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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삶 이야기

밥상머리 교육

by Ajan Master_Choi 2017. 7. 30.

 

"아버지 비고 무레이~”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실 때 이웃이 음식을 가져오면 어머니는 그러셨다.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고하고 먹으라는 뜻으로 어릴적부터 숱하게 들었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40여 년 전 시골에 사는 꼬맹이의 군것질거리는 참꽃부터였다.


“문디가 참꽃 속에 숨어 있다가 간 빼물지 모르까네 멀리 가지마레이~”


어머니는 문둥이가 병을 고치기 위해 참꽃을 따먹으러 오는 아이들을 잡아 간을 빼먹는다며 너무 깊은 산중에는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우예 빼묵는데?”

“막 간질러가 정신없게 만들어가 빼묵는다 아이가.”


나는 살짝 걱정이 일었지만 그래도 참꽃 맛을 보기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에는 똑같은 주의를 들은 또래들이 자신들의 간을 지키기 위해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자신들 보다 키가 큰 막대기가 대부분이었으나 게중에는 도회지에 사는 친척이 사준 총으로 무장한 아이도 있었다.

그 총은 동그란 플라스틱 총알을 넣어 쏘는 것이었는데 원래의 총알은 남아있지 않아 콩을 넣어 쏘는 총이었다.

새봄이 오는 산.

한나절을 뛰어다닌 우리는 서로의 시퍼레진 입을 보며 히죽거리다 내려왔고 내 손엔 참꽃이 한 움큼이 쥐어져 있었다.

문둥이에게 잡혀 간을 잃어버렸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빈 소주병에 꽂아 텔레비전 위에 놓아두기 위해서였다.

참꽃으로 시작한 군것질은 그 뒤로 찔레 순, 아카시아(정확하게는 ‘아까시’) 꽃의 꿀, 또는 ‘삘기’라는 풀의 속살을 질겅질겅 씹기도 했다.

이렇듯 시골에서의 군것질은 자연에서 얻는 그대로의 맛뿐이었는데 가끔은 호사를 누리는 경우가 있었다.

엿이 그중의 하나였는데 동네골목으로 엿장수가 들어오면 나는 고물을 찾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비료포대나 소주병 또는 떨어진 고무신이 있으면 딱인데 그것들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물건을 내 놓을 수도 없고 설사 내 놓는다 해도 아저씨는 받아주지 않았다.

해서 입맛만 다시곤 했는데 봄이나 가을 무렵이 되면 엿 먹을 일이 생기곤 했다.

동네 처녀 중에 누군가 시집갈 날짜가 정해지면 이바지음식을 집집이 나누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꼭 엿이 들어있었다.

그 당시 시골의 혼사는 봄 아니면 가을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이바지 음식이 들어올 쯤이면 아버지는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갖가지 재료로 만든 떡과 약밥, 과일, 그리고 엿을 앞에 두고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아버지 비고 무레이~”


어머니는 어김없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엿의 유혹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참지 못하고 표 나지 않게 집어 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마음에도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그렇게 달달하지는 않아 그 후론 먹지 않았다.

나는 어스름 저녁이 다가오면 마루에 앉아 대문간을 내다보거나 골목으로 나가서 목을 빼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마당에 소가 없으면 필시 논갈이나 밭갈이를 가셨을 터, 소방울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딸랑딸랑”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고 산 송아지가 이제는 커다란 일소가 되어 논 몇 마지기를 해치우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쇠말뚝에 소를 묶고 있는 아버지께 달려가 말했다.


“아버지요, **집 **가 시집간다꼬 물목(이바지) 왔니더.”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급한 심중을 헤아렸는지 허리도 펴지 않고 말씀하셨다.


“오야”


이 말은 ‘알았으니 먹어라.’는 뜻이다.

나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려 마루로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검정고무신 한 짝이 마당으로 날아가 뒤집어졌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40여년이 흘렀다.

오래전 그 시골아이는 50줄에 접어들었고, 허리도 못 펴고 대답을 강요당하신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30여년이 되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아이들이 생겨나니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백분의 일도 못하면서 애들 일이라면 가정사의 최우선이니 말이다.


요즘 여느 집을 막론하고 아이들의 가정교육 때문에 고민인 경우가 많을 게다.

예전보다 풍요로워졌고 교육도 더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존중을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해 하거나 또는 권위적이라고 하기도 한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학교나 사회에서가 아닌, 부모로서 꼭 시켜야할 교육을 뜻하는 것일 게다.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시절에는 부모가 따로 교육하지 않더라도 손위 형제들이나 친척어른들의 언행을 보고 배웠겠지만 핵가족화 된 지금, ‘밥상머리 교육’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지고 밝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초목이 짙어진 좋은 계절이고 먹거리가 지천인 시절이다.

혹,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면 한번이라도 더 마주앉아 나누셨으면 싶다.

그것이 너무 부럽지만 그리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2017년 7월 "황작, 黃 章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