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의 신화, 채명신 장군.
채명신 장군, 워낙 유명한 분이라 이름은 들어 보았지만 실제로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요번에 돌아가시기전 남긴 유언을 읽고 마음에 진한 감동과 함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군요….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있는 묘역에 묻어달라”
아 ~ 진정 군인다운 군인이요, 장군중에 장군이시로구나…
월남전의 영웅이요, 장군중의 장군이 스스로 낮춰 사병들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이런분은 마땅히 우리가 높혀드리고 후세들이 기억하고 본받을 수 있도록 기념관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지 않을런지요…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 덕장(德將)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채명신 장군은 지,인,용 (智仁勇) 세가지를 모두 다 갖추신 분인듯합니다.
그분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에 이런 명장이 있었다는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솟아 오릅니다.
채 장군님에 대한 여러가지 글 중 한두가지 글을 발췌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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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설립 사상 장군 사병묘역 안장 첫 사례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 파월장병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을 유족에게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로 장군이 사병묘역에 안장될 전망이다.
27일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신분으로서 장군묘역 안장 혜택을 포기하고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사자와 함께 하겠다는 고인의 숭고한 뜻과 월남전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서울현충원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이날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유족들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했다.
서울현충원에 따르면 고인이 묻히게 될 묘지 크기는 사병과 같은 3.3㎡다.
비석 역시 사병과 같은 크기로 세워진다.
위치는 파월참전자회장을 맡아왔던 고인이 생전 추모행사를 해왔던 2번 사병 묘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출처: 동아일보
그런 놈의 규칙이 어디 있나.
적이 대포를 쏘아오는데 누구한테 물어보긴 뭘 물어봐?
적이 한 방을 쐈든 백 방을 쐈든, 날아오면 들이 갈겨야지.
대통령한테 물어보고, 뭐 확전을 자제한다구?
그건, 전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지.”
노병(老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월남전 주월한국군 사령관, 맹호부대 부대장이었던 채명신 장군을 만나 최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태에 대해 막 묻던 참이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군은 확신을 갖고 빠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인생 만 84세의 서리가 내린 호랑이 눈썹이 순간 움찔하며 부르르 떨었다.
“교전규칙이란 건 가이드라인일 뿐이야. 승리는 누가 빠른 속도로 갈기느냐에 달렸어. 북한이 다연장로켓 끌어낼 때 뭐했어? 잘 감시하고 있다가 도발할 기미가 있으면 즉시 타격 해야지. 천안함 사건은 아주 큰 전투행위였어. 말단 지휘관들이 충분한 대비를 못 한 거라 봐야지.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이런(연평도) 일은 없잖아? 책임은 노무현 김대중이 져야돼. 2004년 김충배 육사 교장이 예비생도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고 깜짝 놀랐어. 아, 글쎄 34%가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라고 하잖아? 놀라서 정신교육 예산 달라고 했더니 그걸 못하게 막았단 말야.”
채 장군은 김관진 신임 국방장관의 등장을 반겼다.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다시 장군의 말이 빨라졌다.
“이번 국방장관이야말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는 지휘관 아닌가. 아주 잘한 거야. (북한이 한 번 더 도발하면 교전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위권 차원에서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김 장관의 소신은) 군인으로서는 당연한 거지. 이제 군을 국민들이 믿고, 국회의원들도 밀어줘야 해. 다음번엔 본때를 보여야지. 북한은 우리가 안 가진 걸 갖고 있어. 핵도 그렇고, 화학가스나 생물학병기 같은 거 말야. 그거 장사정포에 장전할 수 있거든. 수도권을 삽시간에 공격할 수 있는데, 우리 단독으론 막을 힘이 없어. 그래서 미국과 같이 해야 하는 거야. 세계 2차대전을 승리를 이끈 뒤 영국의 처칠 수상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다’고. 히틀러도 처음에 조금씩 유럽 인접국들을 도발했거든. 그때 단호하게 응징하지 못하고, 공상적 화평주의에 젖은 연합국 지도자들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는 거야.”
그는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 월남한 뒤 1947년 육사 5기로 입교, 1972년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24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6·25 전쟁 때는 백골병단 부대장으로 게릴라전을 이끌며 청년장교로 전장을 휩쓸었고, 39세 때 일약 수도사단장(맹호부대) 겸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돼 최초의 파병군대로 베트남전을 치렀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들다는 전쟁을 두 번이나 그것도 직접 전투현장에서 체험하고 지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전투와 전투 속에’ 살아남은 ‘야전의 사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전쟁광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다.
노(老)장군의 전쟁관을 물어봤다.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장군께서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뭡니까?
“흔히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 그 자체는 잔인성과 잔혹성 면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간활동이야. 나는 전쟁을 죄악시하고 혐오해요. 그러나 전쟁의 본질을 알려고도 않고 평화를 부르짖는 것 또한 대단히 우려합니다. 평화주의가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봐왔고, 내가 하려는 말도 그런 거예요. 나의 전쟁 체험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전쟁을 어떻게 회피하며,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서 이겨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 아마 생존한 한국군 중 가장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 나일 거야. 나를 전쟁과 인연 깊은 사람으로 볼지 모르지만, 처참한 전쟁을 해봤기에 단연코 이 땅에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평화주의자보다 전쟁을 혐오하고 저지하는데 앞장설 겁니다.”
―월남전을 회고해볼까요? 그때 제1원칙으로 삼았던 작전의 요체는 뭐였습니까?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였어. 내가 이 원칙을 한국군에게 주지시키자, 미군과 월남군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 우리 연대장과 대대장도 반대했어.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군대 같은 인상을 준다는 거였어. 하지만 이건 내가 6·25 게릴라전을 통해 몸소 체득한 것이요. 미군은 월남에서 ‘서치 앤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 전략을 썼어. 탐색해서 때린다는 거였지. 하지만 나는 ‘세퍼릿 앤 디스트로이(Separate & Destroy)’ 전략을 구사했지. 적과 양민을 분리시킨다는 개념이야. 시민과 군대는 물과 고기의 관계야. 물이 중립만 지켜줘도 승리할 수 있어. 인민(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요체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미군과 독립된 작전지휘권을 쟁취했던 일화도 유명하던데요.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한 원인 중 하나는 미국 정부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는 거야. 당시 험프리 부통령이 ‘월남 인민이 냉장고만 갖게 되면 전쟁은 안 할 거다’ 이렇게 망발을 할 정도였지. 물론 월남 인민들은 가난하고 늘 상처투성이였지. 한국 군의관들이 항생제를 발라주면 싹 나으니까 하느님 같이 모셔요. 왜, 그 해방 직후에 다이아진 같아. 만능통치약이야. 하지만 대민지원이란 게 물건이나 갖다 주는 게 다가 아니거든. 마음을 얻어야해. 국가 전략 자체가 잘못됐으니 그 아래 군사전략도 잘못됐다, 이렇게 비판했지. 박정희 대통령이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맡기겠다고 했데. 내가 ‘안 된다, 개죽음당한다, 그렇게는 못 한다’고 대들었지. 각하가 곤란해하더군. 브라운 대사한테 벌써 다 이야기했다는 거야. ‘각하 마음대로 해놓고 지금 어떻게 뒤집습니까?’ 막 화를 냈더니 ‘나중에 독자 전작권 행사가 옳다고 주장해보시오’ 이래. 그래서 미군 장성회의에 가서 30분간 일장연설을 했지. 세계최강의 부대가 세계최강의 B52 지원을 받아 3개월 작전해서 월남부락 하나 장악한 거 있느냐? 이 전쟁을 몇십 년, 몇백 년 끌고 갈 거냐? 당신들은 이틀이면 월남 전역을 쑥대밭 만들 능력이 있지 않느냐? 이 복잡한 정치전쟁에서 유엔군이나 월남군 하의 지휘라면 명분이 있겠지만 우리가 미군 지휘로 들어가면 월남전 청부전쟁이라는 소리 듣지 않겠느냐? 물론, 당신들 덕분에 한국군도 있는 거다. 100% 맘대로 하는 게 아니고 협의해서 할 테니 작전권을 달라. 이랬더니 장내가 조용하더군. 다들 한국전 참전 장군들이야. 그중에서도 라슨 장군이라고 제일 까다로운 이가 있었지.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악수를 청하더군. 전부 다 해결되는 순간이었어.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권, 이게 없었으면 개죽음당했겠지. 적은 아카보 자동소총인데, 우리는 단발 M1소총이야. 나중엔 독자적 헬기, 탱크도 필요하다고 했지. 이 얘긴 너무 기니까 천천히 하도록 하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뭔가요?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찍은 사진 같은데….
“1967년 장제스 총통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어. 그때 찍은 기념사진이지. 장 총통이 ‘채 장군은 월남전을 어떻게 하고 있소?’ 하고 묻더구만. 내가 ‘70% 대민, 30% 전투’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랬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참 잘하는구려. 나는 국공합작이 끝난 뒤 마오쩌둥(毛澤東)과 중원을 놓고 다툴 때, 카이로다 뉴욕이다 프로펠러기로 며칠씩 돌아다니다가 그만 대민관계를 뺏겨버렸어요. 그래서 이렇게 대만으로 쫓겨난 거요’라고 고백하는 거야. 그 길로 친해져서 방문일정 내내 대환영을 받은 기억이 나네.”
―6·25 때 게릴라 전투 중 적진에서 홀로 국군 복장으로 인민군 정찰대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하에 성공했던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담대한 것은 원래 집안 내력인가요?
“글쎄, 선천적으로 타고 났나 봐. 겁난다, 거리낀다, 뭐 이런 건 없어. 부하들을 모두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국군 복장 그대로 마을을 불쑥 찾아가 ‘내가 당 직속정찰대인데, 여기 당 세포위원장 어디 있느냐’ 호통을 쳤지. 빨갱이 집만 골라 다니며 잘 얻어먹고 남하에 성공했지. 1951년 강화도에 도착하고 보니 상륙결사방위소년단이란 젊은이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설쳐. 남로당 빨갱이 천지였지. 충남 당진에 상륙해서 간신히 살았어.”
―주월한국군사령관을 끝내자마자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등지로 특명전권대사를 3번이나 역임하며 해외로 전전하셨어요. 이후에도 미 하버드, 버클리대와 일본 게이오(慶應)대 등을 돌아다니셨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설도 떠돌았는데, 진실은 뭔가요?
“하하. 그런 게 있었나? 내가 스웨덴 대사 가자마자 박 대통령이 계엄령과 유신을 선포하긴 했지. 나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두 분만 대통령으로 꼽고 있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각각 과오가 있지. 하지만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한 자유민주주의와 국력강화의 기초를 닦은 분들이야. 과도 있지만 공도 있어. 100점 만점으로 치면 한 85점, 70점쯤 될까. 물론 내 맘대로 점수지. 하하.”
출처: “어설픈 평화주의가 오히려 전쟁 부추길 때 많은 법”
1969년 5월 4년간의 주월 사령관 임무를 마치고 2군사령관으로 명령받아 임무 중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그는 10월 유신 선포를 앞에 놓고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일단도 언급했다.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71년 연설에서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입에 침도 마르기전 정권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중플레이입니다. 무슨 명분으로 그러십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고 했다.
그러면서 “이 때 정치생명의 끝이라는 말은 부하의 손에 죽게 된다는 그런 뜻의 말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모든 사람이 4성 장군으로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4성 장군이 되지 못하고 예편한 것과 관련해서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채 장군이 현역에 있으면서 4성 장군이 되면 참모총장도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신체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이후락씨 측근이 대통령께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채 장군은 예편 후 스웨덴 대사로 나간 것은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0월 유신 선포는 그가 대사로 나간 이후 선포됐다.
1972년 5월 2군사령부 연병장에서 간소하게 전역식을 하고 많은 장병들의 눈물의 환송에도 꾿꾿하게 참았다가 막상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채명신 사령관은 “나에게 맞는 건 군인밖에 없다. 다시 한다 해도 최전방 지휘관을 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군인은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하는 군인은 맞지 않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공짜가 아니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쟁이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국방 대비태세의 중요성을 후배들에게 전한 그는 “내 고집, 내 인생관대로 살았다는 그런 평가를 받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출처: 죽을놈은 월남서도 죽고, 국내서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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