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존재한다. 진실을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다.
현실이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고 내가 잘되는 것이 정의라는 말이 아닐까?
모든 사안에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상대방이 주장하는 바는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 옳바르게 판단하려면 양쪽의 이야기를 잘 들어봐야 한다.
가장 현명한 태도는 역시 황희정승이 말 한것 처럼
"그래. 네 말이 옳다."
라고 둘 다에게 말 해주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진리는 존재 하는가?
참으로 심오한 질문이다.
"정치는 이미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그의저서 ~군주론~ 에서 한 말이다.
그래서 인지 정치인과 연예인들이 이미지에 목숨을 걸고 광고와 흥보에 열을 올린다.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미지라면 가장 좋은 이미지는 어떻게 구축할수 있을까?
가장 진실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진실에 기초한 이미지다.
그렇다면 진리는 과연 존재 할까?
모든 진실은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진실과 진리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첫번째 리액션은 조롱이다.
"에이.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설마. 그러려고"
비행기와 잠수함을 처음 개발할때 했던 말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고 했을때
"아니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그런데 왜 ?"
"내 눈에 평평하게 보이지 ?"
"근데 나는 왜 어지럽지 않지 ?"
"말이 되는 애기를 해야 대꾸할 맛이 나지 !"
두번째로 이런 반응은 곧 부정으로 치닫는다.
"지금부터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화형에 처하겠다."
"모든 책을 다 불태워 버려라."
사람들의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양심에 반하는 자백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당시의 교회에서 이단아 라고 추방 당했다.
그러나 3단계로 가면 조롱거리가 된 그 주장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베르누이의 법칙을 이해하면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4계절과 낮과 밤이 존재하는 것은 지동설이 진리이기 때문 이라는 건 이제 눈 가려진 소경도 초등학생 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진리의 3단계는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한 유명한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진리를 당시의 지식인들은 받아 들이지도 않고 중상 모략으로 독약을 마시게 했다.
"너 자신을 알라 !"
는 말이다.
그 말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 이다.
내가 누구인지 ?
보통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
예수가 당시 종교권력자요 기득권자 (바리새인.사두개인) 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
고 외쳤을때
그 들은 (나사렛 괴수 이단) 이라고 정죄하며 예수가 요구한 개혁의 외침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종교 권력자인 그들의 중상모략으로 당시 로마법의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죽음에 처하게 했다.
과연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
자신들의 기득권 침해다.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 권력자요 기득권자 들은 과연 누구인가 ?
누가 예수를 왜 죽였는가 ?
바로 당대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했던 이들.
그리고 당대의 종교권력자요 기득권자들이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인 것인가 ?
자신들의 기득권 침해가 이유이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원리~ 를 발표 했을때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왜 그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는가 ?
예수께서도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잔치상을 차려놓고 길가 시장터에 나가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잔치에 초대 했지만.
사람들의 대답은.
"저는 시집 가야 되고."
"장가 가야 되고."
"돈 벌러 가야 되고. "
모두 다 거절한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현상과 삶의 이치.
현상과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신 부처님은 반신반의 했다.
이 심오하고 오묘한 진리를 설한다고 중생들이 과연 받아 들일까?
자신과 같이 단식 수행했던 다섯비구니 들을 향해 무려 300km나 되는 거리를 향해 걸어 갔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하기 시작했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언인가 ?
괴로움의 실체 정체는 무엇인가 ?
괴로움에서 벗어 날수는 있는 것인가 ?
그들이 최초로 부처님의 신봉자가 됐다.
그 이후로 무려 2600여년이 흐른 지금 그 가르침이 도도히 굳굳하게 이어져 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즉 참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쉬타인은 그의 어록에서
"아마도 21세기에 세계인들의 정신 문화를 이끄는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될것이다."
라고 했다.
왜냐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자연과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2600여년전에 설한 붓다의 가르침인 ~색즉시공 공즉시색~ 의 가르침이 현대 양자 물리학하고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받아 들일수 있을까 ?
2000년전에 설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 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외친
~너 자신을 알라 ~ 고 절규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 하고 있는가 ?
사람들은 오로지
세상적인 부귀영화.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
육체적인 안락과 쾌락.
등등의 포로가 되어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양 착각 속에서 삶의 노예가 되어 정신이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열차가 시속 100km의 속도로 서로 마주보고 달리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더 소유하고 얼마나 더 가지고 얼마나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것인가 ?
우리 욕망의 끝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지구촌에 왔다 가신 모든 성인들 (부처님.예수님.공자.노자.장자.동서양의 모든 철학자들.깨달으신 선각자들) 의 가르침 중에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으로 말하면 구원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해탈 열반이요.
노자의 가르침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살아가라는 (무위의삶) 이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대 (자유)이다.
죄와 죽음.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
세상적인 부귀영화 등등 에 끌려다니지 않는 영혼의 자유 말이다.
그것은 곧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인 존재론적인 실존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그분들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내가 대답 할수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스피노자가.
프리드니히 니체가
데카르트가.
쇼펜하우어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칼 야스퍼스가.
예수가.
붓다가.
노자가.
장자가.
물은 이 물음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고 너의 몫이다.
'제왕회관 휴게실 > 삶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힘들어도 웃고 살아요 (0) | 2014.08.26 |
---|---|
남자와 여자의 7가지 심리 차이 (0) | 2014.08.25 |
삶,,,희망 (0) | 2014.08.21 |
당신 곁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0) | 2014.08.19 |
인간심리 25가지 법칙 (0) | 2014.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