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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꿈을 이루기 위한 발걸음

by Ajan Master_Choi 2019. 7. 29.

 

1570년, 티코는 자신의 생부(生父)가 매우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덴마크로 돌아오게 된다. 티코는 대형 천구의(天球儀) 제작을 책임 맡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파울 하인첼과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티코는 귀족의 현실적인 삶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빈번한 여행, 과음(過飮), 끊임없는 정신적 압박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런 삶은 티코의 생부(生父) 오테를 쉰셋이라는 나이에 생(生)을 마감하도록 만들었다. 오테는 그 해 겨울을 힘겹게 넘기긴 했으나, 다음해 이른 봄에 헬싱보리 성(城)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테 브라헤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할해서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당시 딸들은 상속권을 가지지 못했다). 베아테와 그의 두 아들 티코와 슈텐(티코의 동생 이름은 그의 외삼촌의 이름과 같다)은 크누트스트루프의 공동 관리자가 되었다. 크누트스트루프의 영지(領地)는 공식적으로 322개의 농장, 29개의 별장, 그리고 7개의 제분소(製粉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영지에 대한 티코와 슈텐의 몫은 200개의 농장과 20개의 별장, 그리고 제분소 5개 반(半)에 해당했다. 그런데 오테는 그것 말고도 그의 상속자들에게 또 다른 유산을 남기고 떠났는데, 노르웨이와 덴마크 일대에 자그마치 500여 개의 농장, 60여 개의 별장, 그리고 14개의 제분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들이 또 전부는 아니었는데, 코펜하겐과 여타 지역에 걸쳐 4채의 저택과 40개 이상의 임대 건물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의 삼림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목축(牧畜)과 벌목(伐木)에 따른 수입이 또 있었다. 이와 같은 유산 덕택에 티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엄청난 부(富)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머리 속엔 오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체관측소를 건립하겠다는 꿈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559년에서 1588년 동안 덴마크를 통치했던 프레데릭 2세는 독서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독증(難讀症)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사상(思想)과 학문(學問) 논하기를 즐겼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덴마크의 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장학제도를 만들고, 학자들과 교수들을 덴마크로 유인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하고 있었다. 젊은 티코가 조금씩 유럽의 여러 학계에 알려지게 되자, 티코의 양부(養父-요르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구한 바가 있는 프레데릭 2세는 티코가 덴마크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원했다. 프레데릭 2세는 티코에게 특별하게 신경을 쓸 거리도 없이 봉급이 지급되는 로스킬레 대성당을 총괄하는 참사회원직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 거래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티코가 그 임무를 맡으려면 현재 그 직(職)을 맡고 있는 참사회원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티코는 그 제안을 꼼꼼하게 따져본 후, 덴마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티코는 덴마크의 유력 가문들 중 하나였던 브라헤 가문의 대표로서 덴마크 왕실을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티코는 자신보다 12살이 많았던 프레데릭 2세와 점차 더 많은 친분을 쌓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둘은 자기들이 똑같은 경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둘은 모두 하층 계급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티코는 자신의 아버지 오테의 장례를 치루던 몇 주 동안 루터교 목사였던 요르겐 한센의 딸 키르스텐 요르겐슈다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사 신분은 귀족 계급이 아니었으며, 당시에는 귀족과 목사 신분은 상호간에 재산권을 발휘하거나 또는 상속권을 가질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코는 평민 출신의 키르스텐과 결혼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는데, 그런 행위는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코는 자신의 성격상 그런 문제들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결코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어느 날 결국 티코는 브라헤 가문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코(鼻) 》

 

통상 학자들은 그 사람의 성(姓)으로 소개되지만, 몇몇 학자들은 그 업적이 너무 뛰어나거나, 또는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흔할 때, 아니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전통에 의해 가끔씩 이름(first name)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있는데, 티코 역시 그 예들 중 하나이다.

티코는 1546년 12월 14일 현재는 스웨덴 영토이지만 당시엔 덴마크 영토였던 헬싱보르크(Helsingborg)에 있는 크누트스트루프(Knutstrup 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덴마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가문들 중 하나인 브라헤(Brahe)가문의 오테(Otte)와 빌레(Bille)가문의 베아테(Beate)사이에서 쌍둥이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게 된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당시 귀족들은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지(領地)를 관리하거나,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겼었는데, 티코는 과감히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 과학자의 삶을 선택했다.

티코는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근대천문학의 태동기에 당시 정통(正統)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굳건하게 지켜오던 프톨레마이오스 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천동설)에다 코페르니쿠스적 요소(지동설의 특징)를 가미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지구중심설(천동설)을 창안한 당대 최고의 관측천문학자였다.

그의 수정(修正)지구중심설(천동설)은 티코 행성계(Tychonic Planetary System)라고 불리는데,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사들에 의해 동양(東洋)으로 소개되어 19세기까지 코페르니쿠스 행성계(Copernican Planetary System)와 치열한 격론을 이어갔다.(하지만 서양 학계는 이와 관련된 논쟁을 일찍 마무리 지었다).

그의 코(鼻)가 잘려나간 사건은 과학사(科學史)의 유명한 에피소드들 중 하나인데, 그 일화(逸話)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566년 4월 15일, 티코는 자신의 동료이면서 조언자(助言者) 역할을 수행하던 안데르스 쇠렌센 베델(Anders Sørensen Vedel - 훗날 덴마크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 및 북유럽 전설의 수집가’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다)과 함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대학에 등록해서 강의를 들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다섯 달 후, 전염병이 창궐(猖獗)해서 그 둘은 독일 북동부 로스톡(Rostock)에 있는 대학으로 피신해야 했다. 로스톡은 비텐베르크와는 달리 뛰어난 천문학자가 없었다.

티코와 베델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로스톡에 머물기로 했다. 티코는 그곳에서 신학(神學)교수인 루카스 바흐마이스터(Lucas Bachmeister)와 친해졌는데, 그 둘은 서로의 관심거리인 과학과 수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66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티코는 바흐마이스터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무르익자 엄청난 양의 맥주가 소비되었는데, 티코는 갑작스럽게 자신과 팔촌(八寸)관계였던 만더루프 파르스베르크(Manderup Parsberg)와 ‘가장 천부적(天賦的)인 수학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시비(是非)가 붙게 되었다. 만취 상태였던 그 둘은 친구들이 채 끼어들기도 전에 하마터면 주먹다짐을 할 뻔 했다. 그 다음 주, 12월 29일에 그들은 또 다른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술에 잔뜩 취해서 지난 번 끝을 보지 못한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폭력 사태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날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의 후손(後孫)이자 티코의 첫 번째 전기(傳記) 작가였던 사람에 의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티코는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러 동료들 중 하나였던 파르스베르크와 언쟁을 시작했는데, 채 얼마가 되지도 않아 그 둘은 흥분한 채 덴마크 말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로 검투(劍鬪)를 신청하게 되었고, 곧장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의 할머니는 그 당시 그들과 같은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덴마크 말도 알고 있었는데, 나의 할머니는 테이블의 다른 친구들에게 그 둘 사이에 실제로 결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곧장 뒤따라가서 불행한 사건 발생을 말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 둘이 교회 마당에 올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파티를 이어갔는데, 결국 티코는 자신의 코를 베어가는 칼끝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코의 대부분을 잃은 사건은 티코의 일생을 다룰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인데, 티코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한 친구는 이렇게 진술했다고 전해진다.

 

“티코는 가능하면 코 없이 돌아다니질 않았으며,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새로운 코를 장만했다. 티코는 새로운 코(인공으로 만든 코)를 착용하기 위해 왁스를 발라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도 부유한 귀족인지라 겉으로 보기에 자연스럽게 보일 만큼 너무 튀지 않은 색상에다 진짜 같은 외형을 지닌 금-은(gold and siver) 합금 소재의 인공 코를 주문할 수 있었다.”

 

평생 살아가면서 티코가 콧등 위에 연고를 바르거나 접착을 위해 아교를 바르고 문지르는 일은 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티코는 언제나 모든 이들 앞에서 당당했으며, 당시 많은 이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속에서 그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보기 싫은 흉터와 콧등을 가로지르는 선(線)을 발견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