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5월 31일
박인수는 해군 헌병 대위였다.
훤칠한 키에 군복이 잘 어울리던 박인수 대위의 군 생활은 갑자기 꽈배기 꼬이듯 꼬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여자 문제였다.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 약혼녀가 고무신을 바꿔 신어 버린 것이다.
박인수는 실연의 상처 때문에 방황하게 되는데 여자에게 배신당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고 싶었는지 군무는 제쳐 놓고 캬바레나 무도장을 전전하며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았다.
결국 그는 근무지 이탈 등의 이유로 해군에서 불명예 제대를 당한다.
애인도 잃고 군에서 잘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른 박인수는 ‘이왕 버린 몸’, 본격적으로 춤판에 뛰어든다.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댄스홀을 전전하며 그는 수십 명의 여성들을 유혹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의 여성들에게 해군 장교구락부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그는 제대 이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매너 놓고 춤 잘 추며 화술도 좋은 20대 중반의 미남 해군 대위는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상대였다.
남아 있는 사진상으로 봐도 그의 외모는 평균 이상이다.
해군 장교가 고급 댄스홀을 휘저으며 뭇 여성들을 농락하고 다닌다는 첩보에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고발자나 피해자가 없는 이상 박인수를 혼인 빙자 간음 등의 혐의로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1955년 5월 31일 박인수를 일단 공무원 사칭 등 혐의로 검거한 검찰은 땅에 떨어진 성윤리를 바로잡겠다는(?) 사명감을 발휘하여 집념 어린 수사를 펼친 끝에 여대생 2명이 ‘혼인빙자간음’으로 박인수를 고발케 하는 데에 성공한다.
검찰의 기소장에만 30여 명의 여자가 박인수의 ‘마수’에 걸린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실제로는 7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대갓집 따님부터 미장원 미용사를 망라한 여성 편력도 편력이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박인수에게 넘어갔다는 사실마저 커다란 화제가 됐고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 따위를 약속한 적이 없고, 자연스러운 코스일 뿐이었다.”면서 기염을 토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판사에게는 이색적인 편지가 쏟아졌다.
“정조는 아니고 키스만 빼앗겼는데 그만 병을 얻어 몸져 누웠으니 엄벌에 처해 달라”는 여자의 편지,
“딸이 증언대에 서면 자살할지 모르니 선처 바란다”는 어머니의 애절한 탄원,
“기소장에는 우리 친구가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12명의 여자 동기들의 연판장까지 웃을 수도 없고 인상을 쓰기도 뭐한 편지들이 연속부절로 도착한 것이다.
공판날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무려 7천 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장사진을 쳤고, 기마경찰대까지 출동하여 질서를 잡으려 했지만 재판정 안도 사람 살리라는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로 상태가 대략 좋지 아니하였다.
아우성을 치며 몰려든 군중에 기가 질린 판사는 공판 연기를 선언하여 군중들은 닭 쫓던 개가 되고 말았다.
이날 법원의 유리창은 30여 장이 깨져나갔고 무기연기 공고 후에도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1만 명을 넘긴 인파가 법원 앞을 어슬렁거리는 가관을 연출했다.
이렇듯 장안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정에서 권순영 판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판결을 내린다.
공무원 사칭죄는 유죄를 인정하여 벌금을 선고헸지만,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 판결문을 잠시 인용해 보자.
“법의 이상에 비추어 가치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다는 피해자의 구두 증언을 수사상에 밝혔을 뿐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 기각으로 무죄를 언도하는 바이며 법의 이상에 비추어 가치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는 것만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법은 보호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
법이 정조를 어떻게 보호하며 가치가 있는 정조와 가치가 없는 정조는 무엇인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이 판결은 어떤 이에게는 명 판결로, 어떤 이에게는 극히 반여성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진다.
박인수는 석방되지만 ‘재범’을 우려하여 감시가 따라붙었고 이후 대법원까지 가서는 끝내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대법원은 ‘정조’에 대한 판단을 달리 했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내놓은 정조가 아닌 터에, 여관으로 유인한 남자가 나쁘다.”는 것.
이 판례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 남성의 90퍼센트는 유죄 판결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오빠 믿지?”
따위는 매우 중대한 불법적 언사일 터.
각설하고, 권순영 판사의 판결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피해자의 인권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수 남성 논리”일까?
이에 대해 권순영 판사의 아들이 이렇게 반박한 적이 있다.
“국가의 공권력이 개인간의 은밀하고도 침범되지 않아야 할 성생활에 개입해서는 아니 되고 개입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에 그쳐야함이 옳다는 것이 선친의 생각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즉 권순영 판사의 생각은 정조의 ‘가치’ 문제가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의 존중이었다는 것이며,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남녀상열지사가 벌어진 이상 그 일방을 처벌함은 무리가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고인은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라 ‘성의 자기결정권’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그에 대해서는 법률이라는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그를 통해 박인수와 함께 성의 쾌락을 즐긴 여성들에게 ‘성의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감을 물은 것 아닐까요? .......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보수’가 아닌 ‘진보적’인 혜안을 지닌 판사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권순영 판사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으니 그 속내야 영원히 알 길이 없지만 한 번쯤은 시선을 위로 두고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라는 애매한 개념을 들이대어 피해 여성에게 아픔을 준 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인 판결“이라는 주장과 위 아들의 주장 중 어느 쪽에 더 공감이 가시는지?
박인수는 1년 형을 받고 출감한 후 댄스홀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하여 댄스홀을 차려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철저하게 은둔 생활을 해서 그 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살아있다면 여든이 넘었을 테고 어느 벤치에 앉아서 화려했던(?) 지난 날을 씁쓸히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인수 사건으로부터 40년 후, 성폭력 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우리 법전에서 '정조'라는 단어는 자취를 감춘다.
예전 형법에서 강간 추행 등은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됐지만, 부녀자에 한정해서 적용되는 '정조'라는 단어가 여성을 수동적이고 상대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여성 운동가들이 삭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정조’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데 40년이 걸렸다.
항상 다이나믹하고 정신 사나운 변화가 종횡무진해왔던 것이 우리 현대사지만 이런 예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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