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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여러 얼굴의 암스텔담, 그 민낯을 본다

by Ajan Master_Choi 2017. 11. 16.

한참 북유럽의 날씨가 좋은 9월 말 암스텔담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바쁜 일정 앞뒤로 틈을 내어 도시를 둘러보았다.

유럽의 거의 모든 큰 도시를 둘러보았지만 이렇게 독특한 여러 얼굴을 보여주는 도시를 보지 못했다.

다양한 색채의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라 하겠다.

튤립과 풍차가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이미지다.

하지만 암스텔담을 제대로 얘기하려면 그런 평화로운 이미지 이외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얼굴이 또 있다.



우선 상업과 무역의 도시다.

동양에는 화상이 있고 중동에는 페르시아(이란) 상인과 유태인이 있듯이 유럽 제일의 장사꾼은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이다.

문화적으로는 이 도시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미술계의 거장인 렘브란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빈센트 반 고호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사람 살림에 먹거리가 차고 넘치면 당연히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더불어 악의 꽃인 향락과 퇴폐가 함께 번성함을 막기 어렵다.

수백 년을 유럽 상거래의 중심지로 재화와 사람이 넘치던 이 도시에선 마리화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매춘도 이 나라에서는 합법이다.

암스텔담의 홍등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순례코스이다.

나도 역시 홍등가의 거리를 지나치지 않고 훑어 보았다.

글 후반부에 내가 본 홍등가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개의 나라 이름


암스텔담의 얼굴만 여럿인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부르는 이름도 영어로만 세 개다.

네덜란드 (The Netherlands), 더치 (Dutch), 그리고 홀랜드 (Holland).

알다시피 이 나라 땅은 바다 수위와 비슷하여 물을 풍차로 퍼낸다.

네덜란드라는 이름은 그 나라말로 낮은 땅 (Low land)이라는 뜻이다.

더치(Dutch)라는 이름은 이 나라 사람이 쓰는 말이 독일어 (도이치, Deutsch)의 사촌쯤 되어 불린 이름이다.

홀랜드는 원래 네덜랜드의 큰 도시 암스텔담과 헤이그가 있는 지방 이름인데 비공식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화란이 홀랜드를 음차한 이름인 것을 보면 이도 역사가 오래된 이름일 것이다.

근데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홀랜드라고 하면 그 지방 사람 아니면 싫어한단다.

우리도 대한민국을 서울경기라고 부르면 다른 지방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수로의 도시 암스텔담


도시가 바닷가에 인근하여 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형성되어 있다.

물길이 도시 안을 이리 저리 관통하여 지나간다.

암스텔담은 그리 넓지 않은 도시이지만 그 시내 수로의 길이가 대략 100km란다.

차가 다니는 길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 수로가 동맥과 모세혈관이 되어 물건을 실어 나르며 도시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이제는 관광객을 태운 유리천장 보트나 한가로운 개인용 레저 보트만 다닌다.



내가 묵었던 호텔 앞에도 수로가 있는데 폭이 좁아 한 화면에 양쪽이 모두 잡힌다.



예전 암스텔담 건물의 가치는 수로에 접한 면이 얼마나 넓으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오죽하면 그 폭이 1미터가 조금 넘는 창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건물도 있다.

수로에 잇닿은 면의 건물 벽은 앞으로 조금 쓰러져 있다.

아래 사진 가운데에는 기울어진 전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물이 있다.

전면 위쪽에는 삐죽이 튀어나온 돌출물이 보인다.

이 돌출물은 도루레를 걸고 물건을 수로에서 오르내리게 해주는 곤돌라 역활을 한다.

물건을 건물에 닿지 않고 쉽게 운반하기 위해서 전면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수로를 따라 걷다 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건물을 만났다.

지금은 현대적인 건물로 모습을 바꿨지만 예전 2차 세계대전 때는 저 모서리 건물 안에서 어린 십대 소녀 안네 프랑크가 살고 있었다.

2년 동안 숨어 살며 하루 하루의 생활을 일기로 적어갔다.

결국 나치에 발각되어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영국군에 의해서 수용소가 해방되기 불과 몇 주 전에 소녀는 쇠약해진 몸에 병이 걸려 죽었다.

종전 후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버지는 딸이 남긴 일기를 발견하고 이를 출판하여 세계에 알렸다.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남독을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이 책을 잡고 무던히 읽어 내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소녀의 섬세한 글쓰기가 내게 맞지 않았는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유럽 최고 장사꾼의 도시 암스텔담


1600년대 초부터 이 도시의 사람들은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향신료를 운반해서 유럽에 판매하는 인류 최초의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회사의 이름은 더치동인도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 또는 줄여서 네덜란드 말로 VOC).

이 회사 하나의 거래 물량이 당시 다른 모든 유럽 국가의 물동량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부를 쌓아가던 이 회사의 주식을 암스텔담의 일반인들이 나누어 소유하였었다.

덕분에 암스텔담의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풍족한 삶을 누렸다.

 

이 회사의 주식거래로 시작된 인류 최초의 주식시장이 암스텔담에 세워졌고 곧이어 다른 회사의 주식들도 거래를 시작하였다.

400백년 전의 이 주식시장에서는 단순하게 주식을 팔고 살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공매도, 선물, 옵션 등의 주식파생상품까지 만들어졌었다.

당시의 이 사람들은 튤립 한 송이 한 송이 거래에도 투기, 공매도, 선물 등의 기법을 적용하였다.

이모저모 계산에 밝기로는 이름이 난 민족이다.

오죽하면 밥 먹고 각자 돈 내는 것도 이 나라 사람 이름을 붙여 더치페이(Dutch Pay)라 불렀겠는가.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 사람은 미주 대륙에 무역거래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고 이름을 뉴암스텔담 (New Amsterdam)이라 지었다.

이 지역 북쪽에 있던 영국사람들을 경계하여 담벼락을 세웠고 그 벽을 따라 길을 내었는데 그 길 위에서도 주식거래를 수행하였다.

뉴암스텔담은 이후 곧 영국사람들에게 점령되었고 당시 영국의 귀족이었던 요크공작 (Duke of York) 이름을 따라 뉴욕(New York)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담벼락(Wall)을 따라가며 그 위에서 주식거래가 이루어지던 길 이름이 월스트리트 (Wall Street)이다.

20세기 이후 월스트리트는 세계 최대의 주식 거래시장이 되었다.


 

렘브란트의 도시 암스텔담


이제 조금 더 소프트한 주제로 넘어가자.

암스텔담의 도착한 첫날이 일요일이었다.

돌아다니다가 보니 그리 크지 않은 광장에 장이 섰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다 보면 일요일 낮 광장에 임시 시장이 만들어져 그 동네의 야채, 과일, 치즈, 고기 등의 먹거리를 파는 것을 흔히 본다.

하지만 이렇게 미술 작품을 내놓고 파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래 사진을 보면 천막 안에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 위의 동상이 바로 렘브란트다.

너무나 합당한 장소에서 지극히 마땅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이 시장의 이름은 현대미술시장(Modern Art Market)이었다.

그림 뿐만 아니라 소품 수준의 조각품도 판매하고 있었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아 제일 비싼 작품이 50만원 정도 였다.



렘브란트는 이십 대 중반 이사 와서 1669년 죽기 전까지 사십여 년을 암스텔담에서 살며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많은 예술가가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고 사후에 인정을 받는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렘브란트는 사후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많이 알려진 행운의 작가였다.

다만 적지 않은 수입에도 그의 수준을 넘는 씀씀이로 말년에 파산선고를 받았고 빈털털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반면에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 고호는 당시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진 불운의 화가였다.

빈세트 반 고호는 19세기 후반 채 40년을 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이후 20세기 인상파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고호의 거의 모든 작품활동이 프랑스에서 이루어졌고 그가 사망하고 묻힌 장소도 프랑스다.

하지만 네덜란드 남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반고호는 그 나라 사람에게는 엄연한 네덜란드 작가이다.

 

내가 암스텔담에 도착한 날부터 8개월 정도 “빈센트 반 고호 내 꿈의 전시회 (Vincent Van Gogh. My Dream Exhibition.)”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고호의 그림 200여 점을 선정하여 디지탈 사진을 찍고 다시 그림의 실제 크기로 정밀 인쇄하여 전시하는 이벤트였다.

직접 가지는 못했고 전시장 입구만 사진을 찍었다.



마리화나와 매춘의 도시 암스텔담


네덜란드에서도 역시 마리화나는 불법이다.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근데 지정된 장소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을 잡아가지 않는다.

마리화나에 있어서는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

흔히 커피숍(Coffee Shop) 과 카페(Café)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구분 없이 커피 파는 장소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암스텔담에서는 다르다.

카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커피 파는 가게이다.

그러나 커피숍은 커피뿐만 아니라 마리화나도 사서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이르는 말이다.

 

거리를 지나가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커피숍 앞을 지나가니 마리화나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담배 냄새에 비교하면 생풀을 태우는 비릿한 냄새가 훨씬 더 진하다.

가게 안에서 그 냄새를 제대로 맡았다면 토가 나왔을 것 같은 아주 비위를 상하게 하는 냄새였다.

거리를 다니다가 눈도 풀리고 다리도 풀린 젊은이를 보았다.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고 걸음걸이는 휘청거렸다.

아마도 커피숍에서 방금 나온 친구인가 싶었다.

심지어 초저녁이었는데도 사람 많이 다니는 대로변 구석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를 본 적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친구들이 거리에 많은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한두 명 그런 친구를 보았고 전반적으로 거리는 아주 안전하였다.

 

암스텔담의 매춘은 마리화나와는 다르게 아예 합법이다.

암스텔담 중앙역 앞에 홍등가(Red Light District)가 있다.

이름 그대로 아가씨가 손님을 끌기 위해 서 있는 창에는 빨간 등 일색이다.



홍등가에서는 대놓고 위에 사진처럼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적나라한 현장감을 위해서 이 사진도 인터넷에서 모셔올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해진 구역인 홍등가 창가에서 고객을 맞는 아가씨가 대략 천명이란다.

암스텔담 도시 전체로 in-call 또는 out-call의 형태로 몸을 파는 아가씨까지 포함하면 숫자가 대략 3000명이란다.

그중 제일 나이 많은 먹은 여자가 84세.

이 할머니를 보려면 적어도 1~2주 전에 예약해야 한단다.

수요보다 공급이 달리니 기다릴 수밖에.

이 업종에 종사하는 여자는 모두 등록을 하고 세금을 내며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고 있다.

따라서 암스텔담의 관광 가이드에게서 들은 통계수치나 나이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홍등가는 여자를 사려는 소수의 남자와 여자를 보려는 대부분 관광객들로 가득 채워져 붐비고 있었다.

아주 간단한 비키니만 입고 창가에 앉아 있던 아가씨들은 대게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맘에 드는 아가씨와 눈이 맞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바로 유리창의 커튼이 내려진다.

가격은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어 각각 50, 100, 200유로라 한다.

 

홍등가에는 그 목적에 충실한 놀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볼거리도 있다.

아래 사진에 있는 무랑루즈 (Moulin Rouge)에서도 여러 가지 쇼를 볼 수 있다.

여자 혼자 놀기, 여자 혼자 기구 가지고 놀기, 여자 둘이서 놀기, 남자 여자 같이 놀기 등의 볼거리가 있다.

원래 무랑루즈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 있는 120년이 넘은 유명한 극장 이름이다.

주로 여러 여자가 모여 추는 캉캉 춤을 보여주는 장소다.

불어를 번역하자면 물랑은 풍차라는 말이고 루즈는 빨강이다.

합해서 빨간 풍차.

여자들 립스틱을 루즈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색깔의 주종이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소프트한 쇼를 보여주는 파리의 무랑루즈와 다르게 암스텔담의 무랑루즈는 그야말로 하드코어 라이브 쇼다.



마지막 홍등가 사진이 아래 있다.

거리 오른쪽에는 빨간 등의 창이 이어져 있고 바로 뒤 밤하늘에는 교회 종탑이 보인다.

이름이 Old Church인 이 건물은 700여 년 전에 세워졌고 이름처럼 암스텔담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로 홍등가의 한복판에 있다.

홍등가와 이 교회건물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로 홍등가의 민낯 얘기를 마무리한다.



1306년 건물이 세워지고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으로 1578년 신교도 소유로 넘어가지 전까지 이 교회는 카톨릭 교회였다.

1500년대의 암스텔담은 이미 유럽의 주요 항구로 많은 배가 드나들고 있었고 홍등가 역시 성업 중이었다.

뱃사람들은 홍등가에서 객고를 풀고 바로 이 교회에 가서 고해성사하고 돈을 내고 면죄부를 샀더란다.

뭐 여기까지는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바이다.

마침 교회의 위치가 홍등가 가까이 있어 아주 더 편리했을 것이다.

죄를 짓자마자 바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이렇게 이미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제의 시작은 교회를 여는 시간이었다.

대게 멀리 항해를 나가는 배는 새벽 네 시에 떠나는데 교회는 아침 여덟 시에 열었단다.

배 떠나기 직전까지 홍등가에서 여자와 같이 지내던 뱃사람들은 시간 맞춰 면죄부를 살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주 기발한 해결책을 만들었다.

성당에서는 다음 날 새벽에 지을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를 출항하기 전날 저녁에 미리 팔기 시작했다.

카톨릭이 이렇게 썩어가니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스텔담에는 관광객을 위해 무료로 하루에 한 번 관광가이드를 따라 시내를 걸어 다닐 기회가 있다.

매일 11시에 정해진 장소에서 출발하는데, 점심시간 30분을 포함해서 세 시간 정도 같이 시내를 돌아다닌다.

정확히 말하면 무료는 아니고 투어가 끝나면 팁을 받기를 원한다는 말을 한다.

너무 설명을 열심히 해줘서, 팁을 주면서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