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에서 노비로... 기구한 삶에 82세 장수까지 한 그녀
정순왕후 송씨(1440~1521년)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왕비로,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여흥 민씨의 딸이었습니다.
본관은 여산으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보호하던 김종서를 비롯한 신하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궁궐에는 단종을 보호하고 있던 혜빈 양씨가 있었기에 그는 완벽하게 왕실을 장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혜빈 양씨는 세종이 총애하던 후궁으로, 단종의 친모인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과 소헌왕후의 명으로 단종과 경혜공주를 맡아 길렀습니다.
유모로서 어려서부터 단종을 키웠기에 실질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 수양대군은 단종의 혼례를 추진하지만
명분에 맞지 않는다며 여러 신하들이 반대를 하게 됩니다.
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을 들어 단종의 결혼을 강제로 밀어붙입니다.
간택령이 내려지고 여러 규수가 후보에 올라오게 되었는데요.
이때 심사에 나선 사람은 수양대군, 효령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화의군, 계양군, 한남군, 숙빈 홍씨, 혜빈 양씨 등 왕실 어른과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이조 판서 정창손 등 여러 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이었고, 송현수의 딸이 단종의 왕비로 내정됩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친밀한 사이로 일찍이 그의 여동생이 수양대군의 막냇동생인 영응대군에게 시집을 갔기에 왕실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우가 있어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간택이 된 정순왕후는
1454년 음력 1월 열다섯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됩니다.
정순왕후가 간택이 된 배경에는 아버지 송현수가 수양대군과 친밀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로써 세종의 8남 영응대군 부인(계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친고모이자 시숙모가 됩니다.
1455년 단종의 지지 세력인 금성대군을 비롯한 측근들이 탄핵을 당해 죄인이 되자
단종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양위해 상왕이 됩니다.
이에 정순왕후도 의덕의 존호를 받고 왕대비가 됩니다.
피바람은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던 혜빈 양씨는 유배된 후 교수형을 당하게 되고,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도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장형 100대를 맞고 먼 지방의 관노가 되었습니다.
가족 역시 같은 곳의 노비가 됩니다.
결국 상왕 단종도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귀양을 가는 단종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그녀는 청계천 다리에서 남편과 이별하게 되는데요.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이후 두 사람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으며
나중에는 이름이 한문화되어 영도교가 됩니다.
친정마저 풍비박산이 나 오갈 데 없었던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자지초로 자주색 천연물감을 들여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에 따라 그녀가 사는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세조는 정순왕후에게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그녀는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여인들이 그녀의 집에 끼닛거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금지시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꾀를 내어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여자만의 작은 채소 시장인 여인시장을 열어 물건을 파는 척하며 먹을 것을 모아 정순왕후에게 몰래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이곳으로 추정되는 숭인초등학교 정문 옆 담벼락 아래에는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이 있었지만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여 지금은 철거된 상태입니다.
1457년 음력 10월, 부부가 생이별한 지 4개월 만에 남편 단종은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아버지 송현수도 처형됩니다.
단종 17세, 정순왕후 송씨 18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정순왕후는 평생 매일 아침저녁으로 앞산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동망봉으로, 훗날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
동쪽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는 의미로 그 동산을 동망봉이라 칭하고 친히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때 이곳이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그 바위는 소실되어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있고,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후 정순왕후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자
세조는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리고 그녀를 정업원으로 보냅니다.
정업원은 남편을 잃은 왕실 여인이 출가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입니다.
야사에 의하면
신숙주가 노비가 된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를
자기 집 노비로 달라고 세조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다가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택영이 쓴 역사서 '한사경'에서 다뤄지게 됩니다.
김택영은
“좌의정 신숙주가 노산군 부인(정순왕후)을 자기 노비로 삼고자 주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라는 글을 남기면서,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를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신숙주가 단종의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
이라고 평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야사로 문헌상 근거가 없어 사료로서의 가치 역시 떨어집니다.
다만 당시 세조를 선택했던 신숙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이 기록은 그를 비판하는 문학작품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는
역모로 몰락했던 자신의 가문을 세우고 높은 관직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종 대에 단종의 명복을 빌며 외롭게 지내던 외숙모 정순왕후를 안타까워하며
시양자(수양아들)를 되기를 자청해 성종의 윤허를 받게 됩니다.
이후 정순왕후는 정미수의 집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는데요.
그녀는 정미수보다 9년을 더 살다 중종 16년(1521년) 82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한 많은 삶을 마치게 됩니다.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조선 역대 왕비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뒤이어 예종, 성종 시대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이 폭정을 거듭하다 폐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해 첫 번째 아내 단경왕후 신씨와 헤어지고 두 번째 아내 장경왕후와 사별한 뒤 세 번째 아내 문정왕후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죽었습니다.
그녀의 장례는 대군 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졌으며 경기도 양주군 군장리에 묻히게 됩니다.
이후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권되기까지 177년간 시양자인 정미수의 가문인 해주 정씨 종가에서 제례를 모시게 됩니다.
중종의 재위 초,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단종을 복위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지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종대에 이르러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단종과 그의 복위를 거듭 건의합니다.
결국 1698년 숙종의 명으로 단종과 정순왕후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게 됩니다.
정순왕후의 무덤도 왕릉으로 격상되면서 능호가 사릉으로 정해지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입니다.
그녀의 무덤은 제사를 모신 해주 정씨 묘역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왕릉이 조성되면 인근 10리 안에 있는 무덤들은 권역 바깥으로 강제 이장되어야 한다는 관례에 따라 해주 정씨의 문중의 묘들이 모두 옮겨져야 할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정에서는 그동안의 해주 정씨의 공을 인정해 다른 무덤들을 이장하지 않고 그녀의 무덤을 왕릉으로 조성하게 되는데요.
이는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한 예외가 됩니다.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의 모든 가지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는 마음이 소나무에 담겨 그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라는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에 따라 현대에 들어와 영월에 있는 단종과 남양주에 있는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대신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겨 있던 소나무 하나를 남편이 묻힌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사후 478년 만이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사연은 조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기구함은 신앙이 되어 그녀는 무속의 신중 한 명인 송씨부인으로 숭배됐습니다.
송씨부인은 한이 맺혀 슬픈 조선의 여인을 상징하는 정순왕후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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