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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유시민컬럼 : 수모(受侮)를 견디는 힘

by Ajan Master_Choi 2023. 3. 6.

이재명 대표에 보내는 '잔인한' 고언과 응원

 

민주당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을 앞두고 있었던 2002년 초, 노무현 후보는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하던 내게 충청권 순회 일정 동행을 권했다.

이인제 후보가 대전광역시의 지구당사를 순회하는 날이었다.

충청권에서 독자적으로 당원을 불러 모을 역량이 없었던 노무현 선거캠프는 대전의 지구당위원장들과 협의해 이인제 후보가 떠나면 곧바로 해당 지구당사를 방문하는 ‘곁불 쬐기’ 작전을 준비했다.

우리는 첫 번째로 방문할 지구당사에 미리 도착해 입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이인제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쪽 당원이 전화로 그가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것 같다고 상황을 전해주었다.

한 시간을 헛되이 기다린 다음 발길을 돌린 노무현 후보는 쓸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정치는 중요하고 귀한 일인데, 정치인의 일상은 참 남루해요. 이건 뭐 아무것도 아니지요. 정치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모를 견뎌야 합니다. 정치가 그래요. 하하.”

정치인과 유권자 간의 정보 불균형

정치란 무엇인가?

넓게 보면 ‘국가의 기능과 권력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려는 개별적, 집단적 활동’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시민은 이런 의미의 정치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투표, 정당 가입, 집회 및 시위 참여, 댓글달기 같은 정치활동을 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 군수, 또는 지방의회 의원이 되어 국가의 기능을 바꾸고 권력의 작동방식을 변경하는 일을 직접 하려면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선거에 출마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직업정치인’이라고 한다.

 

직업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대의(大義)’에 헌신하며 직업인으로서 ‘소리(小利)’를 추구한다.

‘대의’는 정치적 이상과 사회적 선을 실현하는 것이고, ‘소리’는 공직이나 당직 등의 지위를 챙기는 일이다.

‘대의’를 완전히 외면하면 대중의 신임을 얻기 힘들고,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면 남 좋은 일만 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주로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을 ‘정치인’, 주로 ‘소리’를 챙기는 사람을 ‘정치업자’라고 하자.

이 글에서만 편의상 그렇게 나눈다.

직업정치인은 모두가 ‘정치인’인 동시에 ‘정치업자’이고, ‘정치인’이던 사람이 ‘정치업자’로 변하기도 하니, 그 둘을 두부모 자르듯 가를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판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직업정치인은 자신이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지만 유권자는 그렇지 않다.

주로 ‘소리’를 탐하는 정치인도 겉으로는 ‘대의’에 헌신하는 시늉을 하기 때문에 유권자는 정치인이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정치 서비스의 공급자인 정치인과 수요자인 유권자 사이에 ‘정보 불균형’이 있다는 말이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불신한다.

모든 직업정치인을 ‘정치업자’로 여기며, 말과 행동으로 분명한 반증(反證)을 제시하는 경우에만 대의에 헌신하는 ‘정치인’으로 인정한다.

수모를 견디는 방법

‘정치업자’는 수모를 잘 견딘다.

수모(受侮)는 ‘남한테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식당이나 백화점 직원들은 진상고객도 웃으며 상대한다.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생업과 일자리를 지키려고 모멸감을 억누르면서 수모를 견디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젊은이들을 안쓰러워하고 존경한다.

산다는 것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정치업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지역구 행사가 있거나 선거운동을 하는 날 아침, 그들은 ‘간과 쓸개를 빼서 베란다에 널어두고’ 집을 나선다.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유권자와 다투지 않는다.

웃으며 좋은 말로 응대하려고 노력한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베란다의 간과 쓸개를 걷어 다시 장착하고 혼잣말로 누군가를 욕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덜어낸다.

‘정치업자’는 수모를 견디는 힘이 뛰어나다.

반면 ‘정치인’은 그 힘이 약하다.

자신이 대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더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다시 말하지만 유권자는 모든 직업정치인을 일단 ‘정치업자’로 여긴다.

대중에게 ‘정치가’로 인정받으려면 오랜 시간 수모를 견뎌야 한다.

대의를 위해 작은 이익을 버리면서도 현실 정치판에서 밀려나지 않고 생존해야 한다.

수모를 견디는 능력이 없이 진보 정치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수모를 견뎠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에서 낙선한 후 민주당 대표를 하는 동안 경쟁하는 정당뿐 아니라 안철수‧박지원 등 민주당 내부의 반대세력에게 비열한 모욕을 숱하게 당했다.

나는 십 년 정도 직업 정치를 했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했다.

그러나 수모를 견디는 힘을 기르지는 못했다.

나는 정치로 살아가려고 정치를 하지 않았다.

정치를 위해서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그랬다는 말이다.

대중은 나를 ‘정치업자’로 여겼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런 시선을 오래 감당하지 못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기자들이 쏟아내는 적대적인 비판을 참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정치가 매우 중요하고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으로 정치를 선택한 분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한테는 정치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존경받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은 활동이었다.

대의에 헌신하는 훌륭한 인생보다는 즐거운 일을 하는 나다운 인생을 찾고 싶었다.

나처럼 수모를 견디는 힘이 약한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 정치를 하고 싶다며 의견을 물으면 거의 언제나 말리곤 한다.

이재명 조리돌림

요즘은 방송 뉴스와 포털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글이 막혀서 딴짓을 해야 할 때는 유튜브의 낚시, 바둑, 음악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 국회의 체포동의안 처리, 검찰이 기소한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체포동의안 찬성표와 무효표를 둘러싼 민주당의 내부 갈등에 대한 보도를 보고 싶지 않다.

거의 대부분이 친윤석열 성향을 보이는 언론의 저질 기사를 보는 게 괴롭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을 동원해 이재명 대표를 ‘조리돌림’하고 있다는 정도는 뉴스를 꼼꼼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통령이 검사 시절 한 말을 빌리자.

그는 ‘수사권으로 대선 경쟁자를 욕보이는 정치 깡패 짓’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가’인가 ‘정치업자’인가?

그가 어떤 정치적 대의에 어떤 방식으로 헌신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한으로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지키는 모습은 너무나 뚜렷하다.

그래서 ‘정치업자’에 가깝다고 본다.

국힘당과 그 전신인 정당 소속 대통령 가운데 ‘정치가’에 가까웠던 경우는 김영삼 대통령뿐이지 않나 생각한다.

국힘당이 당사에 자당 소속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걸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국민에게 ‘정치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 정당이 윤석열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칼럼에서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에 대한 무한수사를 진행하는 이유와 관련해 ‘감정설’과 ‘전략설’을 거론했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 상황은 ‘전략설’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다.

대통령은 체포동의 요구서를 국회에 또 보낼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분열 전략이 지난번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체포동의안을 가결하려면 민주당 국회의원 가운데 무효표가 아니라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이 지난번보다 열 명 넘게 많아야 한다.

자폭테러로 민주당을 혼돈상태에 빠뜨리기로 마음먹거나 민주당을 나가 신당을 만들 각오를 하지 않은 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의 비주류 국회의원들은 지난번 체포동의안 처리 때 이재명 대표에게 수모를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업자’여서 신당을 만들 배짱도 없고 총선에서 독자 생존할 능력도 없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라.

현 시점에서 야권의 대선후보는 실질적으로 이재명 하나뿐이다.

민주당원과 민주당 지지층의 압도적 다수가 이재명을 지지한다.

생존이 승리인 투쟁

내가 이재명 대표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 수모를 견디는 힘을 잃지 말고 정치적 법률적으로 생존하는 것이다.

내가 똑같은 상황에 있다면, 대표직을 내려놓는 데 그치지 않고, 국회의원직도 사임하고 아예 정치를 떠날 것이다.

이 문장을 어떤 ‘기레기’가 왜곡 인용해 제목 장사를 할지도 모르겠다.

 

“유시민 충격발언: 내가 이재명이라면 당장 정치를 떠날 것!”

 

이렇게 말이다.

나는 사석에서도 ‘기레기’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 기사를 쓰는 기자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기에 예외적으로 썼다.

정말 그런 짓을 한다면 ‘기레기’라는 말도 부족한 ‘기레기 중의 기레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언론 현실이 참담하다.

나는 수모를 견디는 힘이 모자라서 정치를 떠났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인간 이재명은 수모를 견디는 힘이 뛰어나다.

다른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 힘도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

‘깻잎 한 장 차이’로 대선에서 졌기 때문에 당하는 오늘의 수모를 견딜 힘이 그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하지 말고, 재판정을 드나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대표와 국회의원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가하는 ‘조리돌림’을 인간적 정치적 법률적으로 견뎌내기 바란다.

정치인 이재명은 생존이 곧 승리인 싸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민망하다.

나는 요즘 강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탁하면 발을 담그는 식으로 산다.

‘이재명의 싸움’을 논평할 자격이 되느냐는 힐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누구도 ‘이재명의 싸움’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을.

역사의 진로를 한 정치인의 생존 여부에 거는 게 무척 불합리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역사가 늘 합리적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 이재명에게는 잔인한 일이지만, 그 사람 말고는 누구도 그 짐을 질 수 없다.

그러니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잘 싸우라는 말이라도 건네야지.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5 

 

수모(受侮)를 견디는 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민주당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을 앞두고 있었던 2002년 초, 노무현 후보는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하던 내게 충청권 순회 일정 동행을 권했다. 이인제 후보가 대전광역시의 지구당사를 순회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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