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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매국노 이완용 처단하고자 정의의 칼 든 독립투사 "이재명"

by Ajan Master_Choi 2023. 3. 7.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노 이완용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같은 해 10월 26일 결행된 안중근 의거와 짝을 이루는 거사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의 일본 측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이라면,
이 일은 한국 측 원흉인 이완용의 처단 시도였기 때문이다.

핵심공적
1906년 미국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항쟁을 전개하고 그 후 매국노 이완용 처단을 시도했다.

주요약력

● 1887년 10월 16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
● 1906년∼1907년   미국의 한인 독립항쟁단체
공립협회 가입, 활동
● 1909년   명동성당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비수로 찌르고 일경에 피체
● 1910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공부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조국 구하기 위해 돌아오다


이재명 의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고향이 이북이기도 하지만 이른 나이인 24세에 순국했기 때문이다.
선생에 대한 판결문에 의하면, 선생은 1887년 10월 16일 평안남도 평양군 평양성 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평양의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노동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때는 공부만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선생이 미국 본토에 도착했을 즈음 을사조약 강제 체결 소식이 미국에 알려지고, 이에 대응하여 안창호를 중심으로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가 창림되어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다.
이재명 의사는 미국 본토로 건너온 직후에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에 동참했다.

선생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시기인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일제는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요했고 바로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이어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자 공립협회는 공동회를 개최하여 매국자 숙청을 결의하고 실행자를 선발했다.

이토 히로부미 제거를 시도하다

이때 이재명 의사는 실행자로 지원했다.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호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선생은 중국과 노령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김구와 만난 의사는 그가 장래에 무슨 일을 하려는가 물으니,

“지금 하려는 일은 매국노 이완용을 위시하여 몇 놈을 죽이고자 준비 중이다”

고 말하며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
의사는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월 융희황제의 서도(현 평안도) 순행 때 이토가 동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재명 의사는 이토를 처단하고자 평양역에서 동지 몇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토가 융희황제의 곁에 딱 붙어 있었기에 의사는 황제의 안전을 생각해 거사를 포기했다.

그 후 동지 김병록과 함께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다시 기회를 기다리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했다.
이토가 제거되자 이재명 의사는 원래 목표인 을사5적을 비롯한 매국적 처단을 추진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던 이완용 제거 작전

기회를 엿보던 의사는 연말이 되자 더 이상 기회를 미룰 수 없음을 알게 된다.
1909년 11월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공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1909년 11월 하순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와 야학당에서 여러 동지들을 모아 몇 차례에 걸쳐 실행 방법을 논의했다.

논의 끝에 이완용의 처단은 이재명 의사와 이동수, 김병록이 담당하고 김정익, 조창호는 일진회의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했다.
같은 해 12월 7일에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했는데 오복원, 박태은, 이응삼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 그리고 김용문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12월 22일 오전 11시 선생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매국노 이완용을 공격했다.

민족의 공적 이완용을 찌르다

이재명 선생은 이완용이 성당을 나와 인력거를 타고 가려할 때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를 제지하는 인력거꾼 박원문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선생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도망가려 하자 다시 어깨 등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나는 모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이 거사를 행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방관만 하느냐. 오늘 우리의 공적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

고 외치며 만세를 연창했다.
그리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담배를 청하여 유유히 피웠다고 한다.
법정에서 협조하고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물음에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

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낱낱이 들었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의사는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

며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선생의 굳은 신념을 보여줬고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의 나이 불과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