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 사는 주민들은 몇 시 몇 분인지 알고 싶으면 등이 구부정하고 어깨가 좁은 철학자가 집에서 언제 나오는지 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 남자는 매일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던 것이다.
한번은 칸트가 시간을 깜박 잊는 바람에 수많은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이 약속에 늦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학생들에게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물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네 번째 물음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물음이 형이상학적 과제라면
두 번째는 도덕에 관한 문제였다.
세 번째 물음은 종교(신앙)와 관련된 것이고,
네 번째 물음은 인간학의 영역이었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10년 이상을 매진했는데, 이 기간 동안 쾨니히스베르크 밖에서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이 형이상학에 있다고 확신한 칸트는 스스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고백한 이 분야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계몽주의와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이 형이상학은 무엇일까?
눈으로 볼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간의 정신과 영혼, 마음과 관련된 것, 그리고 순수한 객관적 물리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을 다루는 분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에서 ‘자연학 뒤 meta’에 나온다고 해서 ‘메타피직Metaphysik’이라는 이름이 붙은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존재와 존재의 근원,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1781년 칸트의 형이상학적 연구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두꺼운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1787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오늘날 『순수이성비판』은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고,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칸트가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간 인식의 틀과 합법칙성을 새롭게 정의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모든 확실성은 인간의 이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었다.
개별적 관찰에서 보편적 자연법칙을 추론해내는 아이작 뉴턴의 귀납법에 영향을 받은 칸트는 보편적인 것의 분석에서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카르트의 연역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루소의 저서를 통해 칸트가 주목하고 있던 인간의 경험 세계에 대해 연역법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루소는 인간의 경험이 단순히 이성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철학자였다.
하지만 칸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데이비드 흄이었다.
흄은 경험이 없는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인식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인식을 얻는 과정에서 감각 또는 지각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이성에 최대의 의미를 부여했다면, 흄의 회의적 경험론은 감각과 지각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 과정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함으로써 뉴턴과 흄, 루소의 이념을 조화롭게 결합시켰고, 게다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정신과 육체의 분리)까지 극복하였다.
우선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서 지각과 오성, 이성을 구별하였다.
이 세 요소는 인식 과정에서 서로 이렇게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지각과 오성은 상호 작용을 하고, 서로를 교환하면서 인식을 창출한다.
반면에 이성은 지각과 오성으로 획득된 인식을 더욱 넓히려고 애쓰고, 오성과 감각의 상호 작용으로 얻은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원인과 결과의 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원인과 결과에는 공통점이 있는가?
그 공통점이 신인가?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을까?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일까?
자유일까?
그것이 만약 자유라면 인간은 자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에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초월적’과 ‘선험적’이라는 대립적 개념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초월적’이라고 불렀고, 시간과 공간처럼 인간이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필연적인 조건들을 ‘선험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서술한 자신의 인식론을 ‘선험 철학’이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험 철학은 다시 미학과 분석학, 변증법으로 나뉘었다.
인간의 지각은 ‘선험적 미학’의 대상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지각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표상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표상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래의 인식 과정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도움으로 기하학과 수학을 연구해나갈 수 있고, 경험 a posteriori 이 아닌 순수한 사유 a priori 의 논리적 귀결에서 도출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칸트는 ‘선험적 분석학’에서 오성을 연구했다.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 이외에 인간의 인식에 필요한 기본 개념들, 즉 범주들이 언급되었다.
범주는 인간이 자신의 지각을 정리하고 분석해서 결과에 이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장비이다.
‘원인’과 ‘결과’, ‘실체’와 ‘속성’이 범주에 속한다.
실체는 사물의 핵심을, 속성은 사물의 변화하는 성질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이성이 던지는 중요한 물음들이 ‘선험적 변증법’의 대상이다.
이 영역에서는 신과 자유, 무한성의 존재 유무를 다루고 있다. 칸트의 확신에 따르면 이성에 의해 제기된 물음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지각과 오성으로 이루어진 경험 세계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던지는 물음은 그런 틀을 뛰어넘은 것이고, 그 물음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인간이 자유롭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정반대의 논거를 댈 수 있다.
공간이 무한한가, 아니면 유한한가 하는 물음도 마찬가지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도 궁극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이상이고, 신의 존재는 안셀무스나 데카르트의 시도처럼 이성으로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칸트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틀을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보다 훨씬 좁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앞서 언급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끊임없이 이성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은 인식 과정에서 현실을 구조화함으로써 자신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에 의해 사물이 생성된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인상이 오성의 분류와 정리를 통해 우리 속에서 사물의 형상으로 만들지는 것이다.
칸트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리는 ‘현상계’를 인식할 뿐 세계의 실제 모습은 결코 알지 못한다.
이로써 칸트는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와 함께 계몽주의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이성이 중요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실들의 토대를 깨닫게 했다.
칸트는 이성을 비판적 시험대에 올렸고, 이성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 위안으로 칸트는 오성을 제시한다.
오성은 우리가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칸트는 신과 자유, 무한성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고 선언했음에도 그런 물음을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실천이성비판』(1788)에 등장하는 유명한 정언명법 속에 표현되어 있다.
칸트 실천 철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는 이 책에서 정언명법은 이렇게 요구한다.
“네 의지의 원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
이 말은 흔히
“남이 너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행동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라는 말로 풀어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은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을 거칠게 요약한 것일 뿐 아니라 칸트를 잘못 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칸트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도 그런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는 소망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불의를 저지르게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칸트 철학이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칸트가 계몽의 불안한 길을 걸으면서 ‘인간 스스로 책임이 있는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덕적 당위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칸트의 사유, 오성과 지각을 통한 이성의 비판적 검증,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학문 이론과 철학에 깊이 스며들어 있을 뿐 아니라 칸트의 윤리·도덕적 성찰은 사회과학의 확고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계몽은 인간 스스로 책임이 있는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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