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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유시민컬럼 : 윤석열과 무(無)지성의 시대, 비평의 어려움

by Ajan Master_Choi 2022. 12. 26.

“세계는 코로나19 대유행, 기후변화, 교역질서와 공급망의 재편, 식량‧에너지 부족, 무력분쟁 등 글로벌 난제에 직면했다. 개별 국가는 초저성장, 실업, 양극화로 인해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는 민주주의 위기 때문에 잘 작동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렸다.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는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이견을 조정하고 타협한다. 그러나 반지성주의는 집단적 갈등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각자 믿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며 다수의 힘으로 이견을 억압한다. 국내외의 위기와 난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정확하게 인식 공유해야 한다.”

누구 말인 것 같은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의례적 인사말 바로 다음에 했으니 취임사의 총론으로 볼 수 있다.
대통령이 한 말 그대로는 아니다.
취임사는 문장이 너무 어수선해서 대통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했다.
이 대목은 정도가 특히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잠깐 ‘빨간 펜’을 썼다.
발언 취지는 털끝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의심이 든다면 취임사 원문과 비교해 보시라.
대통령이 이 글을 읽을 리 만무하지만, 만약 읽는다면 연설문 작성 담당 실무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리라 믿는다.
오해는 마시라.
그러라고 ‘빨간 펜’을 쓰지는 않았다.
시민들이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려고 썼다.
대통령이 우리를 이해하지 않으니, 우리라도 대통령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윤석열 정부, 평가는 이르다

윤석열 정부 첫해 평가 토론 또는 대담에 나오라는 초대를 여러 곳에서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평가를 하기 어렵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아직 반년밖에 되지 않아서 데이터를 근거로 결과를 평가할 수 없다.
굳이 하려면 포부와 계획을 밝힌 말과 글, 정치적 행정적 행태를 보고 평가해야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말과 글이 큰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결국 남는 것은 행태밖에 없다.
그런 전제를 두고 윤석열 정부의 말과 글과 행태를 살펴보겠다.

대통령 취임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다.
취임식 시점 대통령의 내면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보여주는 총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를 강조한 것을 두고, 논리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든가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든가 하는 여러 비판이 나왔다.
그런데 나는 달리 생각한다.
대통령이 그렇게 옳은 말을 한 경우는 취임식 후에 한 번도 없었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대통령의 말까지 무조건 나쁘게 보진 말자.
적어도 취임사의 총론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첫째,
대통령은 해결해야 할 현실의 과제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코로나19 대유행, 기후변화, 교역질서와 공급망의 재편, 식량‧에너지 부족, 무력분쟁 등’이 중요한 글로벌 난제라는 데 누가 동의하지 않겠는가.
‘초저성장, 실업, 양극화’로 개별 국민국가들이 내부 위기에 빠졌다는 인식 역시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을 만큼 정확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안다고?
맞다.
누구나 안다.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을 대통령이 모른다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취임사는 대통령을 가리켜 몰상식하다고 하는 일각의 비난이 꼭 옳지는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우리나라의 미래, 결코 어둡지 않다.

둘째,
대통령은 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글로벌 난제 해결은 국제정치의 과제다.
개별 국가의 문제는 그 나라 정치의 몫이다.
그런데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는 대부분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한다.
중국만 예외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국제경제를 혼돈에 빠뜨린 러시아도 다수 국민이 마음먹으면 합법적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는 게 맞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글로벌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우리나라의 내부 과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반지성주의

셋째,
대통령은 정치가 무능한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명의(名醫)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민주주의는 지성주의와 합리주의를 요청한다.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이견을 조정하고 타협’하면 민주주의는 효율적이고 유능한 정치를 실현한다.
그러나 반지성주의는 ‘집단적 갈등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각자 믿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며 다수의 힘으로 이견을 억압’한다.
반지성주의가 대세를 이루면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정치는 무능해진다.
전적으로 옳은 말 아닌가.

넷째,
대통령은 올바른 처방을 제시했다.
반지성주의라는 사회적 질병을 퇴치하려면 자유의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 공유해야 한다는 처방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장을 지나칠 정도로 압축한 탓에 그 심오한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대통령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인간은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진리에 가깝게 가려면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권력 가진 자와 사회 구성원 다수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의견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모든 개인과 집단은 자신의 요구를 두려움 없이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대변하는 여러 정치세력은 상대를 존중하면서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절충해서 합의를 거두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수결로 하는 의사결정은 소수파를 충분히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완전한 정당성을 얻는다. 모두가 이렇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고 자유를 실천하면 반지성주의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가치와 이상에 대한 경멸

이 정도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독자를 위해 대통령 취임사의 반지성주의 항목에 더 상세한 각주를 붙인다.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언제 어디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1950년대 미국이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 교수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가 그 사실을 책으로 정리했다.
1963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다.
제1장 ‘우리시대의 반지성주의’에서 호프스태터는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전에는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미국 사회에서 자기비난과 상호매도를 의미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미국에서 비판적 지성이 처참할 정도로 경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일깨운 것은 무엇보다도 매카시즘이었다. 매카시가 끊임없이 비난을 퍼부은 대상은 지식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카시는 큰 사냥감을 노렸다. 늘 지식인을 표적으로 삼았고 지식인을 사냥할 때 추종자들은 특히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반지성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반지성주의는 단일한 관념이 아니라 많은 접점을 가진 다양한 태도와 관념의 복합체다.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하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적인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얕보는 경향이다.”

반지성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감정과 태도의 복합체다.
반지성주의를 어떤 말로 정의(定義)하든 반드시 포함하는 요소가 있다.
고귀한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의심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감정, 비판적 지성을 배척하는 태도다.
반지성주의가 국가권력과 결합하면 극악한 전체주의로 나아간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같은 독재자는 예외 없이 지식인을 박해하고 학살했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정권은 주로 지식인을 구금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심지어 미국도 그런 시대가 있었다.
매카시 상원의원이 종이쪽지를 흔들며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암약하는 소련 스파이 명단이 여기 있다”고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을 한 데서 시작한 반공주의 광풍은 여러 해 동안 미국의 지식인 사회를 목 조르고 이성적 토론을 중단시켰다.
공직사회부터 대학과 영화계까지 사회 모든 영역에서 빨갱이 사냥을 벌여 공포감을 조성했다.
야당과 국회와 언론과 시민사회가 대항한 덕분에 매카시즘 광풍이 오래 지속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 미국 사회는 헌법의 가치를 스스로 파괴했다.

무지성(無知性)의 시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 총론은 두고두고 음미할 가치가 있다.
단지 옳은 주장이라서가 아니다.
호프스태터의 표현을 차용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다른 사람을 민주주의 파괴자로 ‘매도’하려고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썼는데 결과는 ‘자기비난’으로 귀착했다.
그는 진영을 갈라 진실을 왜곡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사실이라 믿는다.
권력의 힘으로 이견을 억압한다.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짓밟는다.
반지성주의를 비판한 취임사의 문장은 윤석열 정부가 집권 첫 해에 저지른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바로 적용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 보여줄 정치 행정의 무능함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내가 근거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은 정적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제거하려고 국가의 강제 권력인 검찰권을 무기한 무제한 동원하고 있다.
‘바이든’이라는 말을 들은 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공영방송을 내놓고 위협한다.
‘날리면’이었다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텐테 대통령은 말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가족은 법정에서 뚜렷한 범죄 혐의가 드러나도 수사하지 않는다.
160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빚어졌는데도 사과를 거부하고 희생자의 이름을 감추었다.
치솟는 유가로 인한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화물노동자들의 요구를 경청조차 하지 않고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으로 취급했다.
대통령이 특정 법무법인 변호사들과 새벽 술자리를 가졌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로 부재증명을 하지 않고 고소 고발과 압수 수색으로 보도한 언론인을 위협한다.
윤석열 정부의 2023년 예산안이 ‘초저성장, 실업, 양극화’ 등 취임사에서 열거한 문제 해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민주주의에는 말이 중요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원시적 형태의 민주주의가 생겨났을 때부터 그러했다.
대통령은 말과 글로 비전과 계획을 밝히고 야당의 협조와 국민의 지지를 구한다.
이루려는 목표, 현재의 상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 예상 효과와 부작용, 부작용을 줄이고 효과를 키우는 데 필요한 보완책, 비용의 분담 등을 말하는 데서 모든 일을 시작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면 비평가는 분석한다.
현실 진단이 타당한지, 설정한 목표가 적절한지, 정책 수단은 합리적인지, 비용과 고통의 분담은 적정한지를 따진다.
일단 말과 글을 보고 비평하며 정책의 결과가 나오면 데이터를 근거로 다시 평가한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
취임사에서 자신의 입으로 매섭게 비판했었던 바로 그 행동을 한다.
알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르고 그러는 것이다.
모르면 말과 행동이 상충할 수 있다.
그것 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다.
‘무지성’, 그냥 모를 뿐이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야무지게 비판하는 언론인이 드문 것은 그 때문이다.
4월까지는 악플러처럼 대통령과 정부를 물어뜯었던 기자들의 비판정신이 5월 10일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반지성주의는 비평하기 쉬워도 무지성은 비평하기 어렵다.
네 번째 칼럼인데, 이번엔 참 쓰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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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과 무(無)지성의 시대, 비평의 어려움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세계는 코로나19 대유행, 기후변화, 교역질서와 공급망의 재편, 식량‧에너지 부족, 무력분쟁 등 글로벌 난제에 직면했다. 개별 국가는 초저성장, 실업, 양극화로 인해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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