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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귀주대첩(龜州大捷)

by Ajan Master_Choi 2004. 2. 19.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음모로 목슴의 위협을 느낀 목종은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서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궁을 수비하도록 했다.

목종의 명을 받고 개경에 도착한 강조는 목종을 퇴위시켜서 양국공으로 강등시키고 대량원군 왕순을 왕(현종)으로 옹립하고 천추태후의 아들과 김치양은 죽이고 천추태후는 귀양을 보냈다.


그 무렵 요나라(거란)는 993년 제1차 침입 때 서희의 언변에 빠져서 강동6주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준것이 억울했는데 고려는 강동6주의 영유권을 받고도 북송과 화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데에 불만이 많았다.

또 요나라는 강동6주의 군사적 가치를 깨닫고 강동6주를 탈환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이었다.


1010년 요나라는 서북면도순검사인 강조가 왕인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자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40만 대군를 이끌고 2차 침입을 감행했다.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2차 침입을 감행하자 강조는 자칭 행영도통사가 되어서 군사를 몰고 통주(지금의 평북 선천)에서 요나라군과 맞서 싸웠으나 대폐하고 강조는 요나라 군사에게 포로가 되었다.

요나라는 강조에게 요나라로 귀하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강조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사사되었다.


요나라 군사들이 계속 남하하자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몽진길에 올라서 전라도 나주로 도망을 가고 개경은 몇일 만에 요나라 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요나라는 급히 남하하는 바람에 강동 6주인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의주와  흥화진, 구주, 서경(평양) 등 요새를 함락하지 않고 개경까지 들어온 상태에서 현종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보급품이 차단되고 역습을 당할 위험성이 컸지자 요나라는 고려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고려 국왕이 요나라에 입조하여 강동 6주를 반환하고 강화조약을 맺겠다는 약속을 받고는 급히 철수를 했다.


그 후로 고려는 요나라와 약속한 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요나라는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1014년 통주와 흥화진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번번히 고려군에 패하고 물러났다.


1015년 4월 거란은 야율행평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서 강동 6주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하자 고려는 야율행평을 억류하였다. 

그 해 9월 요나라는 이송무를 다시 사신으로 보냈으나 고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요나라는 늘 송나라(북송)를 침략할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요나라는 연운16주(지금의 중국 북경 지역)를 둘러싸고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압록강 유역과 요하 하류에서 여진족과 발해유민이 늘 문제를 이르키고 있는 상황에서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고려는 요나라의 큰 위협이 되고있었다.

 

그래서 요나라는 송나라를 치기전에 먼저 고려를 침으로써 배후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 후 요나라는 강동6주의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고려는 이를 거절하자 1018년 12월 요나라는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군사 10만을 동원해서 압록강을 건너서 제3차 침입을 감행했다.


한편 요나라의 계속되는 강동 6주의 반환 요구와 연이은 침입으로 골머리를 알던 고려 조정은 문하평장사 겸 서경유수 강감찬을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총사령관으로 전군을 총지휘하도록 하고 대장군에 강민첨을 부원수에 내사사인 박종검를 임명하고 병부낭중 유삼을 병마판관으로 삼고 조원을 시랑으로 삼고 우간의대부 김종현을 병마판관으로 삼아서 강감찬을 보좌하도록 하고 20만 8,000명의 군사를 청천강 남쪽의 영주(평안남도 안주군)에 배치하고 있었다.


1018년 12월 요나라 성종은 동평군왕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소허열을 부사령관으로 야울팔가를 도감으로 임명하고 10만 명을 동원하여 고려 정벌에 나섰다.


요나라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남하하자 강감찬은 다음과 같은 방어책을 세웠다.


1) 서북계(고려의 북서쪽  행정구역으로 강동6주) 남북로의 각 방어 지역에 배치된 부대는 요나라 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성을 지키는 방어을 우선으로 하되 철수하는 요나라 군대를 공격할 태세를 항상 갖춘다. 

2) 상원수 강감찬은 영주(평안남도 안주군)에 총지휘소를 두고 부원수 강민첨, 병마판관 김종현과 함께 방어군 주력 부대를 지휘하여 요나라 군대가 청천강 이남으로 침공하는 것을 저지한다. 

단, 전투상황에 따라 흥화진 또는 귀주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되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요나라 군사의 남침 기도를 무산시킨다. 

3) 시랑 조원은 요나라 군사가  청천강 이남으로 침공할 경우에 서경(평양) 이남 각 성의 군사 지원을 받아서 서경을 방어하고 요나라 군사가 대동강 이남으로 진출을 못하게 저지한다. 

4) 병마판관 김종현은 기병부대를 이끌고 서북계 남로의 통주에 자리하고 서북계 남북쪽 양대 경로의 방어선이 뚫리게 될 경우를 대비한다.


(부원수 강민첨 장군)



압록강을 건너온 요나라군의 소배압은 정찰 기병을 풀어서 서북계 남로와 북로로 정찰병을 보내서 진격 예상로를 살피고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는 각성을 피해서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해서 현종을 생포  하기로 하였다.

소배압은 군대를 두개로 나누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1군인 본군은 소배압이 직접 통솔하고 보주에서 서북계의 북로로 진격하고 2군인 별군은 서북계의 남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상원수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의 삼교천에서 기병 1만 2,000명을 산골짜기에 미리 매복시켜 놓고 밧줄로 소가죽을 꿰메서 삼교천 물을 막고 기다렸다가 요나라군이 삼교천을 건너자 소가죽으로 막아 두었던 물을 터놓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을 동원해서 요나라 군사 수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12월 하순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진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에서 5천 여명의 요나라 군을 죽였다.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1만 여명의 요나라 군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상원수 강감찬은 1019년 1월 2일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병사 1만 여명을 주고 개경으로 가서 개경을 지키게 하고 동북계에 있던 군사 일부도 개경으로 이동시켜서 개경을 방어하게 하였다.

1019년 1월 3일 요나라군은 개경 북쪽 40Km 떨어진 신은현에 도착하자 고려는 개경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개경이 싸울 준비를 마치고 북쪽에서 고려군이 개경을 지키기 위해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배압은 신은현에서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야율호덕을 고려 진영으로 보내서 군사를 철수시킬테니 길을 열어달라는 허위 협상을 하여 고려 진영을 안심시키고는 한편으로 소배압은 현종을 생포하라고 정예 기마병 300명을 개경으로 출동시켰다.


그런데 고려는 야율호덕의 말이 거짖임을 눈치체고는 경계를 강화하여 요나라 기마병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을 지날 때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