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우생학, 맹목적 과학 숭배가 낳은 재앙

by Ajan Master_Choi 2023. 1. 12.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19세기 영국의 사회사상가. 진화와 생존경쟁이라는 생물학의 원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시킨 사회 다윈주의의 창시자>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우생학(優生學, eugenics)은 서구 사회에 지우기 힘든 흔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우생학에는 '사이비 과학'의 요소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탄탄한 근거를 가진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우생학이 가져오는 사회적 해악에 대해서 이들은 무관심했다.
이런 무관심 속에 미국은 차별적인 이민법을 통과시켰고, 서구의 각국은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을 '거세'했으며, 독일 나치 정권은 장애인, 유대인 등 소수자를 무차별 학살했다.
우생학이 가져온 재앙은 사회와 정책이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고, 또 과학자들이 권력의 정치적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을 때 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비극이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생존 경쟁을 통한 자연선택이 생물 종의 진화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다윈은 자신의 주장을 생물학의 영역에 한정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 자유주의와 같은 사회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토지귀족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자연적(unnatural)인 계층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계층은 비자연적인 귀족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새롭게 부상하는 전문직업 계층(professional class)이라는 이념적 공세를 폈다.

이들은 사회의 상층부를 점하던 귀족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회의 바닥을 형성하던 노동계층과 극빈자층에 대해서도 이들이 사회에 짐만 지우고 있다고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사회 개혁가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진화의 생존경쟁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이 소멸되는 것이 자연 법칙의 순리라고 강조하면서, 약자를 돕는 복지 정책은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법칙에 역행하고 그 결과 '허약한 형질'을 퍼뜨리는 국가 정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프랜시스 갈톤(Francis Galton, 1822~1911) 찰스 다윈의 사촌이면서 우생학을 창시한 갈톤은 통계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지능의 유전,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다.>

우생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났다.
우생학을 나타내는 영어 eugenics는 well(잘난, 좋은, 우월한)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eu와 born(태생)의 의미를 지닌 genos의 합성어였으며, 따라서 eugenics는 글자 그대로 '잘난 태생에 대한 학문'(wellborn science)을 의미했다.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다윈의 사촌인 생물통계학자 프랜시스 갈톤이었다.
갈톤은 우생학을 "향상된 양육을 통해 인간의 유전체를 개선하는 학문" 혹은 "사회적 통제하에 다음 세대 인류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저하시키는 작인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했다.
갈톤은 또 우생학을 나쁜 형질의 유전을 최소화하는 노력의 '부정적 우생학'과 좋은 형질의 유전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의 '긍정적 우생학'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보듯이 우생학에는 처음부터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부문뿐만 아니라 선택적인 번식을 통해 인구의 질을 높이는 사회프로그램 혹은 공공 정책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갈톤은 초기에는

"몇 세대에 걸쳐 결혼을 신중하게 함으로써 천재를 배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는 긍정적 우생학의 주장을 폈는데,

후기에는

"평균 이하 월급을 받는 사람들의 자녀 수를 제한해야 한다"

는 부정적 우생학을 강조했다.

 

갈톤의 노력에 힘입어 영국에서는

1904년에 국립 우생학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곧이어 우생학 교육학회와 학회지가 창간되었다.

사회 부적격자는 거세하라: 극으로 치닫는 우생학의 논리

독일의 우생학은 인종 위생학(Rassenhygiene)이라고 불렸다.
독일의 인종 위생학의 시조는 19세기 독일의 생리학자 빌헬름 샬마이어(Wilhelm Schallmayer, 1857~1919)와 알프레드 플로에츠(Alfred Ploetz, 1860~1940)였다.
이들은 당시 독일이 외국과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한 청년들은 전장에서 전사하는 반면에, 징집에서 면제된 허약한 남자들이 고향에서 살아남아 2세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자들은 조만간 독일에 알코올 중독자와 신체 허약자만 남겠다고 한탄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생학이 허약자와 병자의 생식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엽에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우생학이 제도화되어 1904년에 우생학 학회지가 창간되고 1905년에 우생학 학회가 만들어졌다.

<1930년대에 나치의 월간지인 '신국민(New volk)'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포스터에는 "유전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우리 국민들 돈 6만 마르크를 허비한다. 시민들이여, 그 돈은 바로 당신들 돈이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독일의 우생학의 영향력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전면에 부상했다.
독일 우생학자들은 혼전 건강검사를 의무화하고 보건증을 교환하는 보건정책운동을 시작했으며,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몇몇 우생학자들은 독일 민족이 미래 지향적이고, 강인하며, 인내심이 많고, 철학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제일 우수하다고 설파했다.
이런 주장은 나치즘의 골간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는데,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우생학의 주장을 나치즘의 핵심 원리로 『나의 투쟁』에 포함시켰다.

독일 우생학은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가속화되었다.
1932년 프러시아 정부는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해서 '부적격자'를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그 다음 해에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강제 규정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는 30만 명의 허약자들이 거세당했다.
우생학자들은 불치병을 앓거나 정신병자, 백치, 정신박약자, 불구 아동의 삶을 "살 가치 없는 삶"으로 구분한 뒤에, 국가가 이들을 안락사 시킬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논리는 이들이 사회에 기여함이 없이 사회의 예산만 축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유아 안락사는 대규모 학살의 전주곡이었는데, 나치 정권은 1940~41년 사이에 약 7만 명의 정신병 환자들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결국에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기타 "바람직하지 않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제거했다.

책속으로
1930년대 독일 의학 교과서에 나온 문제
"우리나라의 정신 이상자들 중에 868명이 최소한 10년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하고, 260명이 20년, 112명이 25년, 54명이 30년, 32명이 35년, 6명이 40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하자.
개개인에 대해서 한 달에 18마르크가 소요된다면, 이 모든 정신 이상자들을 수용하는 데 드는 총액은 얼마이겠는가?
이 돈으로 매년 3000마르크를 버는 건강한 가정 몇 가구가 10년을 살 수 있겠는가?"

흑인, 유대인, 아시아인들은 아이큐가 낮다: 인종 차별주의와 결합된 우생학

미국의 우생학은 거세법의 통과와 인종 차별적인 이민법을 가져왔다.
미국 우생학 운동을 주도했던 우생학 기록국의 찰스 대번포트(Charles Davenport, 1866~1944)와 같은 생물학자는 정신박약자와 같은 사람을 거세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는데, 인디애나 주는 1907년에 처음으로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을 거세하는 거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을 통과시킨 주는 1931년까지 30개로 늘어났다. 거세법은 미국에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미국 우생학협회 로고. '우생학은 인류진화라는 자기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 우생학은 다양한 학문적 자원을 뿌리로 두고 자라난 나무라는 것을 상징한 그림이다.>

독일은 1932~33년에,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주는 1933년에,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는 1934년에, 핀란드는 1935년에 같은 법을 통과시켰다.
이때 제정되었던 거세라는 우생학적 방법은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행되었을 정도로 남용되었다.
미국 우생학의 또 다른 특징은 인종 차별주의와의 결합이었다.
대번포드는 폴란드인은 배타적이고 이탈리아인은 범죄형이라고 주장하던 인종 차별주의자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생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인종의 이민이 앵글로색슨의 미국을 위협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동유럽, 유대인,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의 이민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민자들의 낮은 아이큐를 공개했는데, 실제로 이들의 낮은 점수는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로 아이큐 테스트를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였다.

그렇지만 미 의회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앵글로색슨 민족의 이민을 독려하고 대신 유대인이나 동유럽, 아시아나 아프리카 민족의 이민을 제한하는 존슨이민법(1924)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당시에는 미국 우생학의 승리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사이비 과학이 낳은 가장 대표적인 폐해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미국에서 거세를 시행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주를 표시한 지도. 당시 많은 주들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사람들을 거세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우생학자들은 가난이 열성 인자로부터 나오며, 이들의 무능력은 유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선될 수 없고, 따라서 오직 거세와 같은 우생학의 방법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초래되는 문제는 교육과 같은 사회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모두 유전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우생학의 주장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데 인색했던 지배계급이 선호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생학은 보통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많다.
이들은 지배계급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조금씩 희생해서 공동체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에 털끝만큼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우행학적 방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또 우생학은

"인간의 삶이 공동체나 전체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될 때에 한해서 가치가 있다"

고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을 희생해야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강령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개인의 권리와 행복이 '전체'의 이름으로 희생당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폐해다.
사람들이 똑똑하고 건강한 자식을 원하듯이 한 사회가 똑똑하고 건강한 다음 세대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로 보인다.
그래서 우생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생학의 이론과 의도는 좋지만 거세나 인종 청소 같은 실천 방안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생학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항상 강제적인 법령, 물리적인 구금과 강제적인 수술, 대중 선전, 특정한 사회 그룹의 희생, 정상과 비정상의 엄격한 구분과 유지가 필요했다는 것을 간과한 생각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생학은 항상 폭력과 강제를 동반했고, 20세기의 역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속으로
미국 우생학자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의 『위대한 인종의 소멸』(1916)
약하거나 부적격한 사람들, 즉 다른 말로 해서 사회적 실패자들을 제거하는 강력한 체계는 지난 백년 동안의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으며, 지금 감옥, 병원, 정신병원을 가득 메운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
그 개개인은 양육되고, 교육되고 사회에 의해서 보호될 수 있다.
그렇지만 국가는 거세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그의 형질이 그에게서 그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세대들은 잘못된 온정주의가 낳은 짐을 더 많이 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거세라는 방법은 모든 문제에 대한 실질적이고, 자비로우며,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다.
이 방법은 범죄자, 병자, 정신이상자부터 시작해서 이 사회에서 살기에 허약한 사람들과 궁극적으로는 가치가 없는 인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하류 계층에 적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