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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9가지 성격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by Ajan Master_Choi 2022. 10. 19.
이순신 장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외적의 침략에서 구원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전투에선 용감했지만 정적의 모함을 받아 추방당했다.
마지막에 전장에서 눈을 감으며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라고 유언을 남긴 장군이 있었다.
누구일까?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이라고 답을 한다.
그러나 아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장군인 키몬장군이다.
신기하게도 키몬의 일생은 이순신 장군과 아주 비슷한 면이 많다.

위대한 장군이라는 점과 조국을 침략한 외적을 물리친 것,
그리고 정적들의 모함으로 도편추방을 당했다는 것,
해군 제독을 지냈다는 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타나그라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후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과 흡사하다. ​

키몬은 귀족 계급으로 태어났음에도 아버지가 벌금 50달란트를 낼 돈이 없어 감옥에 갇혀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자랐다.
키몬은 청렴 강직한 성품에 용감하고 지혜로워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대군이 운명을 걸고 맞서 싸운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키몬은 전쟁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그 돈으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아니라 아테네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를 수리하는데 썼다.

자기 돈을 들여 아테네의 성벽을 쌓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자기 농장을 개방하여 시민들이 곡식과 과일을 먹을 만큼 가져가도록 하고 굶주리는 시민은 누구나 자기 집에서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길에서 헐벗은 노인을 만나면 옷을 벗어주고 아고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일부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갈채를 받기 위해 쇼를 한다며 욕하고 헐뜯었다.

10년 추방형을 선고받은 키몬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벌이자 전투에 백의종군 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그가 스파르타와 내통하러 온 게 아니냐며 내쫓았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비참하게 패배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키몬을 그리워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비록 정적이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키몬을 사면하였으며 키몬은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화해시켰다.

키몬 장군은 전쟁 도중 병에 걸려 사망했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잘못되어 죽음에 이르렀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키몬이 죽은 것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던 페르시아군은 크게 패했고 아테네군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제갈공명이 귀환일 수도 있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남긴 남도 그러했다고 전한다.

아테네가 낳은 위대한 영웅이자 장군이었던 키몬의 명성은 죽어서도 그의 조국과 군대를 구원했던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듯 이순신 장군도 조선을 구원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다 선상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조카 이완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적에게 알리지 말라가 아닌 동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소리이다.
이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더 있다.
그 시대의 정치적인 상황이 작용했던 것이라고들 본다.

역사 속 인물을 성격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출발한다.
유형 분석에 대한 내용은 스스로 분석해 보는 것이 자기 발전을 위해서 좋다.
그러나 사료를 보고 분석한다는 것은 분석자의 판단이나 의견이 많이 내포되어 있음을 먼저 알린다.

또한 역사 속의 인물,
특히 조선왕조 실로에 기초해 보면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즉 그들의 성격 유형 판단은 우리가 모두 아는 객관적인 내용보다는 분석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또한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분석을 하였다.

첫째, 이순신 장군은 몇 번 유형일까?

“그의 한쪽 얼굴에는 선한 모습이 빛나고 있는 반면 다른 쪽 얼굴에는 악한 모습의 표시가 커다랗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함도 생각하지 말고 악함도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무엇이 본래 얼굴인가?“

에니어그램을 이야기할 때면 꼭 서두에 하는 말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는 모두 이중인격자?
아니 다중 인격자?
이걸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몇 번 유형일까?
6번 유형일까?
아니면 1번 유형일까?
그것도 아니면 3번 유형일까?

대체로 이 세 가지 유형 안에서 고심해 볼 수 있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유형 분석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사료를 기초로 한 분석으로
분석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고 거기에는
“지위 효과”와 “권위 효과“,“바벨 효과(바넘 효과)”에 종속되어지게 된다.

그래서 누구는 몇 번 유형이다하고
반론도 제기할 수 있지만 반론자의 의견도
다르지 않고 많을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래서 바뀌고 또 바뀐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많은 사료를 읽어야 하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그 시대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역사서를 읽게 되면 꼭 기억해 둬야 한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나라에 쓰일 때에는 죽기로써 맹세할 것이요, 쓰이지 못한다면 들판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권세 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사는 그런 짓은 내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대장이 되어서도 이런 도리를 지킬 뿐,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도 화평하고 친절하며 간격을 두지 않았고,
일을 당해서는 과단성 있게 판단하며 조금도 회피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박기봉의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장군에게서 느끼는 것은
언제나 초지일관된 마음가짐이다.
일심(一心)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수결이 말해 주듯이
충과 효를 기본으로 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일이 있기 전에는 철저한 준비를 했고일을 당해서는 오직 그 일에만 지극정성을 다했고,일이 끝나면 그뿐 그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유비무환을 언급한 내용으로
에니어그램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아, 몇 번 유형이다.”
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여기면 된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반동형성을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6번 유형이다.
(누구의 의견이 아닌 본인 스스로의 의견이다.)
.
.
이순신 장군을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난 반발을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인물을 보면서
유형 분석을 하고 이야기하면 거의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딱 두 사람이야기만 나오면 반론이 장난이 아니었다.
바로 태조 이성계와 이순신 장군이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는 결정장애를 갖고 있는 아주 우유부단한 9번 유형으로 보고 있다.

둘째, 이순신 장군과 태조 이성계는 어떤 공통점이 있고 또 무엇이 다른가?

이 두 영웅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비교했었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 세부적으로 비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면에서다.
책사 등 인맥, 성향, 여자관계, 전술전략 등
태조 이성계에게는 있고 이순신 장군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

스스로는 제일 먼저 이것을 꼽는다.
참모, 책사이다.

이성계에게는 정도전이라는 책사와 그 외에도 많은 참모가 있었다.
수양대군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었다.
유비에게는 제갈공명이, 조조에게는 사마의 손권에게는 노숙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누가 있었을까?

부하장수들과 의견을 나누었다고 하지만 책사라고 할 사람은 없다.
혼자서 다 선택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성계에게는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부하들과 국민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나라는 있었지만 주군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에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사람에게는 충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형적인 6번 유형들은 나라보다 사람을 선택하고 사람에게 충성한다.
이런 사람들은
“짐이 곧 국가이다.”
라는 태양왕 루이14세를 신봉하는 자들이 아닐까 한다.

장계나 소에 보면 선조에게 읍소하는 글들이 있지만 선조에게 자기를 믿어달라는 글이 대부분이다.

한산도는 지형이 복잡하고 좁아서 아군에게 불리한 장소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적선을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무방비상태의 적을 학익진법으로 집중공격하여 훗날 세계 3대 해전으로 불리는 대승을 거둔다.

한산도 해전은 뛰어난 전략가로써의 장군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부하장수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연구하였다고 사료는 전한다.

이순신 장군이 관노와 잠을 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언급이 댔던 이야기다.
난중일기의 탈초본에 기록된 여진, 여진입, 여진삽 등의 구절을 놓고 1935년 일본에서 최초로 이순신 장군과 여진이라는 관기가 성관계를 했다고 해석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당시 조선의 호남지방에 많이 이주해 살고 있던 여진족과 생활을 같이했다는 것이 역사 전문가들의 정설이다.

저녁에 여산의 관노의 집에서 잤다(夕宿于礪山官奴家)는 문구도 논란이 됐지만, 이는 장군이 백의종군하러 가던 중 여산 관아의 사내종 집에서 하룻밤 유숙한 것으로 여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위대한 영웅을 허위사실에 근거해 국민적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며 이순신 장군을 이념 편향의 도구로 악용하는 정치계와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즉, 민족의 영웅이자, 대일본 전쟁에서 전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일본이 고의적으로 왜곡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게도 첩이 있다는 설은 확실한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은 유능한 장군이었지 유능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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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왜 마지막을 선택했을까?

선조와의 관계, 광해군과의 관계 등을 참고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하고 있다.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의 흐름을 바꿀만한 중대한 결정까지.
그래서 인생은, 우리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지금도 과거의 수많은 감정들의 결과이며 오늘의 결정들이 모여 나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정을 잘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이다.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남에게 결정을 맡기며 결과에 후회를 할지,
좋은 결정으로 단단한 자아를 만들어 갈지,
이제는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말처럼 많은 고심 끝에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 임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그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노량해전은 불필요한 전투였다.

철수하는 일본, 그걸 끝까지 쫓아 모두 죽이려는 조선군, 아니 이순신 장군.
노량해전 초기만 갖고도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살길은 열어두고 포위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도 어기면서까지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했는지!
물론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왜 갑옷을 벗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그간의 명령불복종 사건,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눈치,
광해군과도 편치 않은 관계 등으로
죽음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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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음

전하의 수레는 서쪽으로 멀리 떠나고 세자 저하는 북쪽에서 위태로운데
외로운 신하가 나라 근심하는 날 장수들이 공을 세울 때로다.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들을 다 섬멸할 수 있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

태조 이성계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었다면?
이성계는 어찌 했을까?

절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와의 관계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고 설사 나쁘다하더라도 광해군과의 관계도 불편한 관계가 아닌 협조적인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광해군과 협조하여 왜란 후 더욱 강대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훗날 정묘효란, 삼전도의 굴욕으로 알려진 병자호란 등의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순신 장군의 이성계처럼 왕권을 취하는 일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면 오늘의 현실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의 개국 후 200년의 지난 시점이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단단한 군권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호남에서는 호남왕이라고도 했으니 국민들의 지지도 있었다.
1번 유형이나 3번 유형이었다면 희생보다는 혁신을 택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은 여기 노량서 전쟁 종식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결국 이순신은 군왕 선조나 광해군과의 공존이 힘들 것을 예견하고 백성과 부하의 안녕을 위해 무력 대립이 아닌 왜적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을 택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에게서 불안과 강박을 쓰고 싶었지만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원본에는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6번 유형의 특징이 제대로 나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문제다.
때문에 피드백이 장난 아니다.
싸움까지 걸어오고.
그래서 중간 중간 논란이 될 내용들은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음.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라는 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팩트가 아닌 픽션으로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이순신 장군과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다 그렇다.
이런 현상은 “권위효과”와 “가스라이팅”의 영향과 지독한 “편향”때문이다.

더 쓸 내용이 남아 있지만 여기서 END유형 설명은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다 유형 설명이라고 보면 된다.
글을 보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떤 배경 지식을 갖고 있든,
어떤 기대를 하든지,
스스로가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내용과 의미는 달라지게 보인다.

글은 말과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말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어떤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글은
어떤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주도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기 어렵다.
말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을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말하는 사람은 있으나
글을 만드는 사람은 없고
글이 없는 사람도 참 많다.

둔필승총이고 적자생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