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세운 동상
1939년 12월 7일 오전 11시 옌지(연길) 서(西)공원에서는 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과 일제 주요 인사, 친일 인사 등 수천 명이 참가한 이 행사는 한 사람의 동상과 기념비 제막식을 위해 모여 있었다.
당시 신문에는 이 행사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주국 치안 숙청의 공로자이요, 동아 신질서 건설의 공로자인 고 관동군 촉탁 겸 협화회 중앙본부 촉탁 김동한 씨의 영구불멸의 위대한 공적을 영원히 기념할 김동한 동상과 간도협조회 기념비는 (…중략…) 위대한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하사품 전달식을 이소 옌지 헌병대장으로부터 거행한 다음(…후략…).”
-<만선일보> 1939년 12월 10일 자 ‘고 김동한 씨 동상 제막식 성대 거행, 만선 대표 수천 명 참렬’
정리하자면 김동한이라는 사람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는 행사가 열렸고, 일본 헌병대장이 하사품을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기사에는 기념사업회 등이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김동한에 대한 기념사업회도 있는 듯 했다.
▲ 연극 <김동한> 공연 모습./<만선일보> 1940년 2월 11일 자 조간 2면
일제강점기 전후로 한반도와 만주에 숱한 친일파들이 있었지만, 일제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우대받은 사람을 찾기는 극히 힘들다.
이 뿐만 아니었다.
일제는 김동한에 대한 희곡을 공모해 김영팔(혹은 김우석)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고, 그 희곡으로 연극 <김동한>을 제작했다.
이 연극은 1940년 2월 11일 일본의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해 만주국 수도 신징의 협화회관에서 대규모로 상연됐다.
도대체 김동한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일까?
변신의 귀재
김동한은 1892년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하서리 3번지에서 태어난다.
평양대성중학교를 나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 고향 선배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를 따라 간도로 이주했다.
1911년 4월 러시아 장교 육성학교인 하바로프스크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4월 이르쿠츠크사관학교에 입학해서 1916년 3월 졸업했다.
1916년 러시아 군 이르쿠츠크 보병 제27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라루스 민스크지역에서 활동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백군(러시아 혁명 반대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 트로츠키의 신임을 받아 그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가운데 선두에 나섰다.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 고려여단 검사단 위원, 적위군 조선혁명군 장교단 연대장을 역임했다.
1921년 5월 4일 소련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공동의장에 추대되면서 조선인 공산주의자 가운데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1922년 6월 20일 그는 반유대주의 운동에 참가한 죄로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석방된 1923년, 중국 군벌 수장 오패부 휘하로 들어간다.
오패부 휘하에서 그는 중소변경지구(중국-소련국경지역) 제1육군사령관으로 활약한다.
1924년 연해주에서 소련 당국에게 일본인 밀정 혐의로 체포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경위로 체포되었고, 소련은 왜 일본에게 넘겼고, 일본은 왜 조선으로 데리고 와 그를 풀어줬는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잡한 당시 정세 속에서 그 역시 위태로운 줄타기를 거듭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0~20년대 그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면, 초기에는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자 러시아군에 투신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에 투신했고, 다시 중국 군벌 휘하에 있다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김동한은 수완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1일 자 에 실린 기사에서 그는 “정치적 수완가 김동한 씨”로 소개됐고 만주국 삼림경찰대장 이응범도 그를 “만주 넓은 뜰에서 발 넓게 활동하던 정치적 수완가”로 표현했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정통하고 일본어도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1일 자에 실린 김동한 사진과 관련 기사.
그런 그가 1925년 조선에 들어온 후 ‘극렬 친일’로 마지막 변신을 했다.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김동한은 국내에 들어온 직후 고향 단천군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건설회사를 하면서 나진 지역에 항구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이는 일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26년 12월 21일 단천농민연합회를 출범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1928년 1월 지역 유지들과 함께 단천에 사회단연합회관 모금운동에 나섰고, 1928년 3월 30일에는 단천기자단 의장을 맡았다.
1928년 6월에는 기근구제회라는 이름으로 빈민구제단체를 설립한 것을 끝으로 국내 언론지상에서는 한 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해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시작했다.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후방기지로 건설하고자 했다.
특히 만주 동부지역에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는 항일 조선인 세력, 중국공산당 세력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오랜 시간 만주지역 주민들과 항일세력은 긴밀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고, 일제는 이들의 연대를 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제는 1932년 8월 7일 항일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소위 ‘해란강 대학살 사건’을 일으켜 주민 수천 명을 살해했다.
더 나아가 1933년 11월 하순부터 이듬해 봄 까지 2차 학살을 자행했으나 만주 주민의 원한을 사 항일유격대는 오히려 세를 불렸다.
특히 중국인과 조선인은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고 함께 조직을 건설하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결국 일제는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항일세력 간 내분을 일으켜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가 선택한 사람이 김동한이다.
“항일세력 수천 명 투항시켜”
김동한은 조선인 출신으로 러시아, 중국어도 잘할 뿐 아니라 과거 화려한 이력으로 폭넓은 인맥과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일제에 대한 충성심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는 공공연히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했다.
1934년 9월 6일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연길헌병대장 가토 중좌와 연길독립수비대장 다카모리 중좌는 김동한을 내세워 간도협조회를 창설했다.
간도협조회는 겉으로는 “아시아주의 정신을 배양하여 만주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천명하고, 만주국에 협조하는 조직으로 위장했다.
일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간도협조회는 김동한의 수완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설립 1개월 만에 회원 수가 1000명을 넘어섰고, 1년 뒤인 1935년에는 6411명으로 늘어났다.
간도협조회장은 김동한이며, 대부분의 간부들은 항일운동 경력이 있거나 공산주의 활동 전력이 있는 조선인이었다.
변절자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간도협조회는 산하에 특별공작대와 의용자위단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항일세력 내에 침투해 내분을 일으키거나 때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해 항일세력을 분쇄하는 집단이다.
1934년 12월 특별공작대 부대장인 류중희는 정찰을 통해 연길현 소태평구 계수동 5호촌에 있던 항일지도층 13명을 체포했다.
1935년 1월 24일 특별공작대 분반장을 맡은 강현묵이 제공한 정보를 따라 일제는 군을 투입해 중국공산당 연길현 조양천지부와 황백동지부를 파괴했다.
1935년 10월 2일 돈화현 간도협조회 공작원인 김남길이 제보한 정보에 따라 일본군 토벌대는 항일유격대원 20명을 습격했으며, 9일에는 김남길이 항일유격대 삼합부대가 이전한다는 정보를 일본군에게 알려줘 이 부대를 습격했다.
1936년 7월에서 9월까지 정보원을 대거 파견해 천보산 광산 골짜기, 유수천 등지에 산재해 있던 항일유격대를 습격해 많은 유격대원들을 체포하고, 상당한 물자를 빼앗았다.
▲ 항일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 동태를 감시한 밀정의 보고서./독립기념관
간도협조회는 일정 수준의 무력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전투는 직접 치르는 것도 많았다.
불과 9개월 만에 간도협조회는 중국공산당 지하당 조직과 연락소 170여 곳을 파괴했다.
1935년 10월 회장 김동한은 직접 공작원을 데리고 왕청현에 있던 중국공산당 4개 지부를 파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1936년 2월 20일에는 항일유격대원 50명을 함정으로 유인해 투항시켰다.
7월 7일에는 돈화현에서 동북항일연군 25명을 사살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일제에 큰 도움 줘”
또한 간도협조회는 항일세력들의 심리적 약한 고리를 노려 선전강연, 삐라 살포 등을 통해 그들을 유인하거나 투항시켰다.
이때 거물급 인사는 김동한이 직접 담판을 지어 집단으로 투항시켰다.
이렇게 김동한의 활약으로 투항·체포된 인원이 최대 2500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1934년 동만주 지역 항일유격대원 숫자가 1253명에 불과한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 유격대원이 아닌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혐의를 뒤집어 씌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동한은 투항 받은 자들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했다.
그들을 광산이나 벌목노동자 속에 침투시켜 정보원으로 활용하거나, 간도협조회 회원으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또한 헌병대의 협조를 받아 공작원들에게는 매월 25~30원의 수당을 지급했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2가마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당시 경제력이 빈약한 만주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하지만 김동한과 간도협조회의 가장 큰 ‘공’은 따로 있었다.
당시 만주지역 항일세력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함께 조직을 만들고,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제와 싸웠다.
김동한은 이 점을 노렸다.
1935년 1월 초 간도협조회는 허기렬, 허진성을 파견해 항일세력인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 식량운수책임자인 한영호가 아직 복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이용해 내부 분열책을 쓰기로 했다.
이들은 보초병을 때려눕히고 총 2자루와 수류탄 2개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한영호와 관련이 있는 척 슬쩍 말을 흘렸다.
이 때문에 한영호는 돌아오자마자 중국인 ‘동지’들에게 온갖 고문을 당하고 결국 자신이 민생단원이라고 허위 자백했다.
민생단은 일제가 만든 친일조직이었다.
한영호는 고문에 의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장인 주진과 제1연대장 박춘 등 8명도 민생단 요원이라고 허위 자백했다.
항일단체 조선인 주요간부가 친일조직원이라는 말에 만주지역 항일세력은 발칵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항일조직 안에서 조선인은 무조건 민생단 혐의를 몰아붙여 고문하고 조직원을 대라고 강요당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던 참이었는데, 김동한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 항일여성유격대원들.
민생단 사건으로 항일세력이 내분에 휩싸이는 것을 본 김동한은 이를 더욱 부추기고자 온갖 공작을 벌였다.
예를 들어 김동한은 중국공산당 왕천현 서기인 송일에게 편지를 남겨 “전번에 이야기한 유격구에 관한 비밀조사보고는 새로 파견한 공작원과 면담하기 바란다”고 적었다.
이 편지를 고의로 중국인에게 발견되도록 하였다.
이를 본 중국공산당은 바로 송일을 총살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받은 충격이 어땠는지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중국공산당 동만주특위 기관지인 <양조전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당과 공산당 청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부녀 조직과 아동 조직에도 들어왔다. (…중략…) 일제의 묵인 아래 형형색색의 조선인 민족주의자, 파벌주의자가 모두 주구단(친일세력) 앞에 모여 민생단 골간이 됐다.”
아마 당시 항일활동을 하는 중국인에게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이 민생단 혐의로 보였을 것이다.
민생단 혐의를 받으면 대부분 고문을 받고 총살당하는 수순 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또 활용해 김동한은 민생단 혐의를 받고 있는 인사들에게 접근해 이들을 투항시키거나 변절시켰다.
당시 민생단 사태로 죽은 조선인 항일인사만 최소 400명에서 최대 2000명에 달하고 투항한 숫자도 상당했다.
그야 말로 항일운동에 엄청난 타격을 준 것이다.
그리고 만주 내 중국인과 조선인을 분열시킴으로써 항일연합전선에도 치명타를 입혔다.
일제가 조선인 김동한을 우대하고 영웅시 하는 배경에는 이런 엄청난 활약을 인정해 준 것이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도 김동한이 등장하는데, 그는 대지가 700평이 넘는 대저택에 경비원들과 경비견을 데리고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협화회 중앙본부 모습.
1936년 7월 10일 김동한은 일제로부터 훈6위 경운장을 받았으며, 1936년 만주지역 모든 친일세력을 총 결집한 만주국 협화회가 생기면서 간도협조회는 1936년 12월 협화회에 흡수 합병된다.
김동한은 만주국 협화회 삼강성 특별공작대 부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김동한의 수법은 함경북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1937년 12월, 김동한은 동북항일연군(줄여서 '항일연군'이라고도 한다. 중국-조선인 연합군으로 김일성도 항일연군 소속이다)제8군 1사 정치부 주임 김근을 투항시키려 하였다.
김동한은 김근과 서신을 여러 차례 주고받다가 심복을 보내 담판을 짓게 했다.
김근은 김동한과 직접 대면 담판을 짓자고 요청했다.
김동한은 자신만만하게 김근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미 이런 식으로 투항한 인사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김동한은 12월 7일 약속대로 통하현 일본인 경찰대장과 경무국장 그리고 수행인원 등 13명을 거느리고 김근과 만나기로 한 비밀장소에 나아갔다.
그러나 이는 김근의 함정이었다.
김동한과 수행원 13명은 모두 김근이 매복해 놓은 동북항일연군에 의해 사살 당했다.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김동한을 죽인 김근은 그 목을 잘라 통화현성 성문에 걸어 놓았다.
만주 항일세력들이 치를 떨게 만든 김동한은 이렇게 죽었다.
김동한의 후예, 간도특설대
김동한은 이렇게 죽었지만, 일제로서는 얻은 것이 매우 많았다.
항일세력 내 침투하는 방법, 그들의 약한 고리, 민족감정 활용 등 다양한 전략 전술을 김동한에게서 배운 것이다.
조선인 특무조직의 효용을 알게 된 일제는 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938년 9월 15일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로 간도특설대가 창설이 결정됐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 3월 정식으로 발족했다.
간도특설대는 장교 중 절반 가량이 일본인일 뿐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으로 이뤄진 부대로 그 규모는 300~350명 선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가진 18~20세 청년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3년 동안 복무하고, 자신이 원하면 만주국 하사관이나 장교로 승진할 수도 있다고 선전했다.
간도특설대는 철저하게 친일사상교육을 받았다.
당시 특설대원들이 매일 불렀다는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ㅡ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ㅡ
특설대원은 철저하게 장교와 복종하는 법을 배웠고, 훈련 또한 엄정해서 사격대회 등에서 다른 부대를 누르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간도특설대는 전투·토벌 보다는 첩보·정보 부대에 가까웠다.
간도특설대가 가져온 정보는 일제가 1940년대 초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토벌 중인 간도특설대 모습.
상상초월 잔악행위로 악명 떨쳐
1939년 4월 간도특설대는 첫 번째 임무에 나서게 된다.
안도현에 있는 동북항일연군토벌에 참가해 실전을 체험했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일본군과 함께 작전을 펼치거나 첩보를 수집하는 일을 주력으로 삼았고, 때에 따라서는 단독으로 작전을 행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가 가는 곳 마다 악명이 높았다.
역사학자 필립 조웰은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언급했다.
간도특설대는 첩보부대에 가까웠지만 토벌전에서는 가는 곳 마다 온갖 잔악행위를 일삼아 악명을 떨쳤다.
따라서 간도특설대는 토벌을 주로 한 부대로 오인되기도 한다.
간도특설대의 잔악행위 중 알려진 것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939년 5월 특설대는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해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주민이었다.
특설대 장교들은 이 사람을 칼로 찌르고 불에 태워 죽였다.
-1939년 7월 특설대는 ‘천보산 금광’이 항일연군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현에서 항일연군을 추격하던 중 항일연군 병사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간을 도려냈다.
당시 일본군은 항일병사를 잡으면 의료용 메스로 산 채로 배를 갈라 생간을 꺼내는 ‘전문병사’가 있을 정도였다.
특설대에도 이런 문화가 이식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겨울 안도현에서 항일연군 여성 병사 2명(4명이라는 설도 있음)을 체포했는데, 강간을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모두 살해했다.
-1944년 4월 특설대는 하북성 유수림자 인근 한 부락을 습격해 마을 패장(촌장)을 불러 놓고,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소통한다며 칼로 찔러 죽였다.
특설대 일본군의관은 죽은 패장의 머리를 베어 가마에 넣어 끓인 다음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1944년 5월 역시 유수림자 인근 부락에서 40대 남성을 붙잡아 사격장으로 끌고 가 사격 연습을 했다.
이 때 밤만 되면 부락에 나타나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
-1944년 5월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수사를 하다 과거 항일운동을 한 주민 2명을 체포해 목을 잘랐다.
팔로군과 교전 중 죽은 특설대원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1944년 10월 하북성 석갑진 부근 마을에서 특설대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이 도망을 쳤는데, 특설대원들은 마구 난사를 했다.
한 임산부가 총에 맞았는데 특설대원들은 그녀의 배를 갈라 태아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1944년 9월 팔로군 토벌에서 패배한 특설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20호에 달하는 주민의 집을 불태우고 2명의 주민을 칼로 찔러 죽였으며 마을의 돼지 2마리를 잡아갔다.
특설대원들은 자주 마을을 약탈했다.
-하북성 사진집 일대에서 특설대는 36차례 토벌과정에서 주민 103명을 살해하고 62명을 체포했다.
이때 중국공산당 팔로군 환자 6명을 생포했는데, 고문을 하고 모두 죽였다.
이 외에도 체포돼 고문을 당한 사람과 재산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한 주민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간도특설대는 토벌보다 첩보가 주 업무였고, 때에 따라서는 사복을 입고 마을을 정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숫자는 총 172명에 달했다.
특설대원이 300명 내외인 점을 살펴보면 그 숫자가 적지 않은 셈이다.
1945년 3월 21일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간도특설대원들의 공을 치하에 대원 가운데 175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조선인이 167명이었고 일본인이 8명이었다.
1945년이 되면서 만주지역 항일연군의 거의 다 토벌됐고 특설대의 임무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제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소련의 침공과 팔로군(중국공산당 계열 군대)이 봉기하면서 특설대는 토벌전에 다시 나섰다.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선언도 알지 못한 채 팔로군 토벌전에 매진하고 있었다.
8월 20일 팔로군 토벌을 하다 팔로군인들이 일제 패망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특설대원들은 서둘러 진저주로 퇴각하고 8월 26일 부대 해산식을 열었다.
당시 일본인 장교들은 이탈하고 없었고, 선임장교인 김백일 상위(대위급)가 각 대원들에게 여비를 주면서 해산을 시켰다.
한편, 이 소식을 모르고 있던 특설대 신병보충대에 있던 훈련병들은 8월 24일 밤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면 도주했고, 8월 31일에 이르러서야 부대를 해산했다.
만주의 친일파 군상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고 만주국을 세우자 조선인들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렸다.
만주국이 비록 일제가 세운 허수아비 나라지만 일단 형식상으로나마 국가체제를 갖춰야하고, 또 만주를 배후기지로 삼아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일제의 전략 때문에 만주에는 다양한 인적 자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주는 그야말로 온갖 친일파 군상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이 가운데 일제를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앞서 언급한 김동한이었다.
김동한 이외에도 만주지역에서 일제를 위해 일한 주요 인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최남선 ㅡ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았던 사람이다.
출옥 이후 점차 친일로 변해 1928년에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식민 역사관을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거쳐 1938년에 만주에서 친일 신문 <만선일보>와 <만몽일보> 편집고문을 맡았다.
1938년 만주국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해 1943년까지 강의를 했다.
1943년 11월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꾸준히 했다.
이범익 ㅡ 구한 말 관직에 오르기 시작해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을 하면서 일본과 연을 맺었다.
1929년 강원도지사에 임명됐으며 1931년 고등관 1등으로 승진해 조선인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최고위직에 올랐다.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국은 간도지역을 ‘간도성’으로 승격시키고 이범익은 간도성 도지사로 취임했다.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납북됐다.
이선근 ㅡ 개성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있다 1937년 만주 만몽산업주식회사 상무이사로 일했다.
관동군에 군량미를 공급했으며,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지냈다.
1954년~1956년까지 문교부(교육부) 장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총장, 영남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백선엽 ㅡ 만주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1943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고 일제 패망 당시 중위였다.
고향 평안남도에 돌아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치안대장, 조만식의 비서를 잠시 지내다 1945년 12월 김백일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김창룡에게 남로당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나섰고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한국군 최초로 대장진급을 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교통부 장관을 지냈으며 최근까지 그를 ‘명예원수(5성 장군)’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김백일 ㅡ 간도 출신으로 1936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가 1937년 12월 만주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간도특설대 창립 때부터 해산때까지 계속 근무하였고 직위는 상위(대위급)에 이르렀다.
해방 후 백선엽 등과 함께 월남해 국방경비대 3연대장,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장을 맡았고 1950년 말 흥남철수 당시 미군을 설득해 피난민을 수용한 공이 있다고 알려졌다.
1951년 대관령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2011년 5월 27일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됐다.
정일권 ㅡ 일본 육사 55기.
1943년 만주국 헌병대 사령(대대장)을 지냈다.
만주국 고급장교 양성학교인 군사고등학교 2기 합격자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졸업 직전 패망을 맞이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
1956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외무부장관이 됐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7개월 동안 국무총리로 재임했다.
배정자 ㅡ 김해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일본의 최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누볐다.
1919년~1920년 만주 일대를 정탐하고 도쿄에 가서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
이후 주로 만주와 몽골지역을 돌면서 조선인들의 거동을 염탐하는 한편, 항일인사 김일원 등을 설득해 전향시켰다.
<독립신문>에서는 그녀를 ‘요망한 여자’로 비판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에서는 그녀를 지명수배했다.
조선총독부 촉탁을 맡았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 여성을 동원해 일본군 위문대를 조직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석방됐으며 1952년 사망했다.
이 외에도 박정희,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이 젊은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는 등 만주는 출세를 위한 관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이들 대부분 만주국에서 출세를 하기 보다는 일제 패망 이후 남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면서 ‘출세의 꿈’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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