투 같은 행동은 보이지 않고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도움을 받아 사설탐정을 동원했다.
마릴린이 있을 것 같은 방문은 다 부수고 들어갔다.
할 세퍼와 함께 있는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서였다.
마릴린이 무엇인가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디서 누구와 있는지 알 수 없어 안달이던 디마지오는 서서히 진정을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참다운 친구가 되려고 디마지오는 애를 썼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마릴린이 필요로 할 때에도 나타난다.
마릴린 먼로는 변화를 거듭한다.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 나갔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을 마무리 짓는 파티에서는 클라크 게이블과 춤을 춘다.
어린 시절의 꿈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마릴린 먼로가 상상했던 아버지라든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클라크 게이블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 클라크 게이블이 마릴린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그 무렵, 밀턴 그린과 함께 계획하던 회사 MMP도 윤곽이 잡혔다.
마릴린에게 전보다 강한 영향력과 발언권과 전보다 나은 수입을 보장할 영화사였다.
마릴린은 지금까지 장기계약 때문에 폭스사에 노예처럼 묶여 있던 종속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진지한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강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릴린도 잘 알고 있었다.
폭스사는 막강한 힘이 있었고 잘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릴린은 자신이 유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흥행 성적에서 나타나듯, 그녀는 미국이 자랑하는 스타인지라 제작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리웃에서는 나를 계속 발전시킬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에 파묻혀 지냈어요.
그들은 나에게 몇 시까지 오라고 통보하기만 했죠.
헐리웃을 떠나 뉴욕으로 가면,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해요.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마릴린은 과감히 걸음을 내딛었다.
뉴욕으로 갔다.
“이제 나는 영화사 주인이다”
하며 마릴린은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밀러는 뉴욕에 볼일 보러 오는 일이 잦아진다.
마릴린은 계획을 공포하려고 기자회견을 요청했다.
폭스사 사람들은 마릴린과 맺었던 계약서에서 마릴린을 계속 묶어둘 수 있는 항목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마릴린은 그 강력했던 스튜디오 시스템을 비틀거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폭스사는 MMP의 희망사항에 따른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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