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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ang Muaythai GYM/제왕회관 이야기

인욕바라밀과 큰사랑

by Ajan Master_Choi 2017. 7. 13.



얼마전에 어떤분께서 사람들의 무례하고도 경우 없는 댓글과 악플에 지쳤다며 어떻게 해야 이것을 극복할수 있느냐고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힘내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또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라고 구체적인 답변도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질문에 대한 제 소견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할 때 항상 누가, 무엇을, 어떻게로 정리하여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흔하게 빠트리는 것은 누가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어떻게하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사실 철학뿐만 아니라 경제학이나 심리학등 대다수의 학문이 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요.

 

이런 방법은 사실 머리중심으로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당연하고도 익숙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 너머에 전혀 다른 가슴이나 존재 중심으로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살아보지 못하신 분들에겐 상상조차 안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살아가는 분들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미술을 하는 젊은 부인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편이 그것을 끊으라고 오랜기간 설득하고 다그쳤지만 그녀는 예술적 영감이 약해진다며 금연을 거부했습니다.

 

남편은 온갖 건강에 대한 금연이 좋다는 이론적 근거와 금연하는 법이나 방법들을 소개했지만 모두다 허사였습니다.

그녀는 그것은 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알지만 그림을 그릴 땐 몸이 그것을 강하게 요구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을 하자 그 사실을 안날 바로 담배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남편이 놀래서 그녀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끊었어?”

그랬더니 그녀의 답이 이랬습니다.

“어떻게로는 설명이 안돼, 그냥 끊기로 결정한거지.”

 

제가 이 사례를 드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존재중심 또는 가슴중심으로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어떻게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것은 뭘하든지 이유와 이해관계를 따지고 저울질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습관에 길들여진 결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안다고해서 다 그대로는 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만 행동하는 AI나 로보트가 아닙니다.

이것이 영혼을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는 ㅡ 어떻게를 좋아하고 따라다니는 ㅡ 머리중심으로 사는 것 너머에 ㅡ 결정하고 그대로 사는 ㅡ 가슴중심의 삶에 관심을

한번 깊이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내 온가슴과 전존재적으로 나의 삶을 한번 확 바꿔보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것에는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라든가 그럴만한 상당한 이유가 따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ㅡ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 ㅡ 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며 방법은 ㅡ 그냥 ㅡ 그러는 것이지 따로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너무나 학문적 논리와 세상을 지배하는 합리적인 머리중심적 삶의 방식의 습관이 들어서 그것과 다른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갖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나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자기의 신장을 떼어주는 그런 큰 사랑의 결정들이 과연 다 ㅡ 어떻게 ㅡ 만으로 설명이 될까요?

 

이것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며 존재의 유형입니다.

 

코끼리와 강아지에게 같은 일을 시키면 ㅡ 어떻게 하느냐 ㅡ 가 달라집니다.

새에겐 하늘을 나는 일이 ㅡ 어떻게 ㅡ 를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 물고기에겐 물속을 헤엄치는 일 역시 그러합니다.

 

가슴중심, 존재중심으로 한번 살기로 작정한다면 ㅡ 어떻게 하느냐? ㅡ 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하면 되니까요.

 

스스로 망설이거나 헤멤없이 결정하고 묵연히 그냥 하는 것, 우린 좀더 이런 삶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ㅡ 그런 댓글과 악플에 초연하기로 지금 결정하라 ㅡ 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누가) 그렇게 살기로 당장 <결정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즉 마음이 가진 습관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그 한계나 힘이 어디까지 인지를 전혀 모르는 정신과 마음을 가진 영적 존재들이며 저는 그런 인간속에 내재한 놀라운 정신력과 마음의 힘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가둬버린 익숙한 정신적 습관에서 놓여나 더 자유로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렸을 때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싸우며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커서 성장하면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어느 정도가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지만 마음과 정신은 그 성장 성숙에 한계가 없습니다.

이것을 종교에선 인욕바라밀(불교)이라거나 또는 큰사랑(기독교)라고 달리 이름 붙이고 그런 삶을 끝없이 지향할 뿐입니다.

 

저는 학문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방식과 과정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제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은 종교적인 정신력이나 영성들이 신비의 영역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인들에게 좀더 구체적이면서도 접근가능하도록 재해석되어 전달되는 것입니다.

 

온고이지신이란 말도 있지만 우리가 학문적 접근 그 자체만 고집한다면 오히려 학문의 본래목적을 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