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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2001년 9월 11일 테러....

by Ajan Master_Choi 2016. 9. 24.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최악의 9.11 테러가 발생한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위기의 순간,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연을 소개합니다.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 절로 눈시울이 붉어질 것입니다.

 

우리 엄마는, 여러분 대부분이 알고 계시는, 에어캐나다 항공사에서 일하는데 한 동료로부터 이 글을 받았어요.

델타항공 승무원인 나짐(Nazim)씨가 쓴 거예요.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5시간 떨어진 북대서양 상공을 날고 있었고, 나는 승무원용 좌석에 앉아 쉬는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커튼을 거칠게 열어젖히더니 기장이 찾으니 당장 기장실로 가라고 말했다.

기장실에 발을 들인 순간, 경직된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기장이 내민 종이 한 장을 읽고 나서, 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애틀랜타에서 우리 여객기로 보낸 이 메시지에는 "미국 본토로 가는 모든 항로 폐쇄. 최대한 빨리 가장 가까운 공항에 착륙할 것. 목적지 보고 요망."이라고만 적혀있었다.

 

운항 관리사가 공항을 지정하지 않고, 비상 착륙 지시를 내리는 것은 해당 항공기 기장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고, 즉시 착륙 가능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현재 가장 가까운 공항은 항공기 진행 방향의 오른쪽 뒤편으로 644km 떨어진 캐나다 뉴펀들랜드주 갠더(Gander)시라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 비행기는 캐나다 관제탑에 착륙 허가 요청을 보낸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갠더로 직진했다.

관제탑은 즉각 허가를 내줬는데, 확인 절차 없이 곧바로 착륙 허가가 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 기내 승무원들은 비상 착륙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와중에 애틀랜타 측으로부터, 뉴욕에서 테러가 터졌다는 두 번째 메시지를 받았다.

 

모든 승무원에게 갠더로 간다는 정보가 전달됐고, 우리는 착륙을 위해 기내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알렸다.

몇 분 뒤, 기장실로 돌아간 나는 비행기 몇 대가 납치돼 미국 전역에서 건물을 들이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승객들에게 당분간 거짓말을 하기로 한 뒤 기내 방송을 했다.

기기 결함이 발견돼 갠더에 착륙한 뒤 검사를 해야 한다고, 착륙 이후 추가 안내를 하겠다고 말이다.

승객들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태가 발생한 지 40분 만에 우리 비행기는 갠더에 내렸다.

그 공항은 이미 전 세계에서 몰려온 다른 비행기 20여 대로 북적이고 있었다.

진입로에 착륙한 뒤 기장은 다시 안내 방송을 했다.

 

"승객 여러분, 우리 주변의 항공기들이 모두 기기 결함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착륙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과 탄식이 이어졌다.

그때 현지 시각이 오후 12시 반(미 동부 표준시 오전 11시)이었다.

 

갠더 관제탑은 우리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내부인은 아무도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었고, 외부인은 비행기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오직 공항 경찰차만이 다가와 우리를 살펴보고 다음 비행기로 넘어갈 따름이었다.

이후 한 시간에 걸쳐 북대서양 항로가 모두 폐쇄됐고, 미국 국적기 27대를 비롯한 전 세계 항공기 53대가 갠더에 내렸다.

우리는 모든 비행기가 한 대씩 순차적으로 승객을 내릴 예정이며, 외항사에 우선권이 있다는 안내를 들었다.

 

우리는 미 국적기 중 14번째였고, 대략 오후 6시쯤 내리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비행기 라디오를 통해 뉴스가 조금씩 전해졌고, 뉴욕 월드트레이트센터와 워싱턴 DC 국방부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사람들은 앞다퉈 핸드폰을 꺼냈지만 캐나다는 미국과 통신 시스템이 달라 연결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연결된 사람들은 캐나다 교환원에게 미국과 연결되는 전화선은 폐쇄됐거나 통화 중이니 다시 걸어달라는 안내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늦저녁, 4번째로 납치된 비행기의 충돌로 인해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붕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잇따른 충격으로 승객들은 매우 지친 상태였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변을 보시라, 우리만 이런 궁지에 몰린 게 아니다'라고 상기시켜준 덕분이었다.

주변의 비행기 52대에 탑승한 승객들의 처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또 비행기가 캐나다 정부의 관할 아래 있고, 그들의 온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약속한 오후 6시가 되자 갠더 공항은, 우리 승객들이 다음 날 아침 오전 11시에 내리게 될 거라고 알려줬다.

이 소식에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승객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였고, 비행기에서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갠더시의 총인구 수는 1만400명이다.

여기로 항로를 돌려 임시 체류하게 된 승객은 1만500명에 달한다고 적십자사는 전했다.

우리는 다시 공항에 모이라는 지시가 있기 전까지 당분간 호텔에서 편히 쉬라는 안내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 사태가 터진 지 24시간이 지나서야, 호텔에 비치된 TV를 통해 고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게 됐다.

기다리는 와중에 우리는 동네를 거닐며 지역 주민들의 호의를 만끽했다.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불시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모두 이틀 뒤인 14일 오전 7시, 공항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을 때까지 퍽 즐겁게 지냈다.

오전 8시 반까지 모두 공항에 집결했고, 오후 12시 반에 애틀랜타로 출발해 오후 4시 반, 마침내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갠더는 동부 표준시보다 1시간 30분이 빠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순히 우리가 안전히 비행을 마쳤다는 사실이 아니다.

갠더에 체류하는 동안 승객들이 경험한 일을 들었을 때, 놀라운 동시에 감동적이고,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갠더와 반경 75km 내 작은 마을들이 고등학교, 마을회관, 여인숙, 기타 대형 모임 장소의 문을 싹 닫고 승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민들은 집에서 간이침대와 침낭, 깔개, 베개 등을 가져왔다.

근방의 고등학생들은 전원 손님을 모시는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우리 승객 218명은 갠더에서 45km 떨어진 루이스포트 마을의 고등학교에 배치됐다.

 

만약 여성 승객이 여성 전용 시설이 필요하다고 하면 즉각 준비됐다.

가족들은 함께 머물렀다.

연로한 승객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가정집으로 모셔졌다.

한 젊은 임신부는 24시간 응급진료소의 맞은편에 있는 가정집에 머물게 됐다.

이틀 내내 남성과 여성 간호사들이 상주했고, 전화하면 의사가 달려왔다.

모든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미국과 유럽 등지로 전화하거나 이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승객들은 심지어 '특별 프로그램'에 초대도 받았다.

어떤 사람은 바다와 호수에서 보트 크루즈를 했고, 어떤 사람은 인근 숲으로 산책하러 갔다.

빵집들은 24시간 문을 열고 신선한 빵을 구워냈다.

주민들은 끼니마다 음식을 준비해 학교로 가져왔고, 특정 취향 승객의 경우 그에 맞는 식당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짐이 모두 비행기에 있었기 때문에 코인세탁소에서 옷을 세탁할 수 있도록 동전을 나눠주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주민들은 이 불운한 여행객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해줬다.

 

지역 적십자사가 갠더 공항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순서를 바로바로 알려준 덕분에 승객들은 한 사람도 늦거나 사라지는 일 없이 시간에 맞춰 공항에 왔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비행기에 다시 탑승한 승객들은 크루즈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들 같았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누가 더 즐거웠는지 앞다퉈 얘기하며 때때로 놀라곤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애틀랜타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은 흥겨운 잔치나 다름없었고, 우리는 승객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물러나 있었다.

그들은 공동체 의식으로 똘똘 뭉쳤고, 서로를 살갑게 대하며 전화번호와 주소, 이메일 주소 등을 교환했다.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비지니스 승객 한 명이 내게 다가와 동료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할 수 있겠냐고 물은 것이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왠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이죠."라고 답했다.

 

그는 안내방송을 통해 승객들에게 지난 며칠간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상기시켰다.

이어 루이스포트의 훌륭한 주민들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델타 15'(우리 여객기 편명)라는 이름의 신탁기금을 설립, 루이스포트 고등학생들에게 대학 진학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니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만큼 돈을 기부해 동참해달라는 것이었다.

 

승객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가 적힌 기부서명서가 비행기를 한 바퀴 돌자 순식간에 1만4천500달러(약 1천600만 원), 캐나다달러로는 2만 달러가 모금됐다.

이를 제안한 승객은 버지니아에서 온 의사로 밝혀졌다.

그는 다른 승객들이 모금한 만큼의 액수를 추가로 내고, 곧장 장학금 지급을 위한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예기치 않은 재난 속에서, 갠더시 주민들의 맹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체류객이 편의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실로 가슴 벅찬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