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대를 서술하거나 단편적으로 묘사한 책이나 글들을 간혹 읽으면 절로 한숨이 난다.
57년 전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다리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켰던 이가 또 한 번 헌정을 유린하고, 그 이름도 왜색 가득한 유신을 선포한 후 등장했던 폭압과 질식의 시대에 철모르는 어린아이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하늘이여 이래도 됩니까?를 물으며 사기를 썼다는 사마천처럼 비장하게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이런 일이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를 가진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었다는 자체가 비통하게 신기하고 괴롭도록 새롭다.
그러나 찜통 속인 양 답답하면서도 한 줄기 강바람처럼 뇌리를 식혀 주는 사실은 그 암흑의 시대에도 참으로 감동적인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의로운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말과 행동의 흐름은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신 헌법을 비판만 해도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전제 왕조의 왕법과 같은 법이 시행 중이었고, 실제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대법원 판결 다음 날 사형대에 목이 매달렸지만 그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유신에 맞서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원이 전달한 메모를 보고 판사가 방망이를 두드리던 시절, 학생들은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법정에 끌려온 한 교수는 이런 감동적인 최후 진술을 했다.
"“… 이 법은 아무리 지키려 하여도 지킬 수 없는 법이라고 봅니다. 나를 풀어주시어 밖에 나가도 유신을 반대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올 것이 명백한 터에, 어찌 무죄 석방으로 이 자리를 면하게 되기만 바라겠습니까? 들락날락하지 않고 그냥 눌러 있는 것이 본 피고인이 원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무슨 죄를 주셔도 불평 없이 감수할 것이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작게는 판사에 대한 경멸이었고 크게는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재판정에 그를 세웠던 정권에 대한 조소였다.
요즘처럼 웬만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분위기도 아니었고,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윗도리 걷어올린 배짱이였다.
모르긴 해도 요즘 말썽 많은 대법관 정도는 역임하지 않았을까 싶은 충성스런 판사는 그 교수에게 계획 살인범에게나 내릴 법한 15년 형을 내렸다.
말이 15년이지, 그건 박정희가 한강 다리 건너 온 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세월과 3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 세월이 어느 세월이었더냐, 그 말도 안되는 징역을 선고받고도 교수는 태연했다.
오히려 실실 웃으며 항소마저 포기했다.
15년 동안 감옥에서 썩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다시 들어올 감옥이라면야 30년인들 의미가 있으랴.
그 넉넉함에 교수의 누나가 화답했다.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동생의 징역을 감축했다.
"으하하...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이 영화같은, 아니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며 천재적인 시나리오 작가라도 상상못할 이런 장면을 실제로 연출한 이는 바로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동길이었다.
그리고 그 누나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이었다.
저 김동길 교수의 자랑스런 수염이 어느 세월에 황당한 변절의 상징으로 화하였는지를 굳이 되뇔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 정주영 회장의 노망의 세월에 어떻게 얽혀서 형님 동생하다가 참담한 배신의 노래를 목놓아 불렀는지를 짖궂게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새 그가 그토록 여유있게 맞서던 폭압의 정치 체제를 요순 세월로 추앙하는 이들의 대표 선수가 되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기어코 상기시킬 마음도 없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내 자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공포의 세월, 그 공포에 능글능글하게 맞서며 "재판장님 이게 뭡니까?"라고 되묻던 어느 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의 용기일 뿐이다.
그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애써 재연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랴.
어디 그 뿐이랴.
유신의 암흑 속 촛불과도 같았던 전직 대통령 윤보선, 조상의 친일 경력을 숨길 수는 없으나 그 재산을 털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던 그는 희한하게도 5월 광주 후 대머리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였고, 정론직필의 상징이었던 천관우도 대머리 휘하의 직함을 맡았다.
구글로부터 국제 망신을 당하고서도 국내법으로 구글을 어떻게든 단속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최시중 전 방통원장은 용감한 기사 하나를 실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그 상관이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의 고문을 당했었다.
김대중을 살리려고 한 고육지책이었다고는 하지만 강원룡 목사도 불러도 불러도 적개심만 끓어넘치는 대머리 앞에서 머리 조아리며 임명장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일일이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 마누라 생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빈약한 두뇌에 그들이 어떻게 변했고 또는 본의아니게 변해야 했고, 혹자는 아직도 살아남아 어떤 추태를 보이고 있는지를 집어넣을 깜냥이 마련되지 않은 탓이다.
나는 그들의 아름다운 과거만 해도 기억하기에 벅차고, 떠올리기에 힘겹다.
뭣하러 그들의 아름답지 못한 후일까지 곱씹으며 인간들 별 수 없다고 탄식해야 하는가.
지금 나 사는 모습이 그들의 아름답던 지난 날에조차 훨씬 미치지 못할 바에야.
그리고 그들의 변신을 따를 마음도 능력도 없는 바에야.
그리이스의 현자 솔론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에게 "누구든 죽을 때를 보라. 그때 행복하게 눈을 감는 자가 행복한 자이다."라고 가르쳤다.
돌려 말하면 그가 죽어 관이 나갈 때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때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사람이 드물다면, 대개 사람들은 망자의 좋았던 시절을 되새기며 그 시절 그가 뿌린 영향을, 그가 전달했던 힘을, 그가 보여준 감동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 어떠하였는지를 한사코 지적하는 것이 무에 즐거울 것인가.
나는 지금보다 30년은 젊었던 시절, 대담했던 김동길 교수를 마음 속에 저장한다.
그 순간, 그는 지구상에 누구도 따르지 못할 용기와 여유의 상징이었다.
그가 어떻게 변하였든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국회의원 신지호가 어느 정도로 악랄하게 과거를 부정하는가를 모르지 않으나 나는 그가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를 물었던 진지한 필자로서의 그를 없애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명석했고 누구보다 뜨거웠던 젊은 날의 김문수도 그의 오늘이라는 페인트로 덧칠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의 오늘은 실망스럽다 해도 그의 과거는 그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의 변절이 실망스럽다 해도 변절 이전은 그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의 변절이 그의 과거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변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누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변절을 두려워한다.
내가 존경하는 과거에 대한 오명이 축산 폐수처럼 주위를 휘감기 때문이다.
변절은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변절 이전의 그만큼도 내가 살아가고 있을까?
변절할만한 삶이나마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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