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누구의 생일은 잘 얘기하지 않아요.
산 사람은 생일을 기념하는 법이고 죽은 사람은 기일을 기억하는 법인데 그래도 역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경우보다는 돌아간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전에 새로 밝혀진 것이기도 하니 유관순 누나의 생일은 기억해 봅시다.
우선 신화부터 걷어 냅시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건 사실 해방 이후라고 합니다.
일제 시대만 해도 유관순의 이름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1919년 기미년 3.1 항쟁 때 죽어간 7천 5백명 속에서는 유관순 이상으로 영웅시되어야 마땅한 이름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겠지만 해방 이후 남한을 손아귀에 넣었던 우익들에게는 그럴 수 없이 영웅시하기 좋은 조건에 있었다는 것도 큰 이유죠.
기독교인에 우익의 거물 조병옥의 고향 사람이었고 일찍 죽어서 변절하지도 않고 사회주의 따위에 빠지지도 않았죠.
나이도 얼마나 좋아.
“한국의 잔다르크”에 딱 걸맞게 열 일곱에 독립만세 부르다가 열여덟 우리 나이로는 열아홉 나이에 옥사했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싶어요.
유관순 괴담을 기억하세요?
나 초등학교 1-2학년 때 유명했습니다.
그 얼굴을 반을 가리면 남자 반을 가리면 여자로 보인다는 괴담으로부터 꼬리가 몇 달린 여우였다는 둥 사진의 반을 가리고 보 다가 별안간 초상화의 눈을 크게 뜨면 죽는다는 둥.
그런데 그녀를 남자로 보이게 만드는 사진의 정체는 사실 슬픈 사연이 서린 사진입니다.
그 사진은 감옥에서 찍은 거예요.
그리고 여자라고 사정 돌보지 않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 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의 사진이죠.
그러니 반을 가리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일만큼 그 인상이 험악했던 거죠.
충무공 이순신이 박정희에 의해 우상화됐다고 해서 그 빛남이 줄어들지 않듯 유관순도 그래요.
제가 2000년도에 3.1절 기념 아이템을 찾아 헤맬 때 유관순의 동기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1902년 생이 100세를 맞기 전이었으니 나이 아흔 여덟의 할머니셨죠.
그분은 유관순의 룸메이트였다고 합니다.
이미 치매가 와서 아침밥 먹었는지 기억도 못하셨지만 90년 전의 ‘관순이’는 명확하게 기억을 하더군요.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겁니다.
“관순이는 불쌍한 사람 보면 지나치지를 못했어. 뭐라도 쥐어 주거나 덮어 줬지. 우스개 소리도 잘하고 얼마나 명랑했다고. 화가 나면 충청도 사람답잖게 말도 따다다다 쏴 대기도 했고.”
애국소녀 이전에 독립운동의 아이콘 이전에 유관순은 정의감 넘치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는 청년 학도였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파고다 공원에서 감격 속에 읽혀진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그녀는 열정적으로 참여했어요.
당시 이화학당을 책임지고 있던 교장 프라이가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드러눕자 차마 그 위를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친구들 몇과 함께 담을 넘어 독립 만세를 부르던 열혈 소녀였지요.
만세 시위에 질려 버린 일본인들은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건 일본인들의 실수였죠.
독립만세의 바이러스를 조선 각지에 뿌려 놓은 셈이었으니까.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크게 실망합니다.
서울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동포가 만세 부르고 죽어가고 있는데 서울에서 코 닿을 천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니.
유관순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을 끌어들이고 고향의 교회와 유림들, 그리고 인근의 진천, 청주 등 다른 도시까지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지요.
아마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19년 음력 3월 1일 양력으로는 4월 1일 전날 밤일 겁니다.
캄캄한 밤 나이 열일곱의 소녀는 오늘날 독립기념관 근처의 매봉산 정상에 올라 봉홧불을 들어 올리지요.
이를 신호로 목천, 천안 ,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여섯 고을 24곳의 산봉우리에 봉화가 올랐답니다.
그때 소녀의 가슴은 터져 나갔을 겁니다.
"조선은 살 수 있다. 대한은 이렇게 불타오를 수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검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껑충껑충 뛰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저 산에도 그 산 넘어 또 산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만세시위로 골머리를 앓아 온 일본 경찰은 글자 그대로의 살인적인 진압에 나섭니다.
유관순의 만세 시위를 고무하고 도와 주었던 김응구는 일본도에 맞아죽고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습니다.
유관순은 옥에 갇힌 지 1년이 지난 1920년 열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구요.
만세 시위 1주년인 3월 1일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 부르다가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끝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토막이 났다는 건 좀 과한 소문이구요)
유관순의 생일을 맞아 ‘참여’라는 단어를 고민해 봅니다.
우리 나라의 국경일 가운데 저는 3.1절이 가장 값지고 가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예 근성이 충만하고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쓸 줄 모르는 비참한 백성들”
로서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없이 이웃 나라에 스르르 병합되어 버린 별 볼 일 없는 나라의 인민들이
“우리는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우리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
하며 미국, 러시아, 중국, 만주 등 그들이 살아가던 모든 곳에서 들고 일어났던 3월 1일은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일제의 통계만 봐도 사망자만 해도 7500명이 넘는데 그게 어찌 ‘운동’일라구요.
그리고 그 혁명은 평소에 전혀 그렇지 않아 뵈던 사람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은 참여로 물길이 되고 홍수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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