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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소유냐 존재냐

by Ajan Master_Choi 2022. 12. 11.

'소유냐 존재냐'는 에리히 프롬이 1976년에 쓴 책으로 소유와 존재간의 차이점을 고찰한 내용입니다.
즉,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 ) 두 상반된 단어를 대립시켜 놓음으로써 작가가 가진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책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만 보더라도 소유로써의 삶은 수동적, 구속감(노예적), 비창조적, 불안정, 경쟁의식, 적대감인 반면 존재로써의 삶은 능동적, 자유, 창조적, 안정감, 연대의식등의 긍정적 단어들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소유와 존재의 극명한 대립구조는 마치 둘을 따로 때어 분리시키고자하는 프롬의 의식적 구조를 보게 됩니다.
마치 소유는 화로, 존재는 복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자가 소유는 회의적으로 표현하며 존재에 대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극단적인 쾌락주의가 도래하게 된 현대사회에서, 소유와 존재의 삶을 대비하여 자유 시장 경제 체제가 낳은 사고방식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했던 의도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프롬은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 )는 프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문제로 삼는 두 가지에 대한 철학적 정의,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제2부는 두 가지에 대응하는 사회심리학적 요인을 분석으로, 소유 양식, 존재 양식과 그 두 가지의 새로운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프롬에 의하면 소유(취득)로써 사회 인간관계의 특징은 탐욕, 냉혹, 경쟁, 적대입니다.
소유의 상실, 더욱 많은 상품과 지위 향상을 위한 경쟁적 싸움에 패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그것이 없으면 불구자로 느끼지 않을 수 없게 작용합니다.
개인도 사회도 이러한 공포에 의해 그 성격 구조가 왜곡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제3부는 낡은 소유로부터 새로운 존재라는 양식으로 변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속으로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상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소유의 양식으로써의 종교
소유 양식에서의 신은 하나의 우상이 된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의미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한낱 사물이며, 인간은 그것에 자신의 힘을 투영함으로써 결국 스스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굴종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소외 형태에 빠진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지식(앎)의 특성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헤브루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 지그문트 프로이드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중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을 떠올리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는 앎이란 이른바 상식적 지각이 가져다주는 기만성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상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참이며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의 상당 부분이 주변 사회의 암시적 영향으로 야기된 미망(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앎[내가 알았다는 것, 깨달음]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된다.
앎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근원에 이르러 적나라한 현실을 ''보ㆍ는ㆍ것''을 의미한다.

존재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하는 것'인 반면
소유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의하고 규정내리는 순간
우리는 소유적 삶에 가까워 질 수 밖에 없다.

탐욕은 분리불안을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자신의 존재가 소유를 통해 증명된다고 믿는다.

욕망의 포화점은 없다.

자본주의적 존재론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선망과 타인의 인정을 토대로 나의 존재를 만들어간다.
이것은 또 하나의 자본주의적 존재론을 말한다.
다시말해 소유적 욕구의 다른 형태이다.

책을 읽는 동안 심리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에리히프롬에 대해 사실상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깊은 사유로의 프롬의 생애는 한 세계를 관통한 에너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덮고나면 하나의 의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소유'를 선택할 것인가, '존재'를 선택할 것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두가지 모순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고민해야 할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소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 또한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유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
소유한 것에 대해 고통스럽지 않는 삶이란
그것을 누리되 따라오는 부수적인 에고적 부딪힘에 대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으며 생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에리히프롬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두가지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가지의 '관계성'에 대해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소유냐 존재냐는 물음에 앞서 '나는 나로써 존재하느냐'는 물음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한번 존재로써의 질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만약 나의 소유가 나의 존재라면 내가 가진 것을 잃는 경우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오늘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십니까?를 되묻는 이유도 우리가 아직 명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한 것에대한 갈증일 것입니다.
물음이 그쳤다면 언제나 그 자체가 행복한 여정일것입니다.
묻고있는 중이라면 어려움 속에서도 늘 새롭고 활기찬 하루 하루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소유라는 의식을 따라가지 않아도 존재로써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한다면 원하는 것, 바라고 염원하는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