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大洋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지 말라, 조종(弔鍾)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를,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이 17세기 초에 쓴 '신앙록'의 일부분입니다.
첨부한 영상은 헤밍웨이 원작의 1943년도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예고편입니다.
개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 배경입니다.
개리 쿠퍼는 헤밍웨이와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이 둘은 후에 사망시기도 불과 두달 차이밖에 안 납니다.
개리 쿠퍼가 암으로 사망한 두달 후 헤밍웨이는 엽총자살을 합니다)
여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먼은 영화촬영 당시 28살로 여주인공을 맡으려면 머리를 아주 짧게 짤라야 하는데 괜찮겠냐는 말에 이 주인공 역이라면 목이라도 자르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길 정도로 이 캐릭터에 깊은 애정을 보였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쓰면서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를 표현할 때 개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발생되는 모든 내전은 그 사회의 누적된 모순과 갈등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한국전쟁,베트남전이 모두 그렇습니다.
스페인내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합법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파시스트주의자 프랑코는 이태리,독일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공화국정부는 도와줘야 할 영국이나 프랑스,미국 등이 그들 나라의 정치적 분열 위험과 참전상의 손익계산 때문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고 소련만이 공화국 정부에 지원을 했습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국제여단을 조직하는데 여기 참여한 사람들의 다수는 유럽의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 제일 많고 이외에 유럽이나 미국의 지성인들,여기에 자유주의자,
반파시스트주의자,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등이 공화국 정부를 돕기 위해 스페인내전에 개인적으로 참전을 합니다.
이들 중엔 앙드레 말로,조지 오웰,헤밍웨이 등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모티브가 된 전쟁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그 대표적인 문학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이런 개인적으로 참전한 지성인들 중 한 사람인데,이 국제여단은 약 6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아닌 오합지졸들이라 내전이 끝날 무렵엔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지 말라, 조종(弔鍾)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를,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이 17세기 초에 쓴 '신앙록'의 일부분입니다.
첨부한 영상은 헤밍웨이 원작의 1943년도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예고편입니다.
개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 배경입니다.
개리 쿠퍼는 헤밍웨이와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이 둘은 후에 사망시기도 불과 두달 차이밖에 안 납니다.
개리 쿠퍼가 암으로 사망한 두달 후 헤밍웨이는 엽총자살을 합니다)
여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먼은 영화촬영 당시 28살로 여주인공을 맡으려면 머리를 아주 짧게 짤라야 하는데 괜찮겠냐는 말에 이 주인공 역이라면 목이라도 자르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길 정도로 이 캐릭터에 깊은 애정을 보였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쓰면서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를 표현할 때 개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발생되는 모든 내전은 그 사회의 누적된 모순과 갈등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한국전쟁,베트남전이 모두 그렇습니다.
스페인내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합법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파시스트주의자 프랑코는 이태리,독일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공화국정부는 도와줘야 할 영국이나 프랑스,미국 등이 그들 나라의 정치적 분열 위험과 참전상의 손익계산 때문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고 소련만이 공화국 정부에 지원을 했습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국제여단을 조직하는데 여기 참여한 사람들의 다수는 유럽의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 제일 많고 이외에 유럽이나 미국의 지성인들,여기에 자유주의자,
반파시스트주의자,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등이 공화국 정부를 돕기 위해 스페인내전에 개인적으로 참전을 합니다.
이들 중엔 앙드레 말로,조지 오웰,헤밍웨이 등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모티브가 된 전쟁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그 대표적인 문학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이런 개인적으로 참전한 지성인들 중 한 사람인데,이 국제여단은 약 6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아닌 오합지졸들이라 내전이 끝날 무렵엔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작가 죠지 오웰
뒤에 등돌리고 있는 사람이 헤밍웨이
뒤에 등돌리고 있는 사람이 헤밍웨이
Land and freedom
첫 번째 사진은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인 스페인 내전에서의 저격당하는 병사의 모습입니다
Land and freedom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로 1995년도 작품인데 지금도 VOD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https://youtu.be/3Lk2q6MZVE0
스페인은 20세기 초에 정쟁으로 들끓고 있었다.
스페인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나라이면서도 농경지를 제대로 개발,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농민층과 부유한 지주사이의 중산층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험준한 피레네산맥으로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단절된 스페인은 당시에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스페인의 카톨릭교회는 계속 중세와 다름없는 형태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많은 세력,특히 빈민층은 카톨릭의 권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대도시에서는 좌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가입시켰고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같은 지리적,문화적 고립과 심한 계급 분화 현상 등 사회 전반적인 동요를 배경으로 스페인은 내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일단 내전이 벌어지자 스페인 사람들은 돈과 토지를 빼앗거나 지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적 이상향,영광스런 스페인제국시대를 되살리려는 카톨릭 군주체제 등 갖가지 이상을 향해 서로 싸웠다.
이 내전에서 60만의 인명이 희생되었지만 그들의 이상은 어느 하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 대신 외국세력이 병력과 자금,무기를 투입하여 프랑코독재체제의 확립을 도움으로써 근 40년간의 억압이 초래되었을 뿐이었다.
4세기 전 스페인은 제국의 규모나 富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늘어나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서 사회를 거의 봉건제나 다름없는 수준에 묶어 두면서 스페인은 정체상태에 빠지기 시작한다.
한편 스페인보다 부유하지 못한 다른 경쟁국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제도의 발전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을 거듭해서 18세기말 즘에는 강대국으로서의 스페인의 면모는 퇴색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시대에는 이베리아 반도가 프랑스와 영국의 격전장이 되었고 또 아메리카대륙과 태평양지역에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군부와 카톨릭,부유한 지주세력,왕실이 서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그들의 정치의식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는 노동조합원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카탈로니아와 그밖의 지역에서는 분리주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스페인 카톨릭교회의 최상층부는 국왕 및 지주세력과 밀착되어 있었고 카톨릭교회는 단일 地主로서는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안으로 썩어 들어가는 정치환경 속에서 국왕 알폰소 13세의 통치체제는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1923년 쯤에는 그는 명목상의 통치자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1936년까지 여러 번의 쿠테타 기도와 봉기운동이 잇달으며 사회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전 세계에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다가 뒤늦게 뛰어든 독일 등 신흥제국주의 세력과 충돌한 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인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
전쟁이란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요구하지만 주변국가에게는 엄청나게 수지맞는 장사이다.
전쟁 중에는 물자란 끝없이 소모되고 보충해야 되기 때문에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영국 등 연합국에만 물자를 판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적국인 독일,오스만제국 등에도 팔아서 1차 세계대전동안 스페인 경제는 큰 성장을 한다.
이는 한국전쟁 때 일본이 대박을 터트린 것과 같다.
하지만 전쟁으로 얻어진 갑작스런 富가 일반 국민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스페인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나라이면서도 농경지를 제대로 개발,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농민층과 부유한 지주사이의 중산층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험준한 피레네산맥으로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단절된 스페인은 당시에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스페인의 카톨릭교회는 계속 중세와 다름없는 형태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많은 세력,특히 빈민층은 카톨릭의 권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대도시에서는 좌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가입시켰고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같은 지리적,문화적 고립과 심한 계급 분화 현상 등 사회 전반적인 동요를 배경으로 스페인은 내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일단 내전이 벌어지자 스페인 사람들은 돈과 토지를 빼앗거나 지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적 이상향,영광스런 스페인제국시대를 되살리려는 카톨릭 군주체제 등 갖가지 이상을 향해 서로 싸웠다.
이 내전에서 60만의 인명이 희생되었지만 그들의 이상은 어느 하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 대신 외국세력이 병력과 자금,무기를 투입하여 프랑코독재체제의 확립을 도움으로써 근 40년간의 억압이 초래되었을 뿐이었다.
4세기 전 스페인은 제국의 규모나 富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늘어나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서 사회를 거의 봉건제나 다름없는 수준에 묶어 두면서 스페인은 정체상태에 빠지기 시작한다.
한편 스페인보다 부유하지 못한 다른 경쟁국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제도의 발전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을 거듭해서 18세기말 즘에는 강대국으로서의 스페인의 면모는 퇴색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시대에는 이베리아 반도가 프랑스와 영국의 격전장이 되었고 또 아메리카대륙과 태평양지역에 있던 스페인의 식민지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군부와 카톨릭,부유한 지주세력,왕실이 서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그들의 정치의식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는 노동조합원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카탈로니아와 그밖의 지역에서는 분리주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스페인 카톨릭교회의 최상층부는 국왕 및 지주세력과 밀착되어 있었고 카톨릭교회는 단일 地主로서는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안으로 썩어 들어가는 정치환경 속에서 국왕 알폰소 13세의 통치체제는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1923년 쯤에는 그는 명목상의 통치자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1936년까지 여러 번의 쿠테타 기도와 봉기운동이 잇달으며 사회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전 세계에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다가 뒤늦게 뛰어든 독일 등 신흥제국주의 세력과 충돌한 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인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
전쟁이란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요구하지만 주변국가에게는 엄청나게 수지맞는 장사이다.
전쟁 중에는 물자란 끝없이 소모되고 보충해야 되기 때문에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영국 등 연합국에만 물자를 판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적국인 독일,오스만제국 등에도 팔아서 1차 세계대전동안 스페인 경제는 큰 성장을 한다.
이는 한국전쟁 때 일본이 대박을 터트린 것과 같다.
하지만 전쟁으로 얻어진 갑작스런 富가 일반 국민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내란의 예감
1차 대전이 끝나고 스페인의 경제도 급속도로 가라앉자 스페인은 혼란 속에 빠지고 1923년 전국적인 파업과 반란이 일어나며 이를 진압한 카탈루니아 총 사령관 리베라 장군은 국왕 알폰소 13세로 부터 정권을 인계받아 7년간 통치를 한다.
리베라는 독재를 하긴 했지만 스페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지도자로 평가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스페인의 경제도 침몰하게 되자 리베라는 정권을 내놓고 프랑스로 망명하는데 리베라가 떠난 스페인은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든다.
군주제 유지냐,공화제 재건이냐를 놓고 나라는 두 개로 갈라지고 1931년 군주제,공화제 선택에 대한 국민투표결과를 놓고 진보성향인 도시들은 공화제를 앞다퉈 선포하고 보수적인 농촌은 군주제를 주장하는데 투표결과를 따르라는 공화파와 이를 인정 못한다는 군주파의 대립이 전쟁 직전까지 가자 국왕 알폰소 13세는 퇴위를 결심하고 프랑스로 망명한다.
불과 몇 시간 뒤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1931년 12월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제 1조에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라는 문구를 넣었으며 국가와 교회를 분리할 것을 분명히 하고 노동자에게 유리하도록 노동 계약 조건을 파격적으로 바꾸니 군부와 자본가들은 극력 저항에 나선다.
노동자,농민들은 열광적으로 새 공화국을 지지하지만 군부,교회,지주,자본가 등 보수세력은 새 공화국에 크게 반발해서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고 투자를 피하는 등 정부의 시책과는 반대의 길로 가지만 급진적인 사회주의 세력들은 새 공화국이 너무 온건하고 타협적이라고 오히려 반발한다.
이처럼 온갖 이념이 뒤얽힌 가운데 노동자들 사이에는 Anarchism이 크게 번진다.
이는 중앙정부 등 권위를 내세운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부하고 지방 자치단체나 조합,동맹 등 자유로운 모임들이 협의해서 정치를 해나가자는 사상으로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중앙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치를 위해 투쟁하던 바스크나 카탈루니아 지방에 이 Anarchism 사상이 번진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당시 스페인은 갖은 이념에 뒤엉켜 파업과 투쟁,반란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계속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1936년,세계는 팽창주의를 내세우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그리고 독일,이탈리아,일본 같은 신흥 파시스트 세력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그 한복판에 스페인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 아나키스트에 바스크,카탈루니아 지방의 분리 독립투쟁까지 겹쳐 이 갈등들이 폭발한 것이 스페인이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리허설이었다.
첫 번 째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내란의 예감'입니다.
달리는 스페인내전 6개월 전에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이미 당시의 스페인 국민들은 언젠가는 지금의 갈등이 폭발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스페인의 경제도 급속도로 가라앉자 스페인은 혼란 속에 빠지고 1923년 전국적인 파업과 반란이 일어나며 이를 진압한 카탈루니아 총 사령관 리베라 장군은 국왕 알폰소 13세로 부터 정권을 인계받아 7년간 통치를 한다.
리베라는 독재를 하긴 했지만 스페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지도자로 평가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스페인의 경제도 침몰하게 되자 리베라는 정권을 내놓고 프랑스로 망명하는데 리베라가 떠난 스페인은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든다.
군주제 유지냐,공화제 재건이냐를 놓고 나라는 두 개로 갈라지고 1931년 군주제,공화제 선택에 대한 국민투표결과를 놓고 진보성향인 도시들은 공화제를 앞다퉈 선포하고 보수적인 농촌은 군주제를 주장하는데 투표결과를 따르라는 공화파와 이를 인정 못한다는 군주파의 대립이 전쟁 직전까지 가자 국왕 알폰소 13세는 퇴위를 결심하고 프랑스로 망명한다.
불과 몇 시간 뒤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1931년 12월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제 1조에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라는 문구를 넣었으며 국가와 교회를 분리할 것을 분명히 하고 노동자에게 유리하도록 노동 계약 조건을 파격적으로 바꾸니 군부와 자본가들은 극력 저항에 나선다.
노동자,농민들은 열광적으로 새 공화국을 지지하지만 군부,교회,지주,자본가 등 보수세력은 새 공화국에 크게 반발해서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고 투자를 피하는 등 정부의 시책과는 반대의 길로 가지만 급진적인 사회주의 세력들은 새 공화국이 너무 온건하고 타협적이라고 오히려 반발한다.
이처럼 온갖 이념이 뒤얽힌 가운데 노동자들 사이에는 Anarchism이 크게 번진다.
이는 중앙정부 등 권위를 내세운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부하고 지방 자치단체나 조합,동맹 등 자유로운 모임들이 협의해서 정치를 해나가자는 사상으로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중앙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치를 위해 투쟁하던 바스크나 카탈루니아 지방에 이 Anarchism 사상이 번진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당시 스페인은 갖은 이념에 뒤엉켜 파업과 투쟁,반란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계속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1936년,세계는 팽창주의를 내세우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그리고 독일,이탈리아,일본 같은 신흥 파시스트 세력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그 한복판에 스페인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 아나키스트에 바스크,카탈루니아 지방의 분리 독립투쟁까지 겹쳐 이 갈등들이 폭발한 것이 스페인이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리허설이었다.
첫 번 째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내란의 예감'입니다.
달리는 스페인내전 6개월 전에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이미 당시의 스페인 국민들은 언젠가는 지금의 갈등이 폭발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카탈루니아찬가1
수십 개의 정파와 이념 집단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던 스페인 사회는 정치목적이 비슷한 집단끼리 짝짓기를 해서 연합전선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크게 좌파와 우파 연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 독일의 나치,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일본의 군국주의자들 처럼 스페인에도 극우 파시스트 정당이 등장하는데 1933년 결성된 '팔랑헤당'이 그것이다.
이 당을 만든 사람은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는 변호사인데 그는 1923년에서 1930년까지 스페인을 독재 지배했던 리베라 장군의 장남이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6년 내전이 터지자 좌파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한다.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6년 초에는 보수 우파 단체 정당들(왕당파,팔랑헤당,자본가,지주 카톨릭교회 성직자 ,군부와 기득권 층)이 모여서 '국민전선'을 형성하고 진보 좌파 단체 정당들(사회주의 정당,공산당,노동자단체 공화주의, 분리주의자,무정부주의자)이 '인민전선'을 결성한다.
이제 좌파와 우파 두 진영으로 떼지어 갈라져 서로 쌓이고 쌓인 증오와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1936년 2월,전국 총선거를 실시한다.
선거결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좌파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하는데 우파에서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거결과에 불만을 품은 우파 세력은 좌파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파업,폭동,테러,암살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좌파들의 폭력,테러,암살도 이어져서 스페인은 이제 완전히 두 개로 갈라져 버린다.
우파의 장군들은 내란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좌파정부는 여기 신경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나라는 혼란했다.
1936년 7월 13일 우파세력의 주요 지도자인 호세 칼보 스텔로 왕당파 당수가 마드리드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내란을 준비중이던 군부세력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해준 셈이었고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던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거의 예정된 수순이었다.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 프랑코 장군은 7월 18일 방송을 통해 반란선언문을 발표했고 그러자 그날로 스페인 전역의 수비대 사령관들이 병력을 이끌고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스페인 국민들의 대다수는 그들이 선출한 합법적인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
여러 도시에서는 노동자 민병대와 공화국 방위대가 합세해서 산재된 군수비대를 공격해서 며칠 만에 정부는 스페인의 3분의 2를 되찾는다.
반란 초기에 공화파는 힘에 균형에 있어 절대 우위였다.
합법적인 정부였을 뿐 아니라 절대 다수의 병력,무기 그리고 國庫를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자금을 반란군에 비해 월등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대체로 보수적인 농민들은 국민군파를, 대도시 노동자들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에 전선이 따로 없이 전국이 戰場이었던 이 이상한 전쟁에서 대도시를 장악했던 공화파 정부는 반란군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이상한 전쟁에 관한 묘사는 영화 'Land and freedom'에 잘 나와있습니다.농사짓다가 며칠 전투하러 갔다오고,도시에서는 저 멀리서 총소리 나니까 심심한데 총 몇 번 쏘고 올까 하며 외출하고...)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공화파 정부는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서 모로코에서 건너온 반란군이 점차 세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불평 불만 분자들의 반란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전쟁으로 번지자 전 세계가 이를 주목하며 세 패로 갈라진다.
먼저 노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국민군 편을 든 독일과 이탈리아 좌파 세력인 공화파 편을 들어 지원에 나선 소련
세계 대전이 다시 터질 것을 두려워하여 불간섭원칙을 지켜 어정쩡한 태도로 한 발 떨어져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등
가장 먼저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은 독일이다.
히틀러는 공산주의가 번져 나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의용군으로 위장한 19,000명의 '콘도르군단'을 스페인에 파병하고 많은 무기와 자금을 국민군에 지원한다.
독일과 경쟁관계에 있던 이탈리아도 5만명의 군인을 스페인으로 파병한다.
스탈린은 당시만 해도 유일한 공산주의국가였던 소련 이외의 공산국가를 만들어 공산국가끼리 연합해 자본주의 국가와 대결하기 위한 인민전선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터라 스페인 내전을 공산주의 확산의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수십 개의 정파와 이념 집단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던 스페인 사회는 정치목적이 비슷한 집단끼리 짝짓기를 해서 연합전선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크게 좌파와 우파 연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 독일의 나치,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일본의 군국주의자들 처럼 스페인에도 극우 파시스트 정당이 등장하는데 1933년 결성된 '팔랑헤당'이 그것이다.
이 당을 만든 사람은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는 변호사인데 그는 1923년에서 1930년까지 스페인을 독재 지배했던 리베라 장군의 장남이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6년 내전이 터지자 좌파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한다.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6년 초에는 보수 우파 단체 정당들(왕당파,팔랑헤당,자본가,지주 카톨릭교회 성직자 ,군부와 기득권 층)이 모여서 '국민전선'을 형성하고 진보 좌파 단체 정당들(사회주의 정당,공산당,노동자단체 공화주의, 분리주의자,무정부주의자)이 '인민전선'을 결성한다.
이제 좌파와 우파 두 진영으로 떼지어 갈라져 서로 쌓이고 쌓인 증오와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1936년 2월,전국 총선거를 실시한다.
선거결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좌파연합인 인민전선이 승리하는데 우파에서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거결과에 불만을 품은 우파 세력은 좌파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파업,폭동,테러,암살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좌파들의 폭력,테러,암살도 이어져서 스페인은 이제 완전히 두 개로 갈라져 버린다.
우파의 장군들은 내란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좌파정부는 여기 신경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나라는 혼란했다.
1936년 7월 13일 우파세력의 주요 지도자인 호세 칼보 스텔로 왕당파 당수가 마드리드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내란을 준비중이던 군부세력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해준 셈이었고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던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거의 예정된 수순이었다.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 프랑코 장군은 7월 18일 방송을 통해 반란선언문을 발표했고 그러자 그날로 스페인 전역의 수비대 사령관들이 병력을 이끌고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스페인 국민들의 대다수는 그들이 선출한 합법적인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
여러 도시에서는 노동자 민병대와 공화국 방위대가 합세해서 산재된 군수비대를 공격해서 며칠 만에 정부는 스페인의 3분의 2를 되찾는다.
반란 초기에 공화파는 힘에 균형에 있어 절대 우위였다.
합법적인 정부였을 뿐 아니라 절대 다수의 병력,무기 그리고 國庫를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자금을 반란군에 비해 월등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대체로 보수적인 농민들은 국민군파를, 대도시 노동자들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에 전선이 따로 없이 전국이 戰場이었던 이 이상한 전쟁에서 대도시를 장악했던 공화파 정부는 반란군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이상한 전쟁에 관한 묘사는 영화 'Land and freedom'에 잘 나와있습니다.농사짓다가 며칠 전투하러 갔다오고,도시에서는 저 멀리서 총소리 나니까 심심한데 총 몇 번 쏘고 올까 하며 외출하고...)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공화파 정부는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서 모로코에서 건너온 반란군이 점차 세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불평 불만 분자들의 반란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전쟁으로 번지자 전 세계가 이를 주목하며 세 패로 갈라진다.
먼저 노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국민군 편을 든 독일과 이탈리아 좌파 세력인 공화파 편을 들어 지원에 나선 소련
세계 대전이 다시 터질 것을 두려워하여 불간섭원칙을 지켜 어정쩡한 태도로 한 발 떨어져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등
가장 먼저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은 독일이다.
히틀러는 공산주의가 번져 나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의용군으로 위장한 19,000명의 '콘도르군단'을 스페인에 파병하고 많은 무기와 자금을 국민군에 지원한다.
독일과 경쟁관계에 있던 이탈리아도 5만명의 군인을 스페인으로 파병한다.
스탈린은 당시만 해도 유일한 공산주의국가였던 소련 이외의 공산국가를 만들어 공산국가끼리 연합해 자본주의 국가와 대결하기 위한 인민전선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터라 스페인 내전을 공산주의 확산의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국제여단
프랑스는 스페인 공화파에 동조하면서도 무기판매에 따르는 국내의 정치적 분열 위험을 무릎쓰려 하지 않았고 또한 프랑코를 지원하고 있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적대할 의사도 없었다.
영국은 공화파, 반란파에 다같이 무기를 판매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1937년 5월에 제정된 '중립법'조항에 따라 교전상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무기를 판매할 수 없었다.
1936년 9월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소련은 스페인내전에 간섭하지 말자는 불간섭조약을 맺었으나 독일,이탈리아,소련은 서명을 했어도 스페인 내전에 적극 개입한다.
세계 모든 이념의 전시장과 같았던 스페인에서 내전이 터지자 전 세계의 관심이 스페인으로 쏠렸고 이 전쟁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지켜야 하는 종교전쟁과도 같아져서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들어온다.
노동자의 권익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은 공화파군대로,공산주의를 배척하고 확산을 막으려는 이들은 반란파 군대로,양쪽 진영으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공화파에는 약 53개국에서 32.000명이 들어왔는데 '국제여단'이라 불렸던 이들은 정의심과 이상에 불타는 문인,예술가,자유주의자,反파시스트주의자,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참여한 이상주의자들까지 합쳐 이들은 6만 명에 이른다.
영국 작가 죠지 오웰은 적극적인 좌파사상을 갖고 공화군에 참전했는데 같은 공화파와 연합한 공산당과 이를 지도하던 소련에서 파견된 공산당 간부들의 야비한 행동에 분개하고 공산주의에 크게 실망한 후 반공주의자로 돌아서 후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소설 '동물농장'을 발표한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담을 그린 작품 '카탈루니아 찬가'는 1938년 4월 영국에서 출간되었지만, 195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전혀 관심을 못 끌다가 1975년 프랑코가 죽은 이후 유명해졌다.
물론 그때까지 스페인에선 출판,판매금지됐었다.
원래 스페인을 좋아하던 헤밍웨이는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한다.
국제여단에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풍부한 제대 군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혈기만 왕성하고 이상에만 불탔지 총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죠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에 언급된 것처럼 그들은 정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보람에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전쟁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마드리드 방어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한 것은 소련군이었고,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였으므로 국제여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이 찍혀서 내전이 끝난 뒤 본국에 돌아간 국제여단 출신들은 영국,미국 같은 반공국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취급받아 큰 불이익을 받았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이들의 국적을 모두 박탈하기 까지 했다.
이것이 두려워 소련을 택한 국제여단 병사들은 소련측에서 봤을 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말의 시체를 엄폐물로 삼고 총을 겨누는 사람들.
정장차림에 권총을 든 사람의 모습이 이 이상한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는 스페인 공화파에 동조하면서도 무기판매에 따르는 국내의 정치적 분열 위험을 무릎쓰려 하지 않았고 또한 프랑코를 지원하고 있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적대할 의사도 없었다.
영국은 공화파, 반란파에 다같이 무기를 판매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1937년 5월에 제정된 '중립법'조항에 따라 교전상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무기를 판매할 수 없었다.
1936년 9월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소련은 스페인내전에 간섭하지 말자는 불간섭조약을 맺었으나 독일,이탈리아,소련은 서명을 했어도 스페인 내전에 적극 개입한다.
세계 모든 이념의 전시장과 같았던 스페인에서 내전이 터지자 전 세계의 관심이 스페인으로 쏠렸고 이 전쟁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지켜야 하는 종교전쟁과도 같아져서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들어온다.
노동자의 권익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은 공화파군대로,공산주의를 배척하고 확산을 막으려는 이들은 반란파 군대로,양쪽 진영으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공화파에는 약 53개국에서 32.000명이 들어왔는데 '국제여단'이라 불렸던 이들은 정의심과 이상에 불타는 문인,예술가,자유주의자,反파시스트주의자,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참여한 이상주의자들까지 합쳐 이들은 6만 명에 이른다.
영국 작가 죠지 오웰은 적극적인 좌파사상을 갖고 공화군에 참전했는데 같은 공화파와 연합한 공산당과 이를 지도하던 소련에서 파견된 공산당 간부들의 야비한 행동에 분개하고 공산주의에 크게 실망한 후 반공주의자로 돌아서 후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소설 '동물농장'을 발표한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담을 그린 작품 '카탈루니아 찬가'는 1938년 4월 영국에서 출간되었지만, 195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전혀 관심을 못 끌다가 1975년 프랑코가 죽은 이후 유명해졌다.
물론 그때까지 스페인에선 출판,판매금지됐었다.
원래 스페인을 좋아하던 헤밍웨이는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한다.
국제여단에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풍부한 제대 군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혈기만 왕성하고 이상에만 불탔지 총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죠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에 언급된 것처럼 그들은 정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보람에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전쟁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마드리드 방어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한 것은 소련군이었고,공산당의 지시하에 움직였으므로 국제여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이 찍혀서 내전이 끝난 뒤 본국에 돌아간 국제여단 출신들은 영국,미국 같은 반공국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취급받아 큰 불이익을 받았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이들의 국적을 모두 박탈하기 까지 했다.
이것이 두려워 소련을 택한 국제여단 병사들은 소련측에서 봤을 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말의 시체를 엄폐물로 삼고 총을 겨누는 사람들.
정장차림에 권총을 든 사람의 모습이 이 이상한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스페인에서의 헤밍웨이
게르니카
1936년 7월17일.
스페인 점령지 모로코에서 봉기한 반란군은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본토로 침공해 들어간다.
공화파 정부가 처음부터 이를 강력하게 진압했더라면 전쟁으로 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페인의 도시,특히 노동자가 많은 대도시들은 공화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농촌과 지방은 국민파 지지세력이 많았지만 중앙정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반란군은 저항이 덜 심한 스페인 북부부터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기를 든 노동자들이 맞서는 대도시들은 여간해서 함락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보낸 군대와 무기,군수품,이탈리아의 지원이 도착하면서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향해 진격한다.
점령하는 도시마다 공화파에 대한 피의 보복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화파 정부 지배지역에서는 국민파에 대한 처형이 대거 벌어져 스페인 전국이 파괴와 살육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공화군 점령하에 있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 상공에 독일 공군 폭격기 24대가 나타난다.
무차별 폭격과 기총 소사,온갖 폭탄이 다 투하되고 심지어는 산간지방인 이 곳에 어뢰까지 투하됐다.
조용하던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고 거리에는 주검이 널리게 됐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와 88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공습은 프랑코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게르니카는 결코 공습의 타겟이 될 만한 마을이 아니었다.
민간시설밖에 없는 마을 중심부를 폭격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전선에 나간 상태여서 폭격을 가할 경우 재난은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립을 요구하며 공화파에 가담했던 바스크 지방 사람들에 대한 프랑코의 보복이자 공화파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독일은 극우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과시하는 한편 독일 공군력에 대한 기술적 시험의 좋은 기회였다.
몇 주 뒤 영국조사단이 찾아왔을 땐 이미 국민파에 의해서 시체를 모두 소각해 버린 뒤여서 증거를 찾지 못한 조사단은 국민파의 말만 믿고 '공산주의자들이 게르니카를 파괴하고 불질렀다'는 엉뚱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지자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1936년 7월17일.
스페인 점령지 모로코에서 봉기한 반란군은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본토로 침공해 들어간다.
공화파 정부가 처음부터 이를 강력하게 진압했더라면 전쟁으로 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페인의 도시,특히 노동자가 많은 대도시들은 공화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농촌과 지방은 국민파 지지세력이 많았지만 중앙정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반란군은 저항이 덜 심한 스페인 북부부터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기를 든 노동자들이 맞서는 대도시들은 여간해서 함락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보낸 군대와 무기,군수품,이탈리아의 지원이 도착하면서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향해 진격한다.
점령하는 도시마다 공화파에 대한 피의 보복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화파 정부 지배지역에서는 국민파에 대한 처형이 대거 벌어져 스페인 전국이 파괴와 살육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공화군 점령하에 있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 상공에 독일 공군 폭격기 24대가 나타난다.
무차별 폭격과 기총 소사,온갖 폭탄이 다 투하되고 심지어는 산간지방인 이 곳에 어뢰까지 투하됐다.
조용하던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고 거리에는 주검이 널리게 됐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와 88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공습은 프랑코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게르니카는 결코 공습의 타겟이 될 만한 마을이 아니었다.
민간시설밖에 없는 마을 중심부를 폭격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전선에 나간 상태여서 폭격을 가할 경우 재난은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립을 요구하며 공화파에 가담했던 바스크 지방 사람들에 대한 프랑코의 보복이자 공화파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독일은 극우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과시하는 한편 독일 공군력에 대한 기술적 시험의 좋은 기회였다.
몇 주 뒤 영국조사단이 찾아왔을 땐 이미 국민파에 의해서 시체를 모두 소각해 버린 뒤여서 증거를 찾지 못한 조사단은 국민파의 말만 믿고 '공산주의자들이 게르니카를 파괴하고 불질렀다'는 엉뚱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지자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5월1일.
프랑스 파리는 그대까지 있었던 노동절 시위로는 최대 인파인 100만 명이 넘는 항의시위대로 도시가 마비됐다.
파리에 있던 피카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마침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될 작품을 의뢰받아서 작품 주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이 비극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5주 만에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게르니카의 비극과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이 작품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이 1939년 프랑코파의 승리로 끝나자 피카소도,게르니카도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1973년 세상을 떠난 피카소는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고 1981년 9월 10일에서야 게르니카는 스페인으로 올 수 있었다.
전사자의 계곡
황소는 그대를 모른다.
무화과나무도,말들도,그대 집에 있는 개미들도 그대를 알지 못한다.
아이도,오후도,그대를 모른다.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비석의 이면은 그대를 모른다.
그대가 무너질 때 입고 있던 검은 공단옷도 그대의 말없는 추억도 그대를 모른다.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조그만 하얀 달팽이들과 뿌옇게 변한 포도와 그리고 떨기를 이룬 언덕과 함께 가을이 와도 누구 하나 그대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리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지상의 모든 죽음처럼,
죽은 개들의 시체더미 속에 잊혀진 모든 죽음처럼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9~1936)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인 로르카는 스페인은 물론 남미에도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하는 주옥같은 시집을 많이 남겼다.
황소는 그대를 모른다.
무화과나무도,말들도,그대 집에 있는 개미들도 그대를 알지 못한다.
아이도,오후도,그대를 모른다.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비석의 이면은 그대를 모른다.
그대가 무너질 때 입고 있던 검은 공단옷도 그대의 말없는 추억도 그대를 모른다.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조그만 하얀 달팽이들과 뿌옇게 변한 포도와 그리고 떨기를 이룬 언덕과 함께 가을이 와도 누구 하나 그대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리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그대는 영원히 잠들었으므로,
지상의 모든 죽음처럼,
죽은 개들의 시체더미 속에 잊혀진 모든 죽음처럼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9~1936)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인 로르카는 스페인은 물론 남미에도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하는 주옥같은 시집을 많이 남겼다.
그는 파시스트를 증오해 결국 내전이 터지자 고향인 그라나다 근처에서 정체모를 사람들에게 끌려가 총살당한다.
프랑코 정권은 그가 죽은 뒤 18년 동안 그의 저술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금하였다.
위의 詩는 그의 마지막 작품집 중 하나인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위한 輓歌'의 일부이다.
유명한 투우사였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인데 내전 중에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만가로서도 적합했다.
스페인 내전은 2년 9개월이나 계속됐고 1939년 1월 14일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바르셀로나가 국민군에게 점령됐고,3월 28일 마드리드가 함락된 뒤 4월 1일 공화파는 항복하고 프랑코는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선포한다.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합법적인 정부에 보수파가 일으킨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파업,시위,폭동,반란,쿠데타의 연속이었던 스페인 근현대사는 처참한 내전으로 끝나 결국 폭력에 의해,폭력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다양한 민족,문화가 뒤엉킨 스페인 사회에서 대화와 타협보다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존심 강한 국민성은 말보다는 힘을 앞세우는 폭력의 시대를 열었고,폭력은 다시 폭력을 부르는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2차대전의 시험장이었다.
독일은 스페인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시험한 셈이었고 영국 프랑스 미국은 공화파에 대한 지원거부 등으로 뮌헨협정의 체결로 이어지는 유화정책을 시험해본 셈이었다.
소련은 스페인에 공산주의를 이식시켜 보려 했고 수만 명의 외국 의용군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미리 맛볼 수 있었다.
인류는 정의도 패배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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