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11일을 나는 꽤 선명히 기억하고 있어.
아니 날짜라기보다는 그날의 이벤트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1978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전이 펼쳐지는 날이었거든.
나는 밤늦게 펼쳐지는 중계를 보고 싶었지만 잠들고 말았지.
다음날 일어나서 축구 결과를 물으니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나는구나.
“이란이 문제가 아니라 이리에서 난리가 났네.”
그렇게 나는
이리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다.
처음에는 이란처럼
외국의 어디쯤일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더구나.
전라북도 이리역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도시가 쑥밭이 됐다는 뉴스가
그야말로 주먹 같은 활자와 굉음 같은 육성으로 전달되기 시작했지.
이리는 이후 익산으로 그 지명을 바꾸게 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이리역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굵직하고 뚜렷하구나.
이리역 반경 500m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1㎞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다.
반경 8㎞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 있겠지.
사망자 59명,
부상자 1,158명과 함께
8000명 가까운 이재민을 발생시키면서
해방 이후 최대의 폭발 사고라는 악명을 떨친 이리 참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무책임과 허무할 정도의 안전불감증,
그리고 당시 만연해 있던 부정부패까지 골고루 결합돼 일어난 인재였어.
몇년 전 열린 한강 불꽃 축제를 주관한 건 한화그룹이야.
이 한화그룹의 예전 이름은 ‘한국화약’이었다.
6,70년대 이 회사는
한국 내 사용되는 각종 폭발물을 거의 독점적으로 취급했었지.
광산이든
건축 현장이든
필요한 화약을 공급했고
한국화약 직원들은 각종 폭발물을 싣고서 전국을 누볐어.
그날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한
폭발물 수십 톤을 싣고 온 신무일이라는 이도 그 중 하나였지.
원래 화약류 등 위험물의 경우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통과시키는 게 기본 원칙이었어.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는 이리에 발이 묶였고
제때 화차를 배정받지 못했어.
이유는?
철도 직원들이
‘급행료’를 챙기고 있었던 거야.
나의 경험으로
이 ‘급행료’를 설명해 주지.
어려서 내가 할머니 심부름으로
동사무소에 간 적이 있는데 줄이 꽤 길었어.
그런데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척척 서류를 떼 가는 거야.
따로이 마련된 바구니에 돈을 넣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게 ‘급행료’였지.
동사무소에서조차 버젓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더 큰 이권이 걸린 데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
이 급행료 거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관계로
즉시 통과돼야 할 화약 실은 기차가
마냥 역에 ‘대기’하게 됐던 거란다.
호송원 신무일은
이렇게 얘기했어.
“화차배정담당 역무원들에게 1인당 3백~5백원씩 주었다.”
(1978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
더하여
이리역에서
오래 머무른 이유.
“전날 (10일) 밤 10시 25분에는 출발을 시켜야 하는데 22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김제로 가는 비료 화차를 바꿔치기해 먼저 보냈다.”
(1978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
이런 역무원들의 급행료 장난에
하루를 공쳐 화가 난 호송원 신무일은
역전에 나가 막걸리 한 되와 소주 한 병을 마시고 화차에 들어와서 잠을 청했어.
그런데 어두워서 켜 놓았던 양초를 끄지 않았지 뭐냐.
수십 톤 화약더미 앞에서 말이다.
촛불이 침낭에 옮겨 붙으면서
온몸이 뜨거워진 신무일은 퍼뜩 잠을 깼지.
담요를 휘둘러 어떻게 꺼 보려 했지만
불은 어림도 없다는 듯 거세게 타올랐어.
불길 속에서 신무일의 머리 속에는
‘다이너마이트’ 여섯 글자가 날름거리고 있었을 거야.
그는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지.
“불이야!”
근처에 있던
역무원 하나가 소리쳤어.
“무슨 화차요?”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요.”
기절초풍한 역무원은
역 사무실로 뛰어들어
“빨리 대피하라!”
고 알리고 피신했는데
그로부터 몇 분 못가서 대폭발이 일어났다고 해.
끔찍하도록 어이없는 사고였지.
그러나
그토록 썩은 내가 진동하고
무책임이 난무하던 현장 속에서도
사람다운 사람들은 있었다.
그날 이리역의 철도검수원 (철로와 열차의 중요 부분을 점검하고 고장 부위를 수리하는 분들) 18명은
1백여 열차의 검수를 끝내고 쉬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불이야! 소리가 났고
검수원들은 반사적으로 불이 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방금 이리역의 전 열차를 들여다보고 온 사람들이었어.
자신들이 점검했던 화차 안에 있는 물건에 불이 붙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을리가 없지.
하지만 그들은 달려갔어.
신발을 벗고 쉬던 사람 11명은 좀 처졌지만
신발을 신고 있던 7명의 검수원들은 수백 미터 떨어진 화재 현장까지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 중의 두 명이
먼저 화차에 닿았고 고함을 질렀지.
“큰일났다!”
다이너마이트가 실린 화차임을 알았겠지.
그 순간이라도 “도망쳐”라고 하며 뛰어나왔으면
살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철로로 내려와 자갈과 흙을 주워들어 뿌렸어.
이어 도착한 다섯 명도 합세했지.
이미 독기를 내뿜기 시작한 불길에
고작 열 네 개의 손바닥이 뿌리는 모래는 아무 소용이 없었어.
한 명이 뒤를 돌아보면서 외쳤어.
“양동이하고 물 좀 가져와. 소방서에 연락하고.”
그러나 그 순간 화차는 대폭발을 일으켰어.
불길처럼 눈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검수원들은 그들이 사랑하던 철로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
수십 미터 뒤에서 따르던 동료들이 폭발 후 정신을 차리고 목놓아 동료들을 불렀을 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그 아수라장에는
이리역 운전조역으로 근무하던 송석준도 있었다.
그는 폭발 직후
그 폭풍에 휘말려 나가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어.
저승인지 이승인지조차 분간 안갈 상황이었지만
용케 정신을 차린 그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잠시 뒤 이리역에 들어올 특급 열차였어.
이 생지옥에 수백 명이 탄 열차가 들어온다면?
그는 미친 듯이 철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어.
1킬로미터 가까이 내달린 끝에 특급 열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웃옷을 벗어 흔들었어.
제발 보아다오.
이걸 보라고.
가면 안된다고!
목이 쉬도록 소리도 질렀겠지...
천만다행히도
특급열차는 송석준의 몸부림을 보았어.
특급열차는 긴급 정차했고
열차에 타고 있던 6백명의 승객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불지옥의 문턱에서 구원받게 됐지.
송석준의 이름은
오늘날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나는 ‘목숨 걸고’ 뭔가를 한다고
쉽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솔직히
자기 몸보다,
자기 한 목숨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겠니.
하지만 세상 살면서
자신에게 가해질 불이익을 무릅쓰고,
편안함을 포기하고서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닥친다.
항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어.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 자리를 지켜야 하고,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값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서야 할 때가 있어.
불 붙은 화약 열차에 달려가
모래를 뿌린 일곱 명의 검수원들 (이외에도 이리역에서는 16명의 철도원이 순직했다)처럼,
폭풍에 휘말려 실신하고도
기를 쓰고 달려 옷을 벗어 흔든 철도원처럼 말이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나는 우리 역사가 이만큼이나 존재하고 나아올 수 있었다고 믿어.
급행료 장난을 치며
주머니를 채운 이들이나
화약더미 위에서 양초 켜고 잠드는 정신 나간 군상들이 그득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아무리 큰 어둠도
작은 빛을 이길 수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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