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한창 더웠던 7월 31일,
한 할머니가 판문점을 거쳐
북에서 남으로 넘어 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은 아니고 남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용길 장로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전에 돌아가신
통일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의 아내였지요.
역시 한 해 전 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1주기를 맞아 남쪽 정부의 허락없이
북한을 방문한 뒤 귀환하는 길이었습니다.
판문점 이북 지역에는
한복 곱게 차려 입은 북한 처자들이 운집해서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들었고
흰색 옷차림의 박용길 장로는
판문점 북측 지역을 떠나 결연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떼면서 남쪽을 향했습니다.
이미 한국의 공안당국은
사전구속영장을 손에 움켜쥐고서
박용길 장로의 귀환을 벼르고 있었지요.
저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감상적 통일론에 동의하지 않고,
그런 섣부른 주장들이 오히려 통일을 더 어렵게 한다고 확신합니다.
박용길 장로가 돌아오던 뒤안길에 서서
조국통일 외치며 눈물 흘리던 북한 여성들이
진실로 통일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즉 박용길 장로가
굳이 김일성 주석 1주기에 참석하겠다고
북한을 방문한 일에 찬성하지도 않았고
그리 호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감옥행이 보장된 남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오는 박용길 장로를 보면서
사뭇 묘한 느낌에 휩싸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께 외람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박용길 장로의 그날 모습이
무슨 통일의 어머니라든가
조국 통일의 기수의 행진이라기보다는
평생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성의
당차고 솔직한 행보로 보였거든요.
마치 그 남편에게 뽐내고 있는 듯 보였거든요.
만방에 과시하고 있는 듯 했거든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보 보고 있소? 나 당신 대신 갔다 왔어요.”
3.1운동이 있던 해
구한말 기마장교의 딸로 태어나서
좋은 교육받고 일본 유학까지 갔던 박용길은
1939년 4월,
일본 관동지역 조선 신학생 모임에서
허약해 보이는 유학생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마가 넓고 잘 생긴 얼굴이어서 금방 눈에 띄었던”
남자였지요.
그에 대한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합니다.
“만주국 황제 부의같았다.”
만주국 황제 부의라면
2018년 세상을 떠난 세계적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명작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아니겠습니까.
영화 속 찌질한 모습과는 달리
1930년대 말엽, 부의는 미남의 대명사였던 모양입니다.
아닌게아니라
문익환 목사의 젊을 때 사진,
동그란 안경테를 쓴 얼굴을 볼작시면
마지막 황제 푸이와 비슷하기도 하고,
영화 배우로 일가를 이룬 아들 문성근보다도 훨씬 낫다 싶은 외모의 소유자입니다.
이 청년의 눈도
끊임없이 밝고 명랑했던 여자 신학생
박용길을 계속 쫓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박용길의 이미지를
문익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연분홍 코스모스!”
이 이미지는 그 후로도
오랫 동안 박용길의 애칭이 됩니다.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둘 사이에는 상당히 튼튼한 장벽이 솟아 있었습니다.
바로 문익환의 건강 문제였지요.
박용길의 언니
박남길의 회고입니다.
“집안 어른들이 동생을 만나러 온 분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봤다. 얼굴이 창백하고 몸이 아주 가느다란 미남이었다. 음성이 얼마나 가늘던지 어른들은 몸이 저렇게 약한 청년에게 어떻게 딸을 주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문익환 평전, 김형수 저, 실천문학사)
문익환은
단순히 ‘가느다란’ 정도가 아니라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박용길의 집은 꽤 유복했고
박용길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유독 극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딸바보’라고나 할까요.
금이야 옥이야 기른 딸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데려온 남자를 두고
박용길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허여멀건하니 잘생기긴 했는데
글쎄 문익환은 폐결핵 환자였거든요.
“누구든 내 딸과 사귀려거든 병원에서 발부하는 신체검사 통지표를 가져오라!”
아버지의 서슬은 쑥물처럼 시퍼랬고
박용길의 집안은 일치단결 ‘문익환 축출작전’(?)에 돌입합니다.
문익환이 박용길과 만나자 하고 찾아왔을 때
박용길의 형부는 박용길을 차에 싣고 약속 장소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폐병 환자 만나지 말아요 처제!”
또 문익환이 ‘연분홍 코스모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박용길의 가족들에 의해 인터셉트당했습니다.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던 문익환도 낙담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와중에 코미디 영화 같은 일도 생깁니다.
기다림에 지친 문익환이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고 전보를 쳤는데
박용길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하는 답전을 보내 온 겁니다.
박용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등 경황이 없었다는 뜻이었는데 문익환은 ‘슬픈’이라는 단어만 보고 그만 이별 선고를 받은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좌절해 버렸던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연분홍 코스모스’가
문익환의 마음 속에서 시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화사하게 피어나
문익환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뒤덮어 버렸으니까요.
집안에서 결혼 얘기가 나왔지만
문익환은 이미 ‘연분홍 코스모스’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그득한 붉은 상사꽃이 돼 있었습니다.
이러다 아들이 생으로 늙는게 아닌가 걱정된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는
문익환의 동생 문동환을 비롯하여
박용길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익환 구원(?)을 호소하는 편지 공세를 펼치게 합니다.
박용길 역시 남자라면
문익환 외에는 달리 무게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병자와 결혼해선 안된다.”
는 어머니의 유언을 들었던 박용길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시나브로 스며들었던 사랑이
무럭무럭 커 가는 모습을 발견했고
문익환에게 자신의 일생을 걸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폐병 환자 사위를 볼 수 없다는
가족들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하지요.
“그분이 6개월을 살아도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다행히도 결혼 직전 문익환은
폐결핵 완치 판정을 받았고
두 연인은 천신만고 끝에 결혼에 골인합니다.
사람의 연이란 게 그렇지요.
미칠 것 같은 악연도 있지만
어떻게 구정물을 끼얹어도 아름답기만 한 가연도 있는 겁니다.
천재는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저 동시대에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감을
행운으로 아는 게 낫다고 했던가요.
이른바 천생연분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부러워해 봐야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죠.
그냥 여러분들은 전생에 을지문덕이나 잔다르크셨군요,
나라를 두어 번 구하셨군요
치부하는 게 속 편하지 않겠습니까.
문익환과 박용길 커플도
천생연분이라는 칭호에 한 점 모자람없는 짝이었습니다.
“6개월만 살더라도 그와 결혼하겠다.”
는 박용길의 결단은
문익환을 반 세기 동안 그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반세기의 전반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한반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든 전쟁통에서도
문익환 목사의 가족들은 무사했고
영어에 능숙한 남편은 최소한 식솔들을
바닥에서 구르게 만들지 않을 깜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목사로,
신학대학 교수로,
성서 번역의 권위자로서 순탄한 꽃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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