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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재봉틀ㆍ어머니와 누이의 꿈 담긴 ‘마법의 기계’

by Ajan Master_Choi 2017. 10. 13.

“이 재봉틀을 믿고 원주로 왔어. 이 재봉틀 믿고 <토지>를 시작했지. 실패하면 이걸로 삯바느질한다, 다만 내 문학에 타협은 없다….”

작가 공지영씨는 생전의 박경리 선생을 원주에서 만났을 때 재봉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박 선생이 가장 아끼던 세 가지 물품은 재봉틀, 국어사전, 고향 통영의 목가구인 소목장이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자랑한 것도 6·25 때도 들고 다녔다는 낡은 재봉틀이었다.

작가든, 재벌 부인이든 궁핍한 시절을 이겨온 어머니들에게 재봉틀은 옷이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마법의 기계이자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였다.

밤새 침침한 눈을 비비며, 시큰거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재봉틀과 함께한 어머니 덕분에 자식들은 학교를 다니고 꿈을 이뤘다.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T 세인트가 처음 기계화를 시도했고 1825년 프랑스의 시몽이 특허를 얻었다.

현대에 사용되는 재봉틀의 기초를 발명한 이는 미국의 엘리아스 하우다.

병약한 그는 신혼시절 집에 누워서 하루 종일 삯바느질에 매달리는 아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반복적인 단순 작업인데 기계가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 윗실과 밑실의 결합으로 바느질이 이뤄지는 재봉틀의 기초를 창안했다.

1845년 어렵사리 설명회를 열어 자신의 재봉틀을 소개했지만, 단 한 대도 팔지 못했다.

1851년 미국의 I M 싱어가 표준형 가정용 재봉기를 개발하면서 비로소 재봉틀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의류생산의 공업화에 따라 각종 공업용 재봉기가 만들어지고 전문화·자동화되어 현재 그 종류는 5000종 이상을 헤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938년 재봉기제작소에서 재봉기 수리를 시작한 이후 1957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가정용 재봉 전용기계를 도입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다. 현재 국내에서 제작되는 재봉틀은 70% 이상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재봉틀 소리는 한국의 산업화를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수많은 젊은이, 특히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미싱’을 돌리며 더 나은 삶을 꿈꿨다.



60~70년대만 해도 재봉틀은 훌륭한 혼수품이었다.

재봉틀질을 잘해 아이들 옷은 물론 식탁보 등을 만드는 것이 알뜰살뜰한 신부의 기본 소양으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싱어사에서 나온 튼튼한 미제 재봉틀은 ‘싱가 미싱’으로 불리며 고급 혼수품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는 해진 옷을 골라 적당히 잘라낸 후 재봉틀로 조각조각 이어서 딸아이의 예쁜 원피스를 지어주고,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헝겊 가방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우리 엄마는 마술사.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을 만지면 옷도 나오고 커튼도 나와요”란 깜찍한 시를 썼다.

재봉틀 박음질 소리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견인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박노해 시인은 ‘미싱’에 묶인 공장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시다의 꿈’이라는 시에 담아냈다.

수많은 청춘들이 바람도 안 통하는 공장에서, 혹은 시장통의 좁은 방에서 삶을 견뎌냈다.

재봉틀 바늘에 손이 찔려도, 공업용 재봉기에 손가락이 잘려도 조금은 더 여유로운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 믿던 이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 보려던 청년 전태일은 불꽃으로 사라졌다.

경제가 급성장하고 어머니들도 세탁소나 수선집을 이용하면서 재봉틀은 한때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최근 재봉틀의 인기가 되살아났다.

그리운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불경기 탓이다.

97년 외환위기 직후는 물론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다시 싸늘해지면서 재봉틀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재봉틀 소리가 진동하던 동대문시장은 현대식 건물로 성형수술을 하는데, 아직도 어느 어두운 방에선 재개발 바람에 언제 쫓겨날지 몰라 마음이 타들어가는 어머니들이 재봉틀을 돌린다.

졸음을 깨려고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서로 싸우는 정치인, 뇌물 받은 검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