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베리룰에 의한 헤비급과 미들급, 라이트급이 정착하면서 1880년대말 점차 미들급과 라이트급 사이에 체급 신설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두 체급은 한계체중이 각각 160파운드와 135파운드로 10Kg 이상 차이가 나는데다가 중량차이 만큼이나 경기스타일도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체급의 중간 체중인 147파운드를 한계체중으로 하는 새로운 체급이 신설됐고 일정한 무게를 지고 달리는 경마(Welter Race)에서 이름을 따온 웰터급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1888년 10월 30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포트푸트에서 이 체급 최초의 세계타이틀전이 열려 미국의 <패디 더피>가 동국의 빌리 맥밀란으로부터 17RKO승을 거두고 초대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담력이 좋고 대단한 스태미나를 소유했던 그는 단단한 주먹의 강타자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첫 방어전에서 톰 메도우스와 45R의 사투를 벌이며 실격승을 거두고나서 결핵으로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공식적으로 세계타이틀을 지닌 채 사망한 첫 번째 챔피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신설 체급의 한계로 2년 넘게 비어 있던 왕좌에는 캐나다의 <빌리 스미스>가 대니 니드햄을 수차례 쓰러뜨리며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14R에서 라이트어퍼컷으로 누이고 두 번째 챔피언이 되었다.
거의 드잡이에 가까운 싸움을 벌이기 일수였던 스미스는 팔꿈치와 무릎, 머리로 가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상대선수를 물어 뜯을 정도로 악명높은 더티파이터였다.
두 번째 방어전에서 맞이한 탄탄한 실력의 <토미 라이언>에게는 그런 반칙이 통하지 않았는지 흠씬 두들겨 맞으며 20R판정패를 당해 분루를 삼켜야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혼혈이었던 라이언은 뛰어난 펀치력으로 높은 KO율을 자랑하면서도 비교적 영리하고 정교한 공수를 구사해 파이오니아 시절 클레버 복싱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첫 방어전에서 미들급 초대챔피언을 지냈던 논파렐 잭 뎀프시를 3R KO로 눌러 클래스의 차이를 보여준 뒤 과거 스파링 파트너였던 트리키 복싱의 대명사 키드 맥코이의 속임수에 생애 첫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세 번째 방어전을 끝으로 미들급으로 월장해 2체급을 제패하며 명장으로 거듭났다.
라이언이 떠난 자리에는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빌리 스미스>가 1898년 8월 매티 매튜스에게 25R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 탈환에 성공했다.
4년만에 왕좌에 복귀한 스미스는 후일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강타자 조 월코트를 꺽은데 이어 무패의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조지 키드 라빈의 도전마저 14R TKO로 뿌리치며 반칙왕을 뛰어넘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지만 네 번째 방어전인 <매티 매튜스>와의 재전에서는 후반에 체력적인 열세를 드러내며 19RKO로 패해 타이틀을 상실하고 급전직하하고 말았다.
수훈을 세운 뉴욕출신의 매튜스는 탁월한 디펜스능력으로 정평이 나있었는데 그동안 2승1무의 우위를 보였던 캐나다의 <에디 코놀리>에게 예상밖으로 세차례나 다운을 내주며 일격을 당해 두달도 못돼 왕좌에서 내려 왔다.
주로 라이트급에서 활약했던 코놀리는 빠른 핸드스피드와 활발한 움직임이 뛰어났지만 경기의 기복이 심한 탓에 승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역시 두달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제임스 루브 펀스>와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15R에서 갈비뼈 밑을 크게 강타당해 충격으로 경기를 포기한 뒤 저니맨 신세로 전락했다.
닉네임 루브에서 알 수 있듯이 캔사스의 촌뜨기에 불과했던 펀스는 펀치력만큼은 타고난 강타자로 난타전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전임 <매티 매튜스>와의 2연전에서 격렬한 타격전을 벌인 끝에 판정패를 당해 일단 한발 물러섰다.
재임에 성공한 매튜스는 여전히 안정된 경기운영능력이 돋보였지만 두 번째 방어전에서 7개월만에 재회한 <제임스 루브 펀스>에게 우세한 경기를 이끌다가 10R에 강렬한 레프트펀치를 턱에 맞고 누워버렸다.
자신감에 가득 찬 펀스 역시 첫 방어전부터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프랭키 언을 맞이해 9R KO승을 거두고 여전히 강타자다운 면모를 과시했지만 <조 월코트>의 전율적인 강타 앞에 5R만에 무릎을 꿇어 두 번째 방어에 실패했다.
바베이도스출신의 월코트는 파이오니아 시절의 초강력 챔피언으로서 156cm의 단신이면서도 다부진 체격에 고릴라처럼 긴 리치를 소유한 하드펀처였다.
특히, 라이트 단발펀치의 위력은 가히 살인적이어서 자신보다 20~30Kg 더 무거운 상대를 실신시킨 일도 있었고 챔피언에 오르기 1년 전에는 L.헤비급의 조 초인스키를 때려 눕히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몸싸움에 강했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빠른 움직임으로 상대에게 돌진하는 그의 복싱은 많은 이들로부터 1980년대말 헤비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마이크 타이슨과 닮아 있었을 것으로 짐작케하고 있다.
라이트급 시절에는 챔피언 라빈에게 완패한 적도 있었지만 그 뒤로는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며 톱클래스를 연파해 평가를 달리하게 했다.
기대만큼 롱런하지 못했던 그는 재임 2년반만에 가진 세 번째 방어전에서 당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의 <딕시 키드>에게 석연치 않은 20R실격패를 당하고 왕좌에서 물러났는데 후일 그 경기의 레퍼리는 키드에게 돈을 걸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월코트의 복싱을 직접 보지 못해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링지의 창간인 냇 플레이셔나 저명한 복싱 사학자 찰리 로스 등으로부터 웰터급 역사상 가장 강한 챔피언 중 한명으로 손꼽혔던 것을 보면 당대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몰고 온 챔피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명이 아론 리스터 브라운이었던 키드는 반사신경이 좋은 카운터펀처로 빠르고 영리할 뿐만아니라 레프트훅에 이은 라이트어퍼컷을 즐겨 사용해 역시 사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곧바로 미들급으로 월장하는 바람에 이 체급에서는 단한차례의 방어전도 갖지 않았고 후일 유럽으로 건너가 당시로서는 많은 나이였던 37살까지 링에 오르며 여전히 강호로 군림했다.
1905년 키드가 타이틀을 반납하자 억울하게 타이틀을 빼앗긴 전임 월코트를 챔피언으로 인정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급격한 난조에 빠진 월코트는 영 피터 잭슨에게 KO패한 데 이어 샘 랭포드와 조 간스에게도 잇달아 무승부를 기록하며 하락세에 접어든데다가 총기사고로 인한 구설로 1년 이상 링에 오르지 못해 이미 과거와 같은 강인한 포스는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결국, 흑백의 웰터급 챔피언 대결에서 미국의 <윌리엄 하니 멜로디>가 월코트에게 1R에 다운을 당하고도 판정승을 거두어 새로운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미 2년전부터 전임 매튜스를 누르고 화이트 웰터급 챔피언으로 불리웠던 멜로디는 이름과 달리 매우 거칠고 과격한 복싱을 구사했다.
첫 방어전에서 월코트를 또 다시 12R TKO로 제압해 왕좌 등극이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했지만 복병 <마이크 트윈 설리반>에게 완패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시원한 대머리가 인상적이었던 설리반은 쌍둥이 잭은 물론 또 다른 형제인 댄까지 3형제가 복서였는데 펀치력은 부족했던 반면 레프트의 활용이 탁월해 소프트한 아웃복싱에 능했다.
첫 방어 후 대뜸 당시 미들급 세계챔피언인 강호 스탠리 케첼에게 도전장을 던졌다가 1R KO패를 당했고 두 번째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을 버리고 아예 미들급으로 월장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1908년부터 이 체급의 세계챔피언 계보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미 1년전 멜로디를 15R KO로 제압하고 스스로 챔피언임을 주장한 독일의 프랭크 만텔에 이어 만텔을 3R TKO로 꺽은 미국의 해리 루이스 역시 챔피언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밖에도 루이지애나주 챔피언에 불과했던 아일랜드의 지미 가드너와 호주로 건너간 미국의 지미 클라비 등도 세계챔피언을 주장하며 혼란을 부채질했으나 이들은 모두 챔피언으로 공인받지 못했고 영국과 호주를 오가며 링에 올랐던 덴마크 출신의 <왈데마르 홀버그>가 1914년 새해 첫날 미국의 레이 브론슨을 20R판정으로 누르고 새로운 챔피언으로 공인받았다.
처음으로 이 체급의 타이틀을 유럽에 가져간 홀버그는 아마추어시절 1908년 런던올림픽에도 출전해 후일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매트 웰스에게 1회전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프로에 넘어와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를 앞세운 야성적인 파이팅을 선보이며 강타자로 활약했으나 지나친 승부욕은 잦은 실격패를 불러왔고 첫 방어전에서 아일랜드의 <톰 맥코믹>에게도 여러차례 로우블로우를 남발하다가 6R만에 실격패를 당하며 불과 23일만에 야인으로 전락했다.
2년여의 짧은 링캐리어에도 불구하고 터프니스를 갖춘 일발파워의 강타자로 영국과 영연방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던 맥코믹은 영국의 베테랑 조니 서머스를 1R에 요절내며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두 번째 방어전에서 <매트 웰스>에게 완패당해 3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잃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갑자기 내리막길을 걸었던 그는 1915년말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이듬해 여름 프랑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아마추어시절 영국 라이트급을 석권했던 웰스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건실한 아웃복싱을 구사했던 실력파였지만 이듬해 6월 미국의 보스턴에서 열린 첫 방어전에서 홈링의 <마이크 글로버>에게 판정으로 패해 예상과 달리 단명에 그쳤다.
7년만에 미국으로 타이틀을 되찾아 온 글로버는 동생인 빌리와 형제복서로 활약하며 유달리 터프하고 박진감넘치는 공격력으로 한몫했는데 불과 21일 후 동국의 <잭 브리튼>에게 타이틀을 잃어 최단기간 챔피언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말았다.
글로버는 이듬해 감기 증세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경기에 나섰다가 폐렴으로 번져 1년간 투병하다가 역시 2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 체급에서 3차례나 세계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브리튼은 복싱 마벌(Marvel)로 불리울정도로 기가막힌 테크닉을 소유한 당대의 마스터클래스였다.
하드히터는 아니었지만 스피디한 움직임과 함께 끊임없이 손을 뻗어 상대를 괴롭히는 까다로운 스타일이었고 25년간 무려 300전이 넘게 싸우면서도 KO패는 단 한번에 불과할 정도로 엄청난 맷집을 소유했다.
첫 왕좌는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테드 키드 루이스>에게 두달만에 넘겨줬지만 이들의 싸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맹렬한 대쉬와 터프한 전진스텝을 앞세운 루이스는 강인한 체력은 물론 비교적 수준급의 파워까지 겸비해 브리튼의 라이벌다운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섯차례의 방어에 성공해 모처럼 안정된 왕좌를 지켰으나 다시 조우한 <잭 브리튼>의 빗발치는 레프트잽과 능수능란한 푸트웍에 허우적거리다 판정으로 패해 벨트를 돌려주고 말았다.
타이틀 탈환에 성공한 브리튼은 <테드 키드 루이스>를 상대로 한 두차례의 방어전에서 1승1무로 우위를 입증하는 듯 했지만 세 번째 방어전에서 초중반의 실점을 만회하지 못해 최종회 다운을 빼앗고도 역시 판정으로 고배를 들었다.
이들의 대결은 논타이틀전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2년 뒤 빈혈 진단을 받은 루이스가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잭 브리튼>과 두 번째 방어전에 나섰다가 다섯 번이나 다운을 당하며 9RKO로 패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루이스는 브리튼과의 마지막 일전에서 패한 뒤 영국으로 돌아가 상위체급으로 월장했고 L.헤비급 세계챔피언이었던 조르쥬 카르팡티에에게 도전해 1R KO패하기도 했다.
루이스와 브리튼은 1915년부터 1921년까지 20차례나 싸웠을만큼 라이벌 중의 라이벌로 8번의 타이틀전에서는 브리튼이 4승3패1무의 우위를 지켰다.
쓰리타임 챔피언에 오른 브리튼은 잇단 무승부 방어의 불명예 속에 라이트급의 명인 베니 레너드의 도전을 받아 13R에서 보디를 맞고 쓰러져 KO패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레너드가 카운트도중 가격했다는 이유로 돌연 실격패가 선언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어느덧 서른살을 훌쩍 넘긴 브리튼은 5개월 뒤 젊고 유능한 도전자였던 <미키 워커>에게 완패해 5차방어에 실패하며 서서히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6년간 타이틀을 주고 받으며 이 체급의 정상을 나누었던 루이스와 브리튼은 비록 롱런하지는 못했지만 둘다 복싱사가들로부터 이 체급의 올타임랭킹 톱텐에 오르내릴만큼 뛰어난 실력파로 분류됐다.
이 체급의 초창기는 한 시대를 오랫동안 지배할만한 뚜렷한 강자가 없어서 챔피언 교체가 잦았고 아직은 미들급의 기세에 눌려 있었지만 파이오니아 시절의 초강력 하드펀처 조 월코트가 눈길을 끌었고 최고의 라이벌 잭 브리튼과 테드 키드 루이스의 치열한 타이틀 쟁탈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에 충분했다.
프로데뷔 3년만인 1922년 11월. 약관의 나이로 노웅 잭 브리튼을 왕좌에서 쫓아낸 <미키 워커>는 키가 작고 생김새가 불독을 닮았다고 해서 ‘토이 불독’이란 애칭으로 불리웠다.
터프한 전진스텝을 앞세워 거친 복싱을 구사하면서도 항상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드는 치밀한 작전으로 작은 키로 싸우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나타냈다.
비록 하드펀처는 아니었지만 강약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연타는 자신보다 신체조건이 좋은 선수들을 쓰러뜨리는데 효과적이었고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완벽한 커버링은 30대 중반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즈음 웰터급 타이틀도 잠시 둘로 쪼개지게 되었는데 첫 방어에 성공한 워커가 <NYSAC>에서 지명한 미국의 <데이브 쉐이드>와의 방어전을 이행하지 않자 그의 타이틀을 박탈하고 쉐이드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인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쉐이드는 불과 한달만에 동국의 <지미 존스>에게 힘한번 못쓰고 판정으로 물러나 페이퍼챔피언의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NBA>에서만 챔피언으로 인정받고 있던 <미키 워커>는 곧바로 존스를 상대로 다시 챔피언 단일화에 나섰으나 NYSAC가 경기에 앞서 또 다시 존스의 타이틀을 박탈해버렸고 이로 인해 김이 빠진 경기는 범전으로 흐르다 9R에 노컨테스트가 선언되고 말았다.
이듬해 라이트급에서 올라온 류 텐들러와 보비 바레트를 연파하며 네 번의 방어에 성공한 워커는 과감하게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명장 해리 그렙에게 도전장을 던져 1925년 7월 2일 뉴욕의 폴로그라운드에서 링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뜨거운 한판승부를 벌였지만 결과는 워커의 아쉬운 판정패로 끝이 났고 설상가상으로 6차방어전에서 동국의 <피트 라초>에게 업셋을 당하며 웰터급 타이틀마저 잃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아예 미들급으로 월장한 워커는 7개월 뒤 다시 미들급 정상에 도전해 염원하던 2체급 석권에 성공하며 이 체급에서보다 미들급에서 더 큰 활약을 펼쳐 지금도 올타임 랭킹 상위에 선정될 만큼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역시 단신이었던 라초는슬로우스타터에 펀치력도 약했던 반면 움직임이 빠르고 사우스포 특유의 받아치기에 능했다.
첫 방어에 성공한 뒤 조지 레빈에게 4R실격승을 거두고 비로소 <NBA>와 <NYSAC> 모두로부터 챔피언으로 인정받았지만 세 번째 방어전에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며 동국의 <조 던디>에게 판정으로 패해 왕좌에서 밀려났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후일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빈스와 형제챔피언이었던 던디는 기교나 파워는 부족해도 체력이 좋고 터프해서 매우 에너제틱한 러싱파이팅을 펼쳤다.
<NBA>가 지명한 톱콘텐더 <재키 필즈>와의 방어전을 거부해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영 잭 톰슨을 판정으로 물리친 필즈가 NBA가 인정하는 새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반쪽짜리 챔피언으로 전락한 던디는 왕좌에 오른지 2년만에 첫 방어전을 겸해 필즈와 양대 타이틀을 걸고 싸웠으나 2R에 두차례 다운을 당하는 최악의 경기를 벌인 끝에 로우블로우로 실격 판정을 받아 타이틀을 흡수당했다.
1924년 파리올림픽에 출전해 우승했던 시카고 출신의 필즈는 당시 나이가 16살로 지금까지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올림픽 복싱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였다.
충실한 기본기와 스태미나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경기운영이 특징으로 스피드 넘치는 테크닉은 물론 상대에 따른 임기응변에도 뛰어났다.
14개월만에 재회한 <영 잭 톰슨>과의 재대결에서 2R에서 좌우훅을 강타하며 KO직전까지 몰아갔으나 위기를 벗어난 톰슨에게 중반 이후 주도권을 내주고 분패했다.
데뷔초 승패를 반복하는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던 톰슨은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복서 출신인 부친의 꾸준한 조련 덕분에 다재다능한 파이터로 성장했는데 만만치 않은 펀치력과 빼어난 연타능력을 갖춘데다가 빠르고 교묘한 움직임때문에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스타일이었다.
롱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넉달만에 열린 첫 방어전에서 동국의 <토미 프리먼>에게 일격을 당해 왕좌에서 물러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아일랜드계의 미국인 프리먼은 무한체력의 소유자로서 챔피언에 오를 당시 이미 백전 이상의 전적을 쌓았던 베테랑이었지만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영 잭 톰슨>에게 초반부터 눈자위가 커트되는 고전을 펼치다 후반에는 거의 눈이 감기다시피해 12R에서 레퍼리스톱이 걸렸다.
재임에 성공한 톰슨은 이미 논타이틀전에서 허점을 드러냈던 캐나다의 복병 <루 브로일라드>에게 또 다시 네차례나 다운을 당하는 졸전을 벌이며 첫 방어에 실패했고 스스로 한계를 느낀 나머지 이듬해 은퇴를 선언했다.
오른손뼈의 부상으로 인해 사우스포로 전향했던 단신의 브로일라드는 단단한 체구에 레인지가 큰 레프트펀치의 위력이 뛰어났던 강타자로 맷집도 강한 편이었다.
석달 뒤 맞이한 전임 <재키 필즈>의 감각적인 공수를 막아내지 못해 단명에 그쳤지만 이후 미들급으로 월장해 힘을 앞세우며 2체급을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2년여 만에 왕좌에 복귀한 필즈는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손이 많은 상대를 만나면 고전했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첫 방어전에서 <영 코베트 3세>의 폭발적인 대쉬에 완패했고 예상과 달리 일찍 은퇴한 뒤 영화계에 투신해 20세기폭스와 MGM에서 필름에디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이민자로서 헤비급 2대 세계챔피언이었던 제임스 코베트와 닮았다고 하여 라파엘레 카파비안카 지오다노라는 원래 이름을 버리고 코베트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저돌적인 사우스포로 펀치력은 약했지만 손이 많기로 유명했고 뛰어난 스피드와 변칙적인 움직임이 돋보였다.
첫 방어전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지미 맥라닌>에게 불과 1R만에 KO패를 당해 이 체급에서의 실적은 미미했지만 후일 미들급으로 올라가 챔피언클래스였던 빌리 콘이나 프레드 아포스톨리와 승패를 주고 받으며 캘리포니아주가 인정하는 챔피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동안의 암살자’라는 닉네임의 원조격인 맥라닌은 미소년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링에 오르면 마치 창끝으로 찌르는듯한 날카로운 펀치때문에 상대방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고 특히 위력적인 라이트펀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플라이급으로 데뷔해 당시 챔피언이었던 판초 빌라를 누른 적이 있고 라이트급 시절 첫 세계도전은 실패했지만 챔피언을 지냈던 새미 만델과 알 싱거는 물론 명장 베니 레너드를 KO시켜 은퇴로 몰아 갔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1년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바니 로스>와 치열한 전투끝에 3체급 석권에 희생양이 되었지만 이후 로스와는 타이틀을 주고 받으며 세차례나 릴레이매치를 벌일 만큼 숙적관계로 발전했다.
1934년 5월 라이트급과 Jr.웰터급에 이어 평생의 소원이었던 웰터급마저 정복해 사상 3번째로 트리플크라운에 오른 로스는 여전히 고집 센 완력의 파이터로 정평이 나있었는데 넉달 뒤 <지미 맥라닌>과의 리매치에서는 체중조절에 실패하면서도 분전을 펼쳤지만 아쉽게 패해 일단 Jr.웰터급으로 다시 돌아갔다.
링밖에서도 난투극을 벌여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이들은 8개월만에 다시 링위에서 조우하여 치열한 타격전 속에 후반들어 맹공을 가한 <바니 로스>가 심판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 탈환에 성공했다.
로스와 맥라닌의 피튀기는 3연전은 항상 스릴만점이어서 관중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갔고 세계타이틀전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기록될 만큼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로 인해 첫 대결은 1934년 링지로부터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었고 로스는 1934년과 1935년에 연달아 올해의 복서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 Jr.웰터급 타이틀까지 버리고 웰터급에 올인해 파죽지세의 연승가도를 달렸던 로스는 2차방어전에서 후일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난적 세페리노 가르시아에게 압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렸지만 희대의 괴물이었던 동국의 <헨리 암스트롱>에게 완패한 뒤 링을 떠났다.
은퇴 후에는 미국 해병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세우며 훈장까지 받아 불사신의 사나이다운 용맹스러움을 떨치기도 했다.
펀치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맷집과 끈질긴 연타를 앞세워 접근전에 아주 능했고 불굴의 투지와 함께 절묘한 타이밍의 공수를 보여준 그의 수준높은 복싱은 당대의 복싱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1938년 이미 페더급 세계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암스트롱은 2체급을 뛰어넘어 단숨에 웰터급 타이틀을 획득한 데 이어 석달 뒤 루 앰버스를 판정으로 누르고 라이트급 세계타이틀마저 손에 넣고 3체급의 챔피언벨트를 동시에 보유하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달성했다.
166cm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0Kg 차이를 오르내린 그는 산소탱크같은 엄청난 체력과 맷집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상체를 움직여 상대의 펀치를 죽인 뒤 여지없이 밀고 들어가 일발필도의 좌우훅을 폭발시켰던 히팅머신의 전형이었다.
매라운드 시작부터 끝까지 강력한 프레스와 논스톱 어택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연타는 인파이터 최고의 명품으로 151번의 경기 중 101번의 KO승을 기록하는 경이적인 파워를 뿜어냈다.
1년새 7차례의 방어에 성공한 뒤 앰버스와의 재전에서 라이트급 타이틀을 상실하자 페더급 타이틀까지 반납한 채 웰터급 타이틀 방어에 전념해 놀라운 하이페이스로 방어횟수를 늘려 나갔고 3년만에 19차례의 방어에 성공한 정력적인 파이팅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대기록이었다.
특히 1939년 10월에는 매주 경기에 나서 5차례나 방어에 성공하는 괴력을 발휘했고 19차례의 타이틀 방어전 중 최종라운드 공소리를 들은 것은 4번에 불과했다.
또한 당시 그가 세운 8연속 KO방어 기록은 후대에 라이트급의 로베르토 두란이 경신할 때까지 36년간이나 지속되었을 만큼 대단한 기록이었다.
15차방어 성공 후 첫 방어전의 상대였던 당시 미들급 세계챔피언 세페리노 가르시아에게 도전해 전대미문의 4체급 석권에 나섰으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무승부 판정으로 인해 3관왕에 만족해야 했고 마지막 도전자였던 동국의 <프리치 지빅>에게 15R 종료직전 다운을 허용하며 근소한 차의 판정패를 당해 무관이 되었다.
이후 4년 가량 더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은퇴한 뒤 잠시 알콜중독에 빠진적도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목사로서 삶을 살아갔다.
지금도 올타임 랭킹 5위안에 너끈히 손꼽히고 있으며 실적으로만 따진다면 분명 이 체급 넘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위대한 챔피언이었다.
최고의 업셋을 일으키며 암스트롱을 좌절시킨 지빅은 초기에는 정렬적인 파이팅으로 맹위를 떨치던 강타자였으나 점점 변칙적인 복싱을 구사하며 극단적인 터프가이로 변신하더니 머리나 팔꿈치, 무릎을 이용한 교묘한 더티플레이로 승부를 장악하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복싱은 링안에서나 밖에서나 더러운 비즈니스라며 자신의 플레이를 정당화했던 특이한 인물로 암스트롱과의 재전에서 12R TKO승을 거두어 다시 한번 주가를 높였으나 2차방어전에서 뉴저지출신의 <프레디 코크란>에게 완패해 그저 암스트롱의 20차방어를 저지한 사나이로서 기억될 뿐이었다.
일반의 예상을 깨고 왕좌에 오른 코크란은 무려 5년 가까이 왕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챔피언에 오른 이듬해인 1942년 해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한번도 타이틀 방어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워펀처도 아니었고 기술적으로도 매끄럽지 못했지만 오로지 놀라운 투지와 근성을 앞세운 집요한 대쉬로 한몫했다.
3년 뒤 컴백하여 후일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무관의 제왕 로키 그라지아노에게 연이어 KO패를 당하며 턱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더니 4년반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마티 서보>의 강타 앞에 1R부터 비틀거리다가 4R에서 라이트크로스에 이은 레프트훅을 맞고 추락했다.
아마추어시절부터 뛰어난 스피드를 앞세워 골든글러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영리한 복싱을 구사했던 서보는 핸섬한 외모로도 인기가 많았고 승률도 높았지만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탓에 팬들에게 크게 어필하지는 못했다.
역시 그라지아노에게 2R TKO패를 당한 뒤 코질환의 일종인 비중격 만곡증이 악화돼 생애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슈거 레이 로빈슨과의 지명방어전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다.
미키 워커 이후 1930년대 초반 이 체급은 자고나면 챔피언이 바뀌어 있을 만큼 회전의자를 방불케 했으나 투지 만점의 바니 로스와 더불어 정력적인 파이팅으로 미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헨리 암스트롱의 등장으로 전율의 웰터급다운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나란히 3관왕에 올랐던 이들은 당시 헤비급 세계챔피언이었던 조 루이스와 함께 링지로부터 올해의 복서에 번갈아 선정되며 세계 프로복싱계를 이끌어 웰터급을 인기 체급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1946년 12월 미국의 <슈거 레이 로빈슨>은 동국의 터프가이 토미 벨을 판정으로 따돌리고 마티 서보의 반납으로 공석이 된 왕좌에 올랐다.
아마추어 때부터 복서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자랑했던 그는 85승(69KO)무패의 전적을 기록하며 최고의 영예인 골든글러브를 두 체급에 걸쳐 석권해 이미 장래의 세계챔피언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스피드 복싱시대의 문을 연 현대 복싱의 전도사로 비교적 큰 키에 안정된 밸런스와 경쾌한 푸트웍을 바탕으로 한 리드미컬하고 스타일리쉬한 움직임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패턴과 스피드를 갖추고 있었고 정교하고 신속한 레프트펀치의 활용은 로빈슨에 의해 정착된 기술적 진보들 가운데 가장 특별했다.
더욱이 상대를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요리하는 공수의 균형은 뛰어난 전략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강약을 조절하며 몰아치는 세련된 연타 역시 가히 예술적 경지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 전향 후 2년여만에 40연승을 달리며 프리치 지빅, 마티 서보, 새미 앤고트 등 월드클래스의 복서들을 간단하게 제압해 챔피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1942년 링매거진이 선정한 최고의 복서에 이름을 올려 대기의 편린을 드러냈다. 이듬해 제이크 라모타와의 재전에서 생애 첫 패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는 그의 질주는 정상의 자리에 있었던 세계챔피언들을 벌벌 떨게 만들어 무관의 제왕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러나 쾌진격을 거듭하며 왕좌에 오른 로빈슨의 행로가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첫 방어전에서 사력을 다해 덤벼든 지미 도일을 죽음으로 내모는 불운을 겪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계타이틀전에서 최초로 발생한 사망사고였기 때문에 복싱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일설에는 로빈슨이 경기 당일 도일이 죽는 악몽을 꾸어 매니저에게 대전 연기를 부탁했지만 오히려 설득을 당해 목사에게 정화의식까지 받고 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지몽대로 도일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던 로빈슨은 6개월만에 다시 타이틀 방어에 나섰고 4차방어전에서 키드 가빌란에게 크게 고전하기도 했지만 무난하게 다섯차례의 방어전을 마친 뒤 심각한 감량고때문에 1950년 미들급으로 월장해 본격적인 로빈슨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로빈슨의 후계자는 비교적 평범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원펀치의 마술사로 불리울만큼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던 <조니 브래튼>이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찰리 푸사리를 꺽고 왕좌에 올랐지만 그것은 <NBA>만 인정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두달 뒤 쿠바 출신의 실력파 <키드 가빌란>에게 턱이 부서지는 망신을 당하며 넘겨주고 말았다.
로빈슨과의 명승부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가빌란은 힘을 앞세워 미국 복서들이 득세해왔던 이 체급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파워풀한 복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탕수수밭에서 단련된 튼튼한 육체와 중남미출신 특유의 빠르고 부드러운 공수전환, 날카롭게 파고드는 연타는 3년이 넘는 재위기간 중 감히 대적할만한 상대를 찾기 어려울만큼 위협적이었다.
특히, 볼로펀치로 불리우는 훅이 가미된 롱어퍼컷은 개빌란만의 전매특허였는데 유연한 허리와 팔의 힘을 통해 둔각을 이루며 날아가는 이 펀치는 체중을 완벽히 실어내지 못해 큰 충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상대를 요리하는데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밴텀급의 명인이었던 에델 조프레와 함께 어퍼컷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1세대였고 한참 후에 등장한 마빈 해글러나 리카르도 로페스에 비해서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어퍼컷의 귀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3차방어전에서 무패의 질 터너를 꺽고 비로소 <NBA>에 이어 <NYSAC>까지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챔피언이 되었고 첫 방어전에서 고전했던 숙적 빌리 그래햄을 완파한데 이어 용감무쌍한 사나이 카멘 바실리오마저 제압하며 역대급 챔피언의 반열에 올라섰다.
7차방어를 마치고 여세를 몰아 미들급 세계정상에 도전했지만 챔피언 칼 보보 올슨에게 석패한 뒤 한동안 부상과 질병에 시달리더니 8차방어전에서 레퍼리의 편파적인 경기운영 속에 미국의 <조니 색스턴>에게 챔피언벨트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이후 급격한 쇠락을 맞이해 연패를 거듭했지만 전성기 시절 ‘쿠바의 매’라는 애칭과 함께 당시 복싱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조국에 복싱 붐을 일으키며 후대에 호세 나폴레스라는 걸출한 스타를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승리로 정상에 오른 색스턴은 아마추어 골든글러브 우승자답게 민첩한 움직임과 함께 정교한 타격이 돋보였는데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전향 후 40전 무패를 기록할만큼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의 갱스터였던 프랭크 팔레르모를 매니저로 둔 탓에 대중의 불편한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오명에 휩싸인 왕좌는 6개월만에 <토니 데 마르코>에게 풀어 주었다.
시칠리아계로 본명이 레오나르도 리오타였던 데 마르코는 친구의 이름을 빌려 링에 오른 것이 닉네임으로 굳어졌다.
단신의 후커였던 그는 언제나 투지넘치는 화끈한 난타전을 즐겨해 보스턴의 폭격기로 불리웠지만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난적 <카멘 바실리오>의 장벽에 가로막혀 70일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파이팅으로 유명했던 바실리오는 디펜스가 허술해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배짱두둑한 터프니스와 놀라운 내구력을 앞세운 무지막지한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토투토(toe-to-toe)의 전형이었다.
경기를 마친 그의 얼굴은 늘 상처투성이었지만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던 바실리오의 컬렉션은 화끈한 타격전을 선호하는 팬들의 욕구를 자극해 1955년부터 링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기는 무려 5년간 그의 독무대였다.
데 마르코와의 리매치에서 1차전과 마찬가지로 폭풍같은 양훅을 터트리며 똑같이 12RTKO승을 거두어 우위를 입증했으나 전임 <조니 색스턴>과의 2차방어전에서는 상대의 아웃복싱에 철저히 말려들어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각고의 노력으로 왕좌에 복귀한 색스턴은 구원의 숙적 질 터너의 눈자위를 자르며 새출발하는 듯 했지만 6개월만에 재회한 <카멘 바실리오>의 무자비한 폭력(?)앞에 9R만에 무릎을 꿇어 이번에도 첫 방어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바실리오의 야수성이 짙게 드러난 이 경기 역시 1956년 링매거진이 선정한 그해 최고의 경기였다.
러버매치를 요구해 온 색스턴을 다시 한번 요절낸 뒤 로빈슨이 기다리고 있는 미들급 전향을 위해 타이틀을 반납했다.
바실리오가 반납한 왕좌는 잡초에 가까웠던 미국의 <버질 에이킨스>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를 거쳐 최종상대였던 빈스 마르티네스에게 모두 9차례의 다운을 빼앗는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4RKO승을 거두고 차지했다.
다소 마른 체구에 흐느적거리는 듯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두 주먹만큼은 단단하고 무거운 편이어서 정상탈환을 노리던 데 마르코를 두차례나 쓰러뜨렸지만 상대적으로 테크닉이 떨어진 탓에 가끔 밋밋하고 맥빠진 경기를 펼쳐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멕시칸의 피가 섞여 있었던 동국의 <돈 조던>에 대차의 판정으로 물러나 예상대로 단명에 그쳤고 재전에서도 석패한 뒤로는 연패에 빠지며 잊혀져 갔다.
균형잡힌 신체에 침착하며서도 집요한 공격때문에 파이트머신으로 불리기도 했던 조던은 챔피언에 오르기전까지 이미 11번의 패배를 기록하고 있었고 마약복용설까지 나돌아 역시 기대를 걸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2차방어전에서 무패의 유망주 데니 모이어의 도전을 물리쳐 잠시 반짝하다가 논타이틀전에서 연패를 거듭하더니 쿠바의 <베니 파레트>에게 완패해 타이틀을 넘겨 주었다.
키드 가빌란을 동경했던 파레트는 조국의 공산화로 프로스포츠가 금지되자 뉴욕으로 건너와 루이스 페데리코 톰슨과의 무승부를 통해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펀치력은 약한 편이었으나 충실한 기본기와 빠른 발을 이용한 투지만만하고 공격적인 복싱으로 MSG에 모여든 복싱팬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특히, 리드 펀치 없이 노모션에서 날아드는 환상적인 라이트펀치는 상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말많은 톰슨과의 재전에서 완승을 거둔 뒤 2치방어전에서 버진군도 출신인 <에밀 그리피스>와 접전을 벌이다 레프트훅에 일격을 당해 13RKO패로 물러났다.
1958년 골든글러브 정상을 차지한 뒤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 그리피스는 길 클랜시의 품에서 공수의 균형이 잘잡힌 이상적인 파이터로 성장해 불과 3년만에 왕좌에 오르며 초특급 출세가도를 달렸다.
일발파워를 장전한 슬러거는 아니었지만 고도의 유연성을 갖춘 테크니션으로 힘과 투지를 앞세운 흥미진진한 타격전을 장기로 삼았다.
하지만 2차방어전에서 재회한 전임 <베니 파레트>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2-1의 판정패를 당해 리벤지를 허용했다.
5개월만에 왕좌에 복귀한 파레트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대뜸 투타임 미들급 챔피언 진 풀머에게 도전장을 던졌지만 10R에서 3차례나 캔버스를 구르며 참담한 KO패를 당해 큰 내상을 입었다. 그리고 겨우 석달만에 숙적 <에밀 그리피스>와의 러버매치를 맞이하게 됐다.
절치부심하며 왕좌 복귀를 노렸던 그리피스는 6R에서 다운을 내주면서도 시종일관 난타전을 전개했고 운명의 12R 중립코너에 몰려있던 파레트를 향해 이십여발의 융단폭격을 퍼부어 레퍼리스톱을 끌어냈다.
그러나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던 파레트는 병원으로 후송돼 머리를 세군데나 절개해 응고된 피를 뽑아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10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TV로 방송된 경기 중 처음으로 발생한 이 합법적인 살인사건에 수많은 사람들은 복싱폐지론을 거세게 주장했고 아무 저항없는 파레트에게 무차별적인 펀치를 날린 그리피스의 처사에 분개했다.
그리피스와 마찬가지로 레퍼리 루비 골드스타인 역시 책임을 추궁당해 더 이상 링에 오를 수 없었다.
파레트의 죽음을 계기로 NBA는 링줄을 3줄에서 4줄로 늘리는 규칙을 제정했고 파레트가 머리를 부딪힌 것으로 보이는 링포스트에 스펀지를 보강하는 등 링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링사고에 대한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적 혼란을 겪었던 그리피스는 두차례의 방어에 성공하며 평상심을 찾은 듯 했으나 호시탐탐 설욕을 노리던 쿠바의 <루이스 마누엘 로드리게스>에게 덜미가 잡혀 또 다시 빈손이 되었다.
기이하게도 이날 트리플헤더에 동반 출전했던 페더급 세계챔피언 데이비 무어가 슈거 라모스에게 KO당한 후 이틀만에 사망해 그리피스로서는 링사고의 악몽에 치를 떨어야 했다.
파레트와 달리 플로리다에 정착한 로드리게스는 명장 안젤로 던디의 초기작으로 힘이 넘치는 활발한 연타와 빠른 발을 이용한 감각적인 복싱으로 다소 고급스러운 테크닉을 선보였다.
비록 3개월만에 <에밀 그리피스>에게 근소한 차의 판정으로 패해 단명에 그쳤지만 언제라도 왕좌에 복귀할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어 늘 요주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쓰리타임 챔피언에 빛나는 그리피스는 도합 네차례나 격돌했던 라이벌 로드리게스의 재도전을 어렵게 따돌린 뒤 4차방어를 마지막으로 타이틀을 반납하고 미들급으로 월장했다.
가장 위대한 챔피언으로 칭송받게 되는 슈거 레이 로빈슨의 출현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이 체급은 5~60년대를 거치면서 유연성을 갖춘 중남미 복서들의 성공 가능성을 제시한 키드 가빌란과 리얼리터 파이터의 대명사 카멘 바실리오, 대중적이면서도 전문가들의 평가가 높았던 에밀 그리피스로 계보를 이어가며 복싱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했다.
힘과 스피드는 물론 스태미나까지 모두 갖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체급 특성상 충격적인 링사고가 두차례나 발생해 안타까움을 주었지만 그만큼 다이나믹한 경기력과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했기 때문에 이후 웰터급은 복싱팬들의 관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거물 에밀 그리피스가 미들급 정상에 오르면서 공석이 된 이 체급을 집어삼킨 사나이는 댈러스의 전갈이라고 불리우던 미국의 <커티스 코크스>였다.
오랫동안 톱콘텐더에 올라 있으면서도 너무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던 그는 전챔피언 루이스 로드리게스를 잡고 나서야 비로소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
1966년 8월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코크스의 첫 세계도전은 숨겨진 보석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경기로 멕시코의 마누엘 곤살레스를 일방적인 판정으로 따돌리고 왕좌에 올랐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곤살레스가 그의 데뷔전 상대였다는 점이다.
데뷔전 상대와 세계타이틀전을 벌여 챔피언에 등극한 것은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려운 진기한 기록이었다.
중남미 복서를 연상시킬만큼 잘빠진 몸매에 흑인 특유의 유연성을 동반한 스트레이트와 카운터펀치가 예리했고 밑에서부터 위로 긁어 올리는 듯한 위력적인 라이트펀치는 코크스만의 독특한 무기였다.
선이 가는 복싱처럼 보이나 워낙 눈이 좋은데다가 상체의 움직임이 부드러워 상대로부터 결정타를 허용하는 일이 드물었을 만큼 디펜스 또한 탁월했다.
첫 방어전에서 유럽을 평정한 프랑스의 장 조슬랭을 누르고 WBC에서도 챔피언의 지위를 인정받은데 이어 3차방어전에서는 캘리포니아주 동급 챔피언 찰리 쉽스마저 8R만에 가라앉혀 모두가 인정하는 일류 챔피언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이후 두차례의 방어 기록을 더한 코크스는 특유의 자신감으로 모두가 두려워했던 쿠바 출신의 강타자 <호세 나폴레스>의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여 명승부를 펼쳤지만 나폴레스의 뜨거운 승부욕을 누르지 못해 13R가 끝난 뒤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코크스는 은퇴 후 트레이너로 변신해 트로이 도시, 레지 존슨, 퀸시 테일러를 후대의 세계챔피언으로 만들어 내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웰터급 역사상 손꼽히는 챔피언 중 하나였던 나폴레스는 복싱으로 성공하기 위해 임신중인 아내와 조국을 등진 비정한 파이터였다.
그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키드 가빌란을 쫓아 18세에 프로에 데뷔했는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쿠바를 장악하자 1962년 7월 멕시코 원정길에 올라 주저없이 망명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이미 아마추어때부터 114번의 경기 중 단 1패만을 기록할만큼 타고난 복서였던 나폴레스는 쿠바에서 페더급과 라이트급으로 활동할 때만 해도 테크니션에 가까웠지만 멕시코로 옮기면서 명장 안젤로 던디의 자양분을 섭취하며 감각적이고 예리한 컴비네이션을 앞세워 파워복싱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중남미 특유의 유연한 몸놀림과 상대를 위협하는 매서운 눈을 갖고 있었으며 리드미컬한 잽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성한 전투력과 상대의 펀치를 최소한 움직임으로 피해버리는 탁월한 디펜스는 ‘싸우는 챔피언’의 전형과도 같았다.
Jr.웰터급 시절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카를로스 에르난데스와 에디 퍼킨스를 비롯한 수많은 강호들을 연파하며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당시 왕좌를 지키고 있었던 산드로 로포포로가 도전을 받아주지 않자 웰터급으로 월장했다.
첫 방어전에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던 코크스를 다시 한번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뒤 웰터급으로 돌아온 명장 그리피스와 캘리포니아의 인기복서였던 톱랭커 어니 로페즈를 차례로 제압해 1969년 링매거진으로부터 올해의 파이터에 선정되며 최고의 사나이로 불리웠다.
하지만 복싱은 싸워봐야 안다는 속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깜도 되지 않는 <빌리 바커스>의 거친 대쉬에 초반부터 양쪽 눈자위가 커트되는 수모를 당하며 겨우 4R만에 레퍼리 스톱이 걸려 1차왕조를 마감하는 실수를 범했다.
비교적 상대하기 까다로운 스타일의 사우스포로 숙부인 카멘 바실리오의 끈질긴 파이팅을 그대로 이어 받은 바커스는 눈에 뛸만한 기술이나 파워가 없어 웰터급 역사상 가장 나약했던 챔피언 중 하나로 평가됐다.
프랑스 원정으로 벌인 논타이틀전에서 로베르 갈루아에게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더니 6개월만에 복수를 다짐하고 돌아온 <호세 나폴레스>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하며 8RTKO로 무너져 주변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집권에 성공한 나폴레스의 2차왕조는 자신의 링네임 ‘만테키야’처럼 공수를 구분하기 어려운 매끄러운 움직임과 강약조절이 완벽한 컴비네이션으로 마스터다운 복싱을 펼쳤다.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지만 순간적으로 안쪽을 파고들어 날리는 연타와 체중이 실린 강렬하고 정확한 펀치는 미스블로우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정교해서 기교파 헤지몬 루이스와 강타자 아돌프 프루이트, 재도전에 나선 로페즈 등 당대의 검객들 마저도 두손을 들게 만들었다.
6차방어에 성공한 뒤 한층 더 탄력을 받은 나폴레스는 당시 미들급 세계챔피언으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카를로스 몬손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1974년 2월 9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열린 이들의 대결은 향후 전개될 웰터급과 미들급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빅파이트로 복싱팬들의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언더독이었던 나폴레스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몬손의 타점높은 원투스트레이트를 견디지 못하고 6R 종료 후 기권해 미들급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말았다.
웰터급으로 돌아온 나폴레스는 루이스를 군말없는 KO로 재차 돌려 세운 뒤 복병 아만도 무니스까지 제압하고 9차방어에 성공했지만 후발주자인 <WBC>와 마찰이 격화된 WBA가 앙헬 에스파다와의 지명방어전을 기피했다는 이유로 타이틀을 박탈해 반쪽짜리 챔피언으로 전락했다.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더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던 나폴레스도 어느덧 36살에 접어들자 더 이상 쇠퇴의 기미를 숨기지 못해 영국에서 날아온 <존 스트레시>의 스트레이트 연타 앞에 6R만에 무릎을 꿇어 11차방어에 실패하며 충격적인 몰락을 경험했다.
쿠바출신이지만 제2의 조국 멕시코의 영웅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던 나폴레스는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역대급 네임밸류의 도전자들을 상대로 통산 13차례의 방어에 성공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워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지하다시피 대부분의 업적이 서른을 넘긴 상태에서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기록을 뛰어넘는 강한 챔피언이었고 1930년와 40년대의 가교가 되었던 헨리 암스트롱처럼 1960년대와 70년대를 이어준 이 체급의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만테키야의 신화를 종식시키고 무려 40년만에 웰터급 왕관을 유럽으로 가져온 스트레시는 140여전에 이르는 풍부한 아마추어 경력을 바탕으로 영연방과 유럽타이틀까지 거머쥐었던 탄탄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다소 뻣뻣한 편인데다가 안면 가드에도 허점이 있었으나 레프트잽의 활용이 좋고 날카로운 원투스트레이트는 제법 화력이 붙어 있어 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첫 방어전에서 노장 루이스를 꺽은 뒤 나폴레스의 복수를 다짐하고 대타로 나선 멕시코의 <카를로스 팔로미노>와 난타전 끝에 12R 레프트보디샷을 맞고 침몰해 장수하지는 못했다.
일찍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라난 팔로미노는 웰터급 챔피언 특유의 강한 압박이나 파워펀치의 부재로 인해 동시대에 불같은 주먹을 자랑했던 경량급의 멕시칸 파이터들에 비해 많은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복싱으로 적잖은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대에 따른 임기응변에 능했고 레프트훅을 주무기로 한 차분한 경기운영과 찬스를 놓치지 않는 감각적인 복싱은 그를 롱런챔피언으로 군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년의 나폴레스를 괴롭혔던 무니스를 최종회 KO시킨 데 이어 2차방어전에서 스트레시를 꺽고 도전한 무패의 신예 데이브 그린을 환상적인 레프트훅 한방으로 침몰시켜 주가를 끌어 올렸고 5차방어전 상대 류 소리마찌를 7R에 끝낸 것도 역시 레프트훅 일발이었다.
라이트펀치에는 스트레이트도 훅도 그다지 위력이 없었지만 확실히 레프트훅만큼은 스피드와 타이밍만 잘 맞으면 언제나 KO를 이끌어 낼만큼 일발 파워가 내재해 있었다.
그러나 적지에서 지명도전자 <윌프레드 베니테스>를 맞이한 팔로미노는 상대의 정확한 레프트잽과 라이트스트레이트에 전반을 내준 뒤 후반 추격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베니테스의 능수능란한 디펜스에 막혀 8차방어에 실패하고 말았다.
1979년 로베르토 두란 전을 끝으로 은퇴한 뒤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1997년 48살의 나이에 링으로 돌아와 자신보다 10년 늦게 슈퍼라이트급 WBC 챔피언을 지냈던 레네 아레돈도를 1RKO로 꺽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약관 20살의 나이에 또 다시 롱런챔피언을 꺽고 2체급을 석권한 베니테스는 상대 펀치의 방향을 예견하고 완벽히 컨트롤한 뒤 자신의 펀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꽂아 넣는 경이로운 센스를 자랑해 전파탐지기로 불리웠다.
하지만 너무 일찍 꽃길을 걸었던 탓에 벌써부터 운동보다는 향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이전에도 연습부족 때문에 몇차례 졸전을 벌인 전력이 있었다.
특히, 2차방어전에 맞닥뜨린 희대의 슈퍼스타 <슈거 레이 레너드>전을 앞두고는 트레이너였던 부친의 성화에 못이겨 겨우 일주일만 훈련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결국, 게으른 천재 베니테스는 노력하는 천재 레너드와 빛나는 눈싸움만 남긴 채 후반에 체력이 떨어져 한차례 다운을 허용한 끝에 최종회 레퍼리 스톱이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베니테스의 천재성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폴레스로부터 벨트를 빼앗아버린 <WBA>는 클라이드 그레이를 누른 푸에르토리코의 <앙헬 에스파다>를 새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데뷔 초 6번을 싸울 동안 단 한차례도 이겨보지 못할만큼 시계제로의 3류 복서였던 에스파다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안정된 스탠스를 바탕으로 푸트웍을 이용한 빠른 공수전환에 적응해가며 서서히 기교파로서의 편린을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약체 조니 갠트를 가볍게 제압하고 자신감이 붙은 그는 17살을 갓 넘긴 홍안의 소년 <호세 쿠에바스>를 만만히 보고 원정에 나섰다가 무자비한 강타에 숨돌릴 틈도 없이 실컷 얻어 맞고 불과 5분만에 꿈길을 헤매이고 말았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마스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쿠에바스는 이 체급의 최연소 세계챔피언으로서 ‘피피노’(Pipino)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웠는데 바람을 가르는 호쾌한 레프트훅과 예측하기 힘든 각도에서 날아드는 롱펀치, 그리고 인상적인 마무리까지 복싱의 파괴본능에 충실했던 걸출한 파이팅 머신이었다.
불과 14살에 데뷔한 그는 초창기에 펀치력만 강할 뿐 복싱의 기초를 무시한 롱훅을 남발하기 일쑤였고 체력소모가 심한 경기스타일로 인해 KO승 아니면 판정패가 공식이 될만큼 승패를 반복하며 들판의 잡초처럼 자라났다.
하지만 명프로모터 루페 산체스의 문하가 되면서부터 경기운영능력과 체력이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메가톤급 파워를 자랑하는 속전속결의 강타자로 재탄생했다.
자신의 두배가 넘는 캐리어를 보유한 미구엘 캄파니노와 그레이를 모두 2R만에 보내버린 쿠에바스는 4차방어전에 재회한 에스파다의 턱을 부수어 버리는 대형사고를 일으키더니 해롤드 웨스턴의 턱마저 날려 버려 ‘조 브레이커’(Jaw Break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 쿠에바스는 멕시칸 파이터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하며 8연속 KO방어를 이룩해 동국의 WBC 챔피언 팔로미노와 함께 1970년대말 웰터급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9차방어전에서 스피드를 앞세운 랜디 쉴즈를 잡지 못한 채 접전 끝에 신승을 거둠으로써 그에게도 피날레가 찾아오고 있음을 암시했고 결국, 1980년 8월 2일 12차방어전에서 뉴 히어로 <토머스 헌스>에게 충격적인 2RKO패를 당하며 무관으로 내려 앉았다.
곧바로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지만 무명의 로저 스태포드에게 업셋을 당한 뒤로 로베르토 두란과 황준석에게 연이어 패퇴하면서 힘을 잃었다.
방어전 상대의 실적이 낮고 승패의 명암이 극명했던 탓에 은퇴 후 평가절하 되기도 했지만 한때 천하를 벌벌 떨게 할만큼 때리고 부수는 하드코어 복싱의 진수를 생생히 보여준 쿠에바스는 이 체급의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전통적으로 미국세가 크게 득세했던 이 체급은 1960년대말부터 10여년 간 호세 나폴레스부터 카를로스 팔로미노와 호세 쿠에바스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의 웰터급에 다시 없는 귀중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비록 동시대의 밴텀급처럼 물고 물리는 숨막힌 레이스는 없었지만 철옹성같은 왕좌를 지키고 있었던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1970년대의 웰터급은 전율과 공포 그 자체였고 전세계 복싱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프로복싱을 대표했던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시대의 종막이 가까워질 무렵 2관왕의 조숙한 천재 윌프레드 베니테스를 꺽고 화려하게 등장한 <WBC> 챔피언 <슈거 레이 레너드>는 1980년대를 이끌어 갈 차세대 슈퍼스타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레너드의 출현은 1940~50년대의 명장 슈거 레이 로빈슨이 문을 열었던 현대복싱의 조류를 현란한 스피드와 폭죽같은 연타로 승화시키며 세계 프로복싱의 조류를 일거에 뒤집어 놓은 하나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1973년 골든 글러브 라이트급 우승을 시작으로 이듬해 L.웰터급 우승,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에 이르기까지 145승 5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기록해 그의 스타성과 상업성에 반한 프로모터들의 적극적인 구애 속에 1977년 마침내 프로에 데뷔했다.
어떠한 상대를 만나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고 언제나 리드미컬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펀치를 흘리는 동시에 상대의 빈틈을 잽싸게 파고들어 전광석화같은 컴비블로우로 순식간에 경기를 장악해 버리는 천재적인 테크니션의 면모를 과시했다.
뛰어난 동체시력과 놀라운 순발력을 바탕으로 오른손과 왼손을 마음대로 구사해가며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경쾌한 푸트웍은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여기에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쇼맨십과 영리한 경기운영, 상대를 도발하는 능숙한 심리전에도 일가견이 있어 복싱팬들에게 보는 재미까지 톡톡히 선사했다.
첫 방어전에서 데이브 그린을 그림같은 레프트훅으로 실신시킨 뒤 라이트급 최강의 롱런 챔피언이었던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과 일전에 나섰으나 때리고 붙잡는 두란의 전략에 말려들어 근소한 차의 판정패를 당하는 오점을 남겼다.
몬트리올 대회전으로 명명된 이들의 1차전은 기술과 힘이 맞붙은 대표적인 경기로서 두란의 복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했던 일전이기도 했다.
당시 아리스티데스 로요 파나마 대통령이 자신의 전세기를 보내고 두란이 귀국하는 날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해 광란의 축제를 벌였을 만큼 그의 승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Jr.웰터급 챔피언들의 외면으로 웰터급까지 올라왔던 두란은 라이트급 시절보다 파워나 스피드가 감소한 듯 했지만 활화산같이 난폭하고 격렬한 파이팅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5개월 뒤 재대결한 <슈거 레이 레너드>의 신기에 가까운 푸트웍과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에 농락당한 끝에 8R 갑자기 등을 돌리며 경기를 포기해버려 충격을 안겨주었다.
후일 두란은 갑작스런 위경련으로 경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당시 설사같은 생리적 현상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고 레너드의 과도한 쇼맨쉽에 짜증이 나서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었을만큼 이날 두란의 노-마스(No Mas) 사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왕좌에 복귀한 레너드는 첫 방어전에서 래리 본즈를 제압한 뒤 웰터급 통합타이틀전을 앞두고 라이벌 토머스 헌스와 같은 링에 올라 한체급 위의 WBA 챔피언 아유브 카룰레를 9RTKO로 격침시키고 2체급을 석권하며 워밍업을 마쳤다.
1970년대 중・후반 웰터급을 호령했던 호세 쿠에바스의 장기집권을 충격적인 모습으로 종식시킨 디트로이트 출신의 <WBA>챔피언 <토머스 헌스>는 185cm의 장신에 긴 리치를 소유해 기형적으로까지 보일만큼 깡마른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추어시절에는 163전 중 KO승이 겨우 12번에 지나지 않을 만큼 솜방망이였지만 프로무대에 전향해서는 빠른 스피드와 강렬한 파괴력을 앞세워 챔피언에 오를 당시 90%가 넘는 경이적인 KO율을 자랑했다.
전매특허였던 플리커 잽과 위력적인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장착해 히트맨으로 불리웠던 헌스는 다채로운 리드펀치에 더블, 트리플 펀치를 잘 쳤고 상대와의 거리에 따라 펀치의 장단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상대의 펀치를 보는 시야가 좋은데다가 본래 푸트웍이 좋았기 때문에 레버리지를 이용한 히트 앤드 어웨이에도 능했고 기회다 싶으면 폭발적인 연타로 상대를 다그쳐 KO를 이끌어 냈다.
다만, 체형 때문에 중심이 높아 집중타를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오른손을 부실한 턱앞에 바짝 붙여놓고 있어서 오른쪽 관자놀이와 옆구리는 늘 상대의 표적이 되었다.
빠른 페이스로 타이틀 방어전에 나서 랜디 쉴즈 등 3명의 도전자를 모조리 KO로 쓰러뜨린 후 동시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WBC 챔피언 <슈거 레이 레너드>와 웰터급 최강의 자리를 놓고 뜨거운 승부를 예고했다.
이 경기에서 예상과 달리 헌스는 전반에 히트 앤드 어웨이 전법으로 제법 포인트를 벌었지만 13R에 터진 레너드의 라이트어퍼컷을 턱에 맞고 살인적인 컴비블로우에 시달리다가 14R 라이트훅을 재차 안면에 허용한 채 일방적인 공격을 받아 반실신 상태로 레퍼리 스톱이 걸리고 말았다.
당시 사상 최고의 대전료와 최대의 흥행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들의 드라마틱한 일전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결말로 마무리되며 1981년 링지를 비롯한 거의 모든 미디어로부터 최고의 경기에 선정되었고 프로복싱 역사상 다섯손가락안에 들어갈 만한 명승부로 손꼽혔다.
또한 이 경기를 기점으로 복싱계의 조류는 파워보다는 스피드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복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옮겨가기 시작했다.
레너드 전의 패배로 인해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게된 헌스는 이듬해 43년만에 사상 5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올랐던 윌프레드 베니테스를 누르고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획득해 재기에 시동을 걸었다.
한편, 호세 나폴레스 이후 양분된 웰터급을 통합한 레너드의 스타성은 천문학적으로 폭등해 포스트 알리 시대의 대표주자로 부각되며 복싱을 대중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해 줄 것으로기대를 모았다.
여기에 당대의 미들급 최강 마빈 해글러와의 대전설까지 나돌았지만 헌스와의 경기에서 악화된 눈부상 때문에 브루스 핀치와 한차례 방어전을 갖은 뒤 1982년 말 링을 떠나 버려 세계 복싱계는 스타가 없는 미래를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2년 뒤 망막수술까지 받은 레너드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케빈 하워드를 파트너로 링복귀에 나서 초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한차례 다운까지 당하는 졸전 속에 간신히 9R 레퍼리 스톱승을 거둘만큼 예전의 기량을 잃어 버린 탓에 영구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후 레너드는 방송 해설자로 변신해 해글러의 타이틀 방어전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은연중에 복싱인생의 제2막을 구상했고 1987년 그의 링복귀는 현실이 되었다.
레너드가 떠나간 자리에는 그동안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던 월드랭커들이 각축전을 벌였다.
먼저 <WBA>에는 장래의 세계챔피언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미국의 <도널드 커리>가 동양 최초의 웰터급 챔피언을 노리고 날아온 우리나라의 황준석을 꺽어 왕좌에 올랐다.
아마추어 시절 400승 6패의 놀라운 전적으로 골든글러브와 월드컵을 석권하며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에도 선발됐지만 미국의 보이코트 소식에 곧바로 프로 전향을 결심했다.
데뷔 초기에는 아마추어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해 고전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챔피언에 올라 한층 안정감을 찾아가며 롱런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동체시력이 좋고 공수전환이 빨랐던 그는 롱과 쇼트펀치를 구별해서 쓸줄 아는 테크니션으로서 상체의 움직임이 부족했지만 기가막힌 타이밍에 폭발하는 카운터 펀치가 발군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쿠에바스의 재기를 가로 막았던 로저 스태포드를 102초동안 세차례나 캔버스에 굴리며 KO승을 거두었고 <IBF>로부터 초대챔피언의 감투까지 받은 뒤 후일 양대기구를 석권하게 되는 강호 말론 스탈링을 재차 무너뜨려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WBC>쪽은 헌스의 크롱크짐 후배인 미국의 <밀턴 맥크로리>가 터프가이 콜린 존스와 두 번의 챔피언 결정전을 치른 끝에 타이틀을 획득하는 부진한 출발을 보였다.
180cm가 넘는 큰 키와 긴 리치를 활용한 전형적인 히트 앤드 어웨이 스타일로 레프트잽이 날카롭고 좌우로 움직임이는 푸트웍이 아주 빨랐다.
원투스트레이트가 철저하고 가끔씩 꽂아넣는 레프트훅의 적중률도 높았지만 너무 크게 드나들어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았고 스냅이 약해 펀치의 위력이 떨어지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비교적 약체들을 상대로 4차례의 방어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해 한때 복귀를 예고한 레너드가 도전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맥크로리와 접전을 벌였던 존스를 포함해 3연속 KO방어 속에 5차방어에 성공한 <도널드 커리>는 레너드 Vs. 헌스 전 이래 4년만에 맥크로리와 통합타이틀전에 나서게 되었는데 경기전 서로가 감정을 자극하는 독설로 주먹다짐 일보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정작 링 위에서는 커리가 불과 2R만에 환상적인 레프트카운터펀치로 맥크로리를 손쉽게 요절내고 <WBC>벨트마저 집어삼켜 레너드의 영광을 이어가며 커리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후 돈벌이도 시원치 않고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하자 2체급 석권을 노리며 월장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고 매니저 교체와 번복으로 인해 팀내 불화는 물론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 때 등장한 사나이가 바로 영국의 복병 <로이드 허니간>이었다.
그는 통산 8차방어에 나선 커리를 힘차게 몰아붙이며 버팅으로 왼쪽눈자위를 커트시켜 6R 종료 후 기권을 받아냈다.
자메이카령 세인트 엘리자베스 섬에서 태어난 허니간은 일찍이 영국으로 건너가 프로복서의 길을 걸었는데 초기에는 다소 투박하고 어지러운 경기스타일이 눈에 거슬렸지만 명장 미키 더프의 손에서 터프함에 예리함까지 갖추면서 언젠가 큰 일을 저지를 다크호스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왕좌에 오른 뒤 WBA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해롤드 볼브레흐트와 지명방어전을 지시하자 피부색이 검은 허니간은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타이틀을 반납했다.
이후 WBC와 IBF타이틀만 갖게 된 그는 거칠고 야성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허점도 많아 2차방어전에서 장신의 모리스 블록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당시만해도 15라운드제를 고수했던 IBF의 정책에도 반기를 들어 타이틀을 박탈당한 채 통산 4차방어전에서 무명이었던 멕시코의 <호르헤 바카>에게 8R 부상 판정패로 고배를 들어 커리를 꺽은 전과에 금이 가고 말았다.
한편, 허니간이 반납한 <WBA>타이틀은 당시 무서운 기세로 치솟고 있었던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가 볼브레히트를 7R에 주무기인 라이트스트레이트로 쓰러뜨리고 거머쥐었다.
전챔피언 헌스와 마찬가지로 188cm의 장신이었던 그는 LA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안영수를 제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아마추어 통산 110승(73KO)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기며 레너드를 능가하는 재목으로까지 평가받았다.
발군의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해 턱이 들리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연타를 칠 때 몸이 휘청거려 공격시 밸런스도 불안정했다.
반면 한번 리듬을 타면 레프트잽만으로도 상대를 능히 제압할 수 있었고 장신이기 때문에 상대의 어깨 위로 날아가는 라이트크로스카운터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허니간이 브릴랜드를 피하기 위해 타이틀을 버렸다는 루머가 날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첫 방어전에서 <말론 스탈링>의 교묘한 클린치 싸움에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11R 레프트훅을 턱에 맞고 무너져 예상외로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아마추어에서 97승13패의 준수한 전적을 기록했던 스탈링은 이미 커리에게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명트레이너 프레디 로치의 지도로 기량이 일취월장해 후일 세계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사이먼 브라운과 루페 아퀴노를 비롯한 여러 강호들과 힘을 겨루어 실력을 키웠다.
그는 능구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노련한 복싱을 구사했는데 긴 리치를 갖고 있어 안면 커버링이 견고한데다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속도가 빨랐고 빈틈을 놓치지 않는 주도면밀한 카운터 펀치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브릴랜드와의 리매치에서 후반에 추격을 당해 무승부로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절대 우세속에 나선 <토머스 모리나레스>와의 3차방어전에서 6R 종료 공소리 직후 터진 오버핸드 라이트펀치 한방에 사경을 헤매며 타이틀을 넘겨주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레너드는 과거 헤비급의 알리와 더불어 프로복싱을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 공로를 세우게 되는데 아마추어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슈퍼스타답게 행운을 몰고 다녔다.
우선 그의 전성기에 이른바 빅네임으로 평가받던 베니테스와 두란, 헌스같은 라이벌이 공존했으며 이들과의 연이은 대결은 곧바로 대중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더욱이 당대에 미들급을 철권통치하던 해글러의 존재는 복싱팬들로 하여금 그의 링복귀를 손꼽아 기다리게 했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레너드에게는 복싱의 진수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파시킨 공로자라는 칭호가 붙기도 했다. 그러나 레너드의 빈자리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그의 조기 은퇴와 함께 이 체급은 커리의 왕좌 통일에도 불구하고 소강상태를 맞이하며 한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이 체급은 제3의 기구였던 IBF가 독자적인 세계챔피언을 내놓은데 이어 1989년에는 WBO까지 새로이 출범하면서 선수층이 두터운 체급답게 맹수들이 포효하는 야성의 각축장이 되었다.
먼저 남미대륙 최초의 웰터급 세계챔피언 <토머스 모리나레스>는 국제적으로 무명에 가까웠지만 기본기를 잘 갖춘 무패의 슬러거로서 레프트어퍼컷과 라이트오버핸드가 장기였다.
말론 스탈링 전에서 종료 후 가격한 사실 때문에 경기가 열린 뉴저지주 체육위원회으로부터 노컨테스트 결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WBA>는 모리나레스의 왕좌를 계속 인정해 주었으나 이로 인한 우울증과 함께 아내와의 불화까지 겹치면서 5개월 후 돌연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해버려 가장 미스터리한 챔피언으로 남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모리나레스에게 도전이 유력했던 전 챔피언 <마크 브릴랜드>는 우리나라의 이승순을 단 54초만에 쓰러뜨리고 재임에 성공했다.
1년 반만에 왕좌에 복귀한 브릴랜드는 연약하게만 보이던 과거와 달리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장신을 이용한 호쾌한 라이트스트레이트는 더욱 더 위력적인 무기가 되어 있었다.
스위스와 일본 등 적지를 마다하지 않고 타이틀 방어전에 나서는 대담함과 함께 라이벌로 부각되던 허니간을 런던에서 6번 다운시키며 3RKO로 일축해 이번 만큼은 롱런이 확실해 보였으나 5차방어전에서 맞이한 동국의 <아론 데이비스>에게 초반부터 치명적인 약점인 부실한 턱을 노출시키더니 종반에 라이트카운터펀치 한방을 허용한 채 실신해 버렸다.
이후 전 챔피언 호르헤 바카에게 마저 뭇매를 얻어 맞으며 복싱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던 브릴랜드는 5년만에 홀연히 컴백해 5연승을 거두었지만 더 이상 기회는 없었다.
은퇴 후 트레이너로 전향해 버논 포레스트를 웰터급 챔피언에 올려 놓았고 최근에는 WBC 헤비급 챔피언 디온테이 와일더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적지에서 밀리지 않는 뚝심을 발휘해 부상 판정으로 <WBC> 타이틀을 거머쥔 집념의 복서 <호르헤 바카>는 힘이 좋은 터프가이로 레프트훅이 인상적이었으나 이미 다섯 번의 KO패를 경험할 만큼 디펜스와 내구력이 부족해 그저 운좋은 럭키가이로 분류됐다.
5개월 뒤 재회한 <로이드 허니간>과 이번에도 첫 회부터 무리한 난타전을 벌이더니 3R에 라이트 보디샷을 맞고 쓰러져 예상대로 단명에 그쳤다.
돌아온 허니간은 이전보다 공수의 균형감이 돋보였지만 2차방어전에서 맞이한 <말론 스탈링>의 끈적끈적한 복싱에 말려 들어 시종일관 고전하다가 한차례 다운까지 내주며 레퍼리 스톱이 걸렸다.
게다가 그는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 양성반응까지 나타나 이래저래 망신살이 뻗쳤고 브릴랜드에게 참패한 뒤 한체급 월장을 시도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양대기구를 석권한 스탈링은 허니간의 로우블로우에 KO패가 선언됐던 정영길의 도전을 가볍게 제압한 뒤 소위 4인방이라는 불리운 레너드-헌스-두란-해글러 간의 미들급 랠리에 자극 받은 듯 IBF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무패의 마이클 넌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이 경기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발을 이용해 간교할 정도로 여유있는 아웃복싱을 전개하며 넌의 졸전을 유도했지만 이렇다할 공격 포인트가 없어 승리를 따내지는 못했다.
넉달 뒤 2차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였던 미국의 <모리스 블록커>에게 또 다시 패하자 내리막을 절감한 채 깔끔하게 링을 떠났다.
3년전 허니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블록커는 188cm의 뛰어난 신체조건과 펀치력은 물론 상대를 옴싹달싹 못하도록 묶어 버리는 거미줄과 같은 기술도 있어 전문가들로부터 롱런할 것으로 관측되었으나 불과 첫 방어전에서 오랜 친구였던 IBF 챔피언 <사이먼 브라운>에게 KO패를 당해 전성기가 지난 뒤 왕좌에 오른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최초 출범 당시 도널드 커리를 챔피언으로 인정했던 <IBF>는 15라운드제에 반기를 든 허니간의 타이틀을 박탈하고 1988년 4월 타이론 프라이스에게 14R에 역전 KO승을 일궈낸 자메이카의 <사이몬 브라운>을 새로운 챔피언으로 옹립했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해 아마추어를 거쳐 프로에 데뷔한 브라운은 3년전 경험부족으로 인해 스탈링에게 석패한 적도 있었지만 슈거 레이 레너드에게 선전을 펼쳤던 케빈 하워드와 LA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숀 오설리반을 연파하고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교적 평범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옆구리 깊숙이 나오는 체중실린 레프트훅과 원투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었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상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싶으면 곧바로 거칠고 무서운 연타를 쏟아내 KO를 이끌어 냈다.
첫 방어전에서 전 WBC 챔피언 바카를 손쉽게 물리친 이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타이틀을 방어해 힘을 키워 갔지만 6차방어 상대인 터프한 기교파 루이스 산타나에게는 그동안 단점으로 지적됐던 느린 스피드와 리드 펀치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냈지만 어느새 관록이 붙은 브라운은 프라이스를 다시 한번 제압한 뒤 블록커를 10R 레프트훅으로 링줄에 널어 놓으며 WBC 타이틀을 흡수해 사실상 이 체급 최강으로 군림했다.
이에 따라 IBF에 대한 팬들의 눈높이가 달라졌지만 양대기구를 통일한 브라운은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IBF 간판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WBC쪽으로 귀화(?)해 버렸다.
브라운이 버린 왕좌는 재기를 노리던 <모리스 블록커>가 강호 글렌우드 브라운을 상대로 난타전을 벌인 끝에 투타임 챔피언에 올랐고 내친김에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 테리 노리스에게 도전했지만 2R를 버티지 못했다.
이후 2차방어전에서 신예 <펠릭스 트리니다드>에게도 역시 2R에 참담한 KO패를 당해 비극적인 피날레를 맞이했다.
1989년 등장한 <WBO>는 무명의 대니 가르시아를 1R에 라이트훅 원펀치로 넉아웃시킨 멕시코의 <게나로 레온>을 초대 챔피언으로 앉혔다.
LA올림픽에 출전해 브릴랜드에게 1RKO패를 당하기도 했던 레온은 이미 나이가 28살이어서 유망주로 부르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다부진 체구에 찬스 포착이 빠르고 인간풍차로 불리울 만큼 펀치력도 살아 있어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당시 이 체급에서도 WBO는 아직까지 진정한 세계챔피언으로 공인받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자진 반납 후 WBC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매이저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후임에는 잡초같은이 질긴 생명력을 보이던 미국의 <매닝 갤로웨이>가 알 함자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던 비브로 보이킨을 누르고 선택됐다.
18살에 프로데뷔한 이래 산전수전을 겪어가며 11년만에 세계챔피언의 직함을 얻게 된 갤로웨이는 사우스포답게 파워보다는 기교파에 가까운 선수였는데 분명히 기본기가 충실하고 허슬 플레이에도 능했지만 유난히 턱이 약해 다운이 잦은 편이었다.
머지 않아 교체가 유력했으나 첫 방어전에서 니카 쿠말로를 꺽은 뒤 아프리카와 유럽, 호주 등지를 떠돌아 다니면서도 꿋꿋하게 5차방어에 성공했고 영국의 유망주 패트 바레트마저 따돌려 비로소 복싱팬들의 눈길을 받았지만 8차방어전에서 세 번째 대결한 덴마크의 <게르트 보 야콥센>의 끈질긴 추격에 덜미가 잡혀 3년만에 벨트를 풀어주었고 그 뒤 46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때 유럽의 라이트급 최강자로 군림했던 야콥센은 왼손가드가 높고 잽과 스트레이트의 활용이 돋보였지만 선이 가는 복싱을 구사해 전체적으로 힘을 느끼기 어려웠다.
신설기구인 탓에 좀처럼 방어전 일정이 잡히지 않자 바로 타이틀을 내던지고 Jr.웰터급으로 내려갔지만 후일 WBA 챔피언에 오르는 칼리드 라힐로우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더 이상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변의 사나이로 불리운 <WBA> 챔피언 데이비스는 호전적인 인상에 파워풀한 레프트훅을 장착해 새시대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슬로우 스타터인데다가 연타능력이 떨어지고 스피디스터에게도 약점을 갖고 있었다.
첫 방어전에서 얄미울 정도로 치고 빠지는 <멜드릭 테일러>의 스피드 복싱에 농락당해 고작 6개월만에 무관이 되었다. 2체급을 석권한 테일러는 글렌우드 브라운과의 2차방어전에서 혼쭐이 나고도 3관왕을 꿈꾸며 호기롭게 노리스의 아성을 두드렸으나 4RTKO로 패해 한계를 드러냈다.
체급을 올린 뒤 확실히 신장을 비롯한 체격조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테일러는 결국 베네수엘라의 <크리산토 에스파냐>의 레프트어퍼컷에 가라앉으며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전 WBA 라이트급 챔피언 에르네스토의 동생인 에스파냐는 명장 바니 이스트우드의 손에 이끌려 일찌감치 영국으로 건너가 캐리어를 쌓았다.
사우스포임에도 18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강렬한 라이트 펀치와 함께 날카로운 연타를 소유해 제법 KO율이 높았지만 마라톤으로 다져진 끈기를 유지하지 못한 채 3차방어전에서 가나의 바주카포 <아이크 쿼테이>에게 무릎을 꿇고 단 한번의 패배로 링을 떠났다.
로마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던 이복형의 영향으로 복싱에 입문한 쿼테이는 서울올림픽 2회전에서 고배를 마신 후 프로에 데뷔해 고국에서 뛰다가 4년 뒤 프랑스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한치의 오차가 없는 아름답고 날카로운 레프트잽과 이를 뒷받침하는 원투 콤보와 레프트훅이 인상적이었고 빈틈없는 디펜스와 스태미나까지 겸비해 재능과 근성을 고루 갖춘 파이터로 평가됐다.
3차례의 방어전을 KO로 싹쓸이 하면서도
주전장이 유럽인 탓에 지명도가 낮았지만 본고장 미국에서 실력파로 분류되던 빈스 필립스와 오바 카를 연이어 격파하자 마침내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으나 호사다마처럼 다가온 호세 루이스 로페스와의 7차방어전에서 말라리아로 인한 컨디션 난조 속에 겨우 무승부로 세이브한 뒤 계속된 건강 악화와 여러가지 개인적인 문제로 링에서 멀어졌다.
이듬해 로페스와의 리매치 지시를 무시하고 거액이 보장된 오스카 델 라 호야와 대전계약을 체결하면서 WBA로부터 타이틀을 박탈당헸다.
양대기구 타이틀을 통합한 <WBC> 챔피언 브라운은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련미까지 더해져 앞으로 웬만한 상대는 쉽게 뛰어넘을 것처럼 보였지만 손쉬운 승리가 예상됐던 미국의 <제임스 맥거트>에게는 KO패나 다름없는 판정패를 당해 Jr.미들급으로 쫓겨났다.
웰터급에서 부활한 2관왕의 맥거트는 기민한 사이드 스텝과 찬스를 잡았을 때 터지는 면도날같은 컴비블로우로 아랫 체급에서 올라온 파트리치오 올리바를 적지에서 사로잡은데 이어 WBO 타이틀을 버리고 달려든 레온 마저 판정으로 따돌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으나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희대의 테크니션 <퍼넬 위태커>였다.
이미 라이트급을 평정하고 맥거트를 제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위태커는 이 체급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1993년 9월 열린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와의 첫 방어전은 비록 무승부 판정을 받았지만 프로데뷔 이래 13년간 무패가도를 질주해 왔던 차베스에게 사실상 첫 패배를 안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의미가 컸다.
경이적인 동체시력과 발군의 반사신경을 통해 방어를 퍼붓고 있다는 명언을 낳은 위태커는 이제는 관중들에게 코믹함까지 선사할 정도로 여유로운 방어행진을 벌여 나갔다.
더욱이 1995년 3월에는 WBA 슈퍼웰터급 10차방어에 빛나는 훌리오 세자르 바스케스를 무너뜨리고 사상 네번째로 4체급 석권의 금자탑까지 쌓았으나 파괴력 부족으로 공격 보다 수비 시간이 길었던 탓에 천부적인 재능과 엄청난 실적에도 불구하고 소위 업계(?)로부터 철저히 평가절하 당했다.
결국,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팬들의 열망이 반영된 탓인지 1997년 4월 P4P 최강을 가리는 <오스카 델 라 호야>와의 9차방어전에서 한차례 다운을 빼앗는 선전을 펼치고도 판정으로 패해 또 다른 4관왕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사실 호야의 웰터급 진출로 인해 순식간에 찬밥신세가 되버린 위태커는 4관왕의 롱런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호야보다 적은 대전료를 감수해야 했고 저지들마저 호야의 상품성에 흔들려 사실상 퇴출당하다시피 했다.
라이트급에 이어 웰터급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위태커는 한때 실의에 빠져 코카인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2년 뒤 트리니다드에게 도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쓸쓸히 은퇴했다.
티토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웠던 <IBF> 챔피언 트리니다드는 푸에르토리코가 배출한 최고의 복서 중 하나였는데 소년시절부터 링에 올라 무려 5체급에서 아마추어 내셔널 챔피언에 오를 정도로 장래가 촉망됐던 라틴 복서의 전형이었다.
비교적 큰 키에 긴 팔다리, 약간 좁아 보이는 어깨 때문에 갸날픈 느낌마저 주었지만 전신의 힘을 주먹 끝에 전달시켜 파워를 폭발시키는 능력은 최고였다.
프로데뷔 3년차에 세계타이틀을 손에 넣은 약관의 트리니다드는 확실히 싱그럽고 풋풋한 맛이 있었다.
안정된 자세에서 힘차게 쏟아붓는 간결한 원투스트레이트와 환상적인 레프트훅은 호쾌하다 못해 매력적이었으며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강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항상 긴장된 상태 속에 공수를 조율했고 공격을 가할 때 체중이동이 자연스러워 교과서적이었던 스탠스는 그를 명챔피언으로 이끌어 준 원동력이 되었다.
첫 방어전에서 테일러와 블록커를 괴롭혔던 터프가이 루이스 가르시아를 원투스트레이트 컴비네이션으로 초살시킨 뒤 웰터급으로 쫓겨난 3관왕의 엑토르 카마초마저 완벽히 제압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라스베이거스를 주무대로 방어전을 거듭해 헨리 암스트롱과 피피노 쿠에바스의 기록을 뛰어넘는 9연속 KO방어를 이룩하며 통산 12차방어에 성공했다.
IBF 챔피언이었지만 그의 KO리스트에는 요리 보이 캄파스, 오바 카, 프레디 펜들턴같은 강호가 즐비해 방어전의 순도가 결코 낮지 않았고 왕좌 복귀를 노리는 위태커를 상대해 그도 많이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게 해주었다.
동안의 귀여운 마스크와 약한 턱에도 불구하고 다이나믹한 경기운영과 거칠게 상대를 휘몰아치는 트리니다드의 왕성한 공격력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정도여서 인파이팅을 선호하는 팬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신흥 강호로 떠오른 트리니다드는 WBC 챔피언 호야, WBA 챔피언 쿼테이와 함께 라이벌 삼각 구도를 형성하며 세기말 뜨거운 한판 승부를 예고했다.
한편, 야콥센이 반납한 <WBO> 타이틀은 아일랜드의 <에이몬 로그란>이 로렌조 스미스를 대차의 판정으로 꺽고 차지했다.
다부진 체격의 로그란은 원투스트레이트가 정확하고 좌우훅에 힘이 넘쳤지만 주먹 외에 머리도 들이댈 정도로 터프했다.
여전히 마이너 타이틀로 분류됐던 탓에 전임 갤로웨이 외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도전자들과 방어횟수를 늘려 나갔지만 공격시 허술한 안면 가드로 인해 6차방어전에서 <호세 루이스 로페스>에게 경기 시작 15초만에 첫 다운을 내주며 쓰리 넉다운으로 물러났다.
멕시코의 로컬 복서 출신인 로페스는 푸트웍은 없지만 두둑한 배짱을 앞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폭발적인 연타는 물론 스태미나까지 겸비한 터프가이였다.
동국의 캄파스의 눈자위를 일찍감치 커트시켜 첫 방어에 성공한 뒤 보잘 것 없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미국으로 진출해 전 챔피언 바카와 데이비스를 연파해 이 체급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다.
이후 WBA 챔피언 쿼테이와 후임 제임스 페이지에게 잇달아 도전해 두 경기 모두 선전을 펼쳤지만 판정에 울며 끝내 메이저 타이틀을 손에 쥐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로페스의 타이틀 반납으로 공석이 된 왕좌에는 후일 WBA 슈퍼웰터급 챔피언에 오르는 산티아고 사마니에고를 판정으로 물리친 <미하엘 뢰베>가 이름을 올렸다.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서 우승하며 190승 10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남겼던 그의 원래 이름은 미하이 레우였으나 독일에서 프로데뷔하며 링네임을 바꾸었다.
동구권 특유의 업라이트 스타일로 아마추어 시절의 습관이 짙게 배어 있었으나 독일의 명장 프리츠 주네크와 함께 하면서 차츰 터프니스를 갖추어 나갔으나 사마니에고 전에서 다친 왼손 부상이 악화되어 마이클 캐루스와의 첫 방어전을 끝으로 링을 떠나면서 유럽에서는 테리 마시에 이어 두 번째 무패로 은퇴한 챔피언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랠리 드라이버로 변신해 5년만에 현대자동차의 액센트 RC를 타고 내셔널 챔피언에 오르는 색다른 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다.
양대기구를 통일했던 슈거 레이 레너드와 도널드 커리가 떠난 뒤 이 체급은 4대기구에서 서로 다른 스타일의 챔피언들이 각자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충돌해 바야흐르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 들었으나 1990년대 프로복싱의 인기가 전반적으로 하락한 가운데 관록의 4관왕 위태커와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쿼테이가 롱런 가도를 달렸고 IBF에도 트리니다드라는 걸출한 스타 후보가 등장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여기에 위태커를 권좌에 밀어낸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오스카 델 라 호야가 세기말 땅에 떨어진 프로복싱의 자존심을 살려줄 구세주로 웰터급 전선에 등장해 이 체급은 레너드 이후 오래간만에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1997년 전세계 복싱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웰터급에 상륙한 4관왕의 <오스카 델 라 호야>는 챔피언 퍼넬 위태커와의 <WBC> 타이틀전에서 생애 처음으로 고전을 펼치며 편파판정 논란까지 일어나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으나 여전히 박진감 넘치는 호전적인 경기 운영과 경쾌한 푸트웍에 체중을 실어 날리는 묵직한 연타를 앞세워 1990년대말 최고의 상품가치를 인정받으며 ‘골든보이’ 답게 세계프로복싱의 흥행을 주도해 나갔다.
슈거 레이 레너드와의 노인정 매치에서 KO승을 거둔 엑토르 카마초에게 한차례 다운을 포함해 완승을 거둔 뒤 위태커를 괴롭혔던 윌프레도 리베라에 이어 2년여만에 재회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마저 또 다시 TKO로 제압해 건재를 과시했다.
대부분 전성기를 넘겼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던 상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야는 비교적 네임밸류가 높았던 이들과의 대결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프로복싱을 구해내며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6차방어전에서 WBA 챔피언을 역임한 무패의 아이크 쿼테이를 맞아 다운을 주고받는 뜨거운 난타전 속에 신승을 거두어 전세계 복싱팬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호야가 메이저 기구 챔피언으로서 절대권력을 유지한 채 성가를 높이면서 또 한명의 라이벌이었던 IBF 챔피언 <펠릭스 트리니다드>와의 통합타이틀전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헤비급을 제외한 최고의 대전료를 기록한 이들의 대결은 레너드 Vs. 헌스 전 이래 최고의 빅카드로 평가받으며 ‘밀레니엄 파이트’라는 거창한 문구로 치장되었으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호야가 예상밖의 아웃복싱을 전개하며 시종일관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쳐 화끈한 타격전을 기대했던 수많은 복싱팬들을 실망시킨 가운데 프로에서 첫 검은별을 달며 8차방어에 실패했다.
세기의 졸전이라는 비아냥 속에 찝찝한 판정승으로 WBA 타이틀을 흡수한 <IBF> 챔피언 <펠릭스 트리니다드>는 경기 직후 호야와의 재대결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지만 6년간 이 체급에서 두번째로 많은 통산 15차례의 타이틀을 방어하며 최강이었던 호야까지 꺽은 마당에 그에게는 더 이상 웰터급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새로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 한차례의 방어전도 없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Jr.미들급으로 월장했다.
트리니다드의 뒤를 이은 미국의 <버논 포레스트>는 가이아나의 라울 프랭크와 두차례의 챔피언 결정전을 치루고 왕좌에 등극했다.
아마추어시절 코스티야 추에게 석패해 세계선수권 준우승에 머물렀던 그는 183cm의 큰 키에 긴 리치를 갖고 있었는데 애칭인 독사답게 타점 높은 라이트스트레이트는 물론 빼어난 완급 조절과 파괴적인 연타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장래가 기대되었다.
7개월 후 메이저 타이틀 도전이 성사되자 미련없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떠나버려 IBF 왕좌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새 챔피언에는 이탈리아의 <미켈레 피치릴로>가 홈링에서 말썽많은 판정승을 거두고 올랐는데 비교적 장신으로서 기본에 충실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복싱을 구사해 유럽에서는 링의 신사로 통했지만 챔피언 결정전 이후 11개월만에 재격돌한 <코리 스핑크스>의 빠른 잽과 스피드에 사로잡혀 단명하고 말았다.
무하마드 알리를 이겼던 레온의 아들이자 L.헤비급과 헤비급을 동시에 제패했던 마이클의 조카로 잘 알려진 스핑크스는 사우스포의 아웃복서로서 리드미컬한 라이트잽과 레프트스트레이트 거기다 기습적인 좌우훅까지 섞어가며 때려 부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듯 펜싱을 방불케하는 스피드 복싱을 선보였지만 보잘 것 없는 펀치력에 소극적이고 디펜스에 의존하는 경기 스타일은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쿼테이의 <WBA> 타이틀 반납으로 행운을 차지한 것은 미국의 <제임스 페이지>였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톱랭커였던 러시아의 안드레이 페스트리아에프를 2R에 레프트훅 일발로 실신시킬만큼 뛰어난 펀치력을 자랑했으나 유리한 신체조건에 비해 눈에 띄는 주무기가 없었고 경기운영도 어정쩡한 편이어서 사실 정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쿼테이를 괴롭혔던 호세 루이스 로페스에게 다운을 내주며 어렵게 타이틀을 지켜낸 뒤 만만한 상대를 골라 3차방어에 성공하며 그런대로 안정을 찾아 갔지만 프로모터 돈 킹과의 불화때문에 지명방어전을 이행하지 못하면서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이듬해 WBA의 배려 덕분에 왕좌 복귀의 기회를 잡고도 19개월의 오랜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신예 <앤드류 루이스>의 라이트훅에 고꾸라져 7R에 레퍼리 스톱이 걸렸다.
링을 떠난 페이지는 어처구니없게도 은행강도로 전업(?)해 교도소를 드나들며 쓰레기같은 인생을 이어가 충격을 주었다.
프로복싱의 불모지 가이아나 최초의 세계챔피언인 루이스는 상당히 자극적인 외모때문인지 ‘Six Heads’라는 독특한 링네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세계챔피언에 오르던 날이 임시 공휴일로 선포될만큼 자국에서는 스포츠 영웅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음에도 날렵한 스피드와 파워풀한 연타, 장기인 레프트스트레이트가 폭발적이었던 반면 공격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 밸런스가 무너져 디펜스까지 부실해지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2차방어전에서 헤드 버팅으로 인한 노디시전으로 다시 만난 <리카르도 마요르가>의 무지막지한 좌우훅에 5R만에 침몰해 기대만큼 오래가지 못했고 2015년 오토바이 사고로 이른 나이에 사망해 슬픔을 안겨 주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빅네임들의 격전장이 되었던 이 체급에서 유독 관심을 받지 못했던 <WBO> 타이틀은 러시아의 <아흐메드 코티에프>가 미국의 레너드 타운센드를 누르고 차지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독일에서 동료들과 함께 프리츠 주네크의 손에서 실력을 키워온 코티에프는 접근전을 선호하는 동구권 특유의 뻣뻣한 스타일이었지만 롱과 쇼트펀치를 적절히 구사할 줄 알았고 안정된 스탠스에 가드가 높아 수비벽도 견고했다.
다만, 손을 자주 내지 않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고 푸트웍을 살리지 못해 아웃복서에게는 고전을 강요당했다.
2류들을 상대로 봄날을 즐기다가 푸에르토리코의 강호 <다니엘 산토스>에게 걸려들어 2연전 끝에 통렬한 카운터펀치를 맞고 5차방어전에 실패하자 그대로 링을 떠났다.
애틀란타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출신답게 탄탄한 기량으로 연승가도를 달리며 정상에 오른 산토스는 사우스포의 강타자로 유연성은 떨어졌어도 인-아웃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적당한 스웨이나 클린치를 이용한 회피능력도 눈에 띄었다.
카운터펀치는 소심한 편이었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약세를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낌없이 연타를 퍼부었다.
실력있는 프로모터를 만나지 못한 탓에 크게 이름을 알리지 못하다가 유럽에서 치른 방어전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두각을 나타냈으나 좀처럼 빅매치의 기회를 잡지 못하자 3차방어 후 타이틀을 버리고 Jr.미들급으로 올라갔다.
2000년 3월 트리니다드가 이 체급을 떠나자 <WBC>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카 델 라 호야>의 허리에 챔피언벨트를 감아 주었는데 그는 불과 일주일전에 데렐 콜리와의 지명도전자 결정전에서 승리했을 뿐이었다.
당시 WBC는 트리니다드가 마이너기구 챔피언 출신이고 의심스러운 판정으로 타이틀을 통일한 것에 불과한 반면 호야는 여전히 세계프로복싱을 이끌어 갈 슈퍼스타로 내다보고 얄팍한 술수로 그의 왕정을 복고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나 생애 첫 패배의 충격때문이었는지 호야는 기대와 달리 석달 후 라이트급에서 올라온 동국의 <쉐인 모슬리>에게 유효타에서 뒤진 채 또 다시 근소한 차의 판정으로 고개를 떨구어 그의 전성기도 정점을 찍어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아마추어시절부터 묘한 대립관계였던 호야를 꺽고 비로소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모슬리는 두체급 아래인 라이트급과 달리 이 체급에서는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더욱 원숙해진 기량으로 승승장구했다.
스피드 펀처답게 여전히 탁월한 순발력과 함께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벼락같은 컴비네이션으로 강호 안토니오 디아스와 새넌 테일러를 연파했고 로이드 허니간의 영광을 재현하려했던 아드리안 스톤마저 실신시켜 당대 최강의 파이터 중 하나로 우뚝 섰다.
그러나 4차방어전에서 과거 자신의 올림픽 출전을 좌절시켰던 숙적 <버논 포레스트>에게 속절없이 얻어터지며 생애 최악의 경기를 펼쳐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포레스트는 6개월만에 재회한 모슬리에게 다시 한번 완승을 거두어 천적임을 입증하며 링지로부터 2002년 최고의 선수로 선정돼 당분간 그의 독주가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천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리카르도 마요르가>였다.
<WBA> 정상을 정복한 니카라과 출신의 마요르가는 전반적으로 기량은 떨어지나 발군의 전투력을 소유한 전형적인 싸움꾼이었다.
현대복싱에서 사라지다시피한 거친 파이팅을 선보인 그는 옛 시절의 복싱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링밖에서도 망나니같은 과격한 이미지를 드러내 이렇다할 가십거리가 없었던 복싱계에 이슈를 전해주기도 했다.
게다가 2003년 1월에는 <WBC> 챔피언 포레스트와 통합타이틀전에 나서 3RTKO승으로 양대기구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고 리매치에서도 거침없는 전진스텝과 자신의 특성을 잘 살린 복싱으로 접전 끝에 승리를 따내 종이호랑이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마요르가의 슈퍼챔피언 승격으로 비어있던 정규챔피언에는 미국의 <호세 안토니오 리베라>가 적지 독일에서 무패의 미셀 트라반트를 누르고 데뷔 11년만에 왕좌에 올랐다.
푸에르토리코계로서 오랜 캐리어를 통해 안정된 공수를 보여주었지만 손부상때문에 무려 1년반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동국의 <루이스 콜라조>에게 근소한 차의 판정패로 물러난 뒤 곧바로 Jr.미들급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마요르가는 내친김에 IBF 챔피언 <코리 스핑크스>와 3대기구 챔피언벨트를 모두 걸고 격돌했으나 통합타이틀전답지 않게 하품이 날 정도로 지루한 경기 속에 거의 전 라운드를 달아나기로 일관한 스핑크스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부친과 숙부에 이어 가문의 영광을 재현한 스핑크스는 이 체급의 통합챔피언이라는 명함을 내밀기에는 미흡한 실력이었지만 빅네임들의 잇단 월장으로 텅텅 빈 이 체급에서 통산 3차방어에 성공하며 날이 갈수록 위세를 더했다.
그러나 열달전 아쉽게 물러났던 <잡 주다>에게 고향 팬들앞에서 통렬한 복수극을 당해 역시 거칠고 사나운 웰터급 무대에서 살아남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음을 자인했다.
한편, <IBF> 타이틀이 <코리 스핑크스>에서 <잡 주다>로 통합챔피언의 계보를 이어가며 각광받는 가운데 챔피언 공석 사태가 거듭된 <WBO>쪽에도 이번에는 모처럼 굵직한 챔피언이 탄생됐다.
산토스에게 도전했다가 1R에 헤드버팅으로 무효 처리되었던 멕시코의 <안토니오 마가리토>가 2002년 3월 안토니오 디아스를 10RTKO로 격침시키고 새 챔피언에 등극한 것이다.
큰 키에서 뻗어 나오는 레프트잽과 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면서도 수비에는 다소 허점이 있었지만 몸서리가 처질 정도의 엄청난 맷집과 뛰어난 정신력을 바탕으로 쉴틈없이 연타를 몰아치며 상대를 압박했다.
특히, 교묘할 정도로 빈 곳을 찾아내어 꽂아 넣었던 좌우어퍼컷은 전가의 보도로서 웬만한 테크니션이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로부터 통합챔피언인 주다보다 훨씬 더 많은 재능을 인정받았고 실력파로까지 평가받기도 했다.
2차방어전에서 투타임 챔피언을 노리는 앤드류 루이스를 초살시킨 뒤 Jr.미들급으로 올라가 산토스와 재회해 9R에 또 다시 헤드버팅으로 경기가 중단되며 근소한 차의 부상판정패로 분루를 삼켰다.
웰터급으로 돌아와 하드펀처로 소문난 잠정챔피언 커미트 신트론을 5R만에 눕힌 데 이어 후일 IBF 챔피언에 오르는 조슈아 클로티마저 판정으로 제압해 역시 물건임을 입증했다.
메인스트림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8차방어전에서 <폴 윌리엄스>의 지능적인 히트 앤드 클린치에 사로잡혀 5년만에 무관으로 내려 앉았다.
1990년대 후반 슈퍼스타 호야의 등장으로 웰터급은 그 어느 체급보다 큰 기대를 모았지만 라이벌이었던 트리니다드와 모슬리 전에서 뚜렷한 경기력 하락을 드러냈고 포스트 호야가 되어줄 것으로 믿었던 모슬리마저 얼마되지 않아 붕괴하면서 복싱팬들의 시선은 서서히 L.헤비급 챔피언 로이 존스 주니어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후 고만고만한 챔피언들이 통합타이틀전까지 벌이며 안간 힘을 써봤지만 전통적인 이 체급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 트리니다드는 물론 모슬리, 포레스트, 스핑크스, 주다 등이 웰터급의 실권을 이어가며 IBF의 권위를 신장시켰고 WBO도 마가리토를 배출하며 기존의 양대기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였다.
코리 스핑크스에게 패배를 설욕하고 <WBA> <WBC> <IBF> 통합챔피언에 올라 화려하게 부활한 2관왕의 <잡 주다>는 첫 방어전에서 전광석화와 같은 컴비블로우로 코스메 리베라를 침몰시켜 여전히 강력한 피지컬과 뛰어난 스피드를 과시하며 다시 한번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빅매치를 앞두고 몸풀기 상대로 여겼던 <WBC> 톱콘텐더 <카를로스 발도미르>에게 예상 밖의 업셋을 당해 1년도 못채우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발도미르가 다른 기구에는 10위안에 랭크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WBA는 미리 타이틀을 박탈했고 <IBF>는 <잡 주다>를 계속해서 타이틀 홀더로 인정하는 혼선이 빚어졌다. 2006년 최고의 이변을 연출하며 35살의 나이에 신데렐라로 떠오른 발도미르는 보잘 것 없는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보유했던 WBC 인터내셔널 타이틀을 앞세워 유럽 각지를 제집 드나들 듯이 오가며 풍부한 경험과 무시못할 저력을 쌓아왔다.
다소 정제되지 못한 공수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들소처럼 밀고 들어가는 힘이 돋보였고 기본적으로 단단한 맷집과 터프니스를 갖추고 있어서 상대의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IBF 덕분에 왕좌를 유지했던 주다는 다소 김이 빠진 가운데 예정대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2차방어전에 나섰지만 중반 이후 리드를 허용하자 또 다시 멘탈이 붕괴되어 로우블로우를 남발하는 우를 범하며 마지막 남은 벨트마저 넘겨 주었다.
오스카 델 라 호야에 이어 두 번째로 무패행진 속에 4체급을 석권한 메이웨더는 빅네임들의 잇달은 월장으로 공허해진 이 체급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IBF가 쓸데없이(?) 주다와의 리매치를 종용하자 두말없이 타이틀을 반납해 버렸다.
마가리토를 누르고 <WBO> 왕좌에 오른 <폴 윌리엄스>는 당대의 강호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는 적었지만 토머스 헌스를 연상시킬만큼 장신에서 터져 나오는 스트레이트와 훅이 위력적이었고 사우스포로서 연타능력도 좋은 편이어서 실력파로 분류되었다.
다만, 중량급치고는 파괴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더니 첫 방어전에서 푸에르토리코의 <카를로스 퀸타나>에게 허를 찔리고 말았다.
상당한 수준의 힘과 기량을 소유했던 퀸타나는 ESPN의 지원 속에 강타자로 성장했는데 무엇보다 쉴새없이 내뿜는 스트레이트 연타가 특히 일품이었지만 <폴 윌리엄스>와의 리매치에서 1R 시작과 동시에 맹폭을 당하며 135초만에 쓰러져 전율적인 복수극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브룩클린 출신의 <WBA> 정규챔피언 <루이스 콜라조>는 엄청난 근성의 소유자로서 안정된 디펜스와 함께 상체의 움직임이 빠르고 접근전에서 짧게 끊어치는 쇼트펀치가 매우 날카로웠다.
첫 방어전에서 미구엘 앙헬 곤살레스를 가볍게 제압한 뒤 당시 Jr.웰터급을 호령했던 <리키 해튼>과 난타전 끝에 아쉽게 판정으로 패해 단명에 그쳤다.
한때 웰터급 전향도 고려했던 해튼은 콜라조와의 시합에서 고전한 탓인지 석달만에 타이틀을 반납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투타임 챔피언에 오르며 2관왕에 만족했다.
공석이 된 왕좌는 호시탐탐 월장을 노리던 푸에르토리코의 <미구엘 앙헬 코토>가 퀸타나에게 6R만에 기권을 받아내고 차지해 2관왕에 올랐다.
Jr.웰터급 시절부터 탁월한 테크닉과 불도저같은 저돌성, 그리고 레프트훅을 주포로 하는 화끈한 경기력으로 대물임을 입증했던 코토는 2차방어전에서 능구렁이같은 전 챔피언 주다를 11RTKO로 꺽어 스타복서 대열에 합류했고 웰터급으로 돌아온 쉐인 모슬리까지 굴복시켜 호야의 뒤를 이을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링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로부터 리니얼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던 <WBC> 챔피언 발도미르는 첫 방어전에서 3관왕의 꿈을 꾸었던 아투로 가티를 무참한 KO로 꺽어 기세를 올렸지만 넉달 뒤 한쪽 팔로 싸운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의 아웃복싱에 무모한 돌진으로 패배를 자초해 큰 돈을 쥐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웰터급에서 IBF에 이어 WBC까지 석권한 메이웨더는 마침내 2007년 5월 전세계가 기다려 왔던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 호야와 격돌해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펀치로 2-1의 판정승을 거두고 사상 처음 무패의 전적으로 5체급을 석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전과 똑같이 빠르고 정확한 펀치를 구사했던 메이웨더는 이 체급에서 공수의 안정감까지 더해졌지만 특유의 숄더롤을 앞세운 방어형 아웃복싱과 페이크가 가미된 카운터 전법으로 일관해 복싱팬들의 원성을 듣기 시작했다.
매 경기 타고난 재능과 엄청난 하드워크, 치밀한 작전을 통해 탄생하는 메이웨더의 고급스러운(?) 아웃복싱은 계속 체급을 올리는데 따른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순수주의 복싱팬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복싱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으나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반납하고 돌아와 영국의 자존심 해튼과 벌인 무패의 라이벌전에서 예전의 한박자 빠른 공격적인 아웃복싱으로 10R TKO승을 거두어 클래스의 차이를 실감케해주며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링지로부터 2007년 최고의 복서에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이듬해 더 이상 싸워야 할 욕망을 느끼지 못하겠다며 전격 은퇴를 선언해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지만 몸값을 올리기 위한 꼼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메이웨더가 미련없이 집어던진 <IBF> 챔피언 벨트는 푸에르토리코의 <커미트 신트론>이 마크 수아레스를 KO시키고 허리에 감았다.
한때 무시무시한 펀치력 때문에 유망주로 부각되었던 신트론은 중요한 시합에서 뼈아픈 KO패를 당해 거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적도 있었지만 아르헨티나의 KO왕 월터 마티세를 2RKO로 일축하고 첫 방어에 성공해 일단 명예 회복에 성공했으나 세 번째 방어전에서 3년만에 재회한 <안토니오 마가리토>에게 또 다시 레프트보디샷을 맞고 가라앉아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기구를 갈아타며 9개월만에 왕좌에 복귀한 마가리토는 메이웨더의 은퇴로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이 체급의 패권을 놓고 <WBA> 챔피언 코토와 진검승부를 펼쳐 괴력의 맷집을 앞세운 끊임없는 압박으로 11R에 극적인 역전 KO승을 일궈내며 웰터급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 와중에 <IBF>는 마가리토가 지명방어전 이행 지시를 무시하고 코토와 대결했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타이틀을 박탈해 통합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가리토의 자리에는 가나의 흑표범 <조슈아 클로티>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권토중래를 외치던 주다의 오른쪽 눈자위를 크게 자르고 들어 앉았다.
공격과 수비에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깐깐한 기량의 소유자로서 빠르고 다양한 컴비블로우에 빈틈이 없는 철벽가드는 동국의 선배 아이크 쿼테이 못지 않았지만 펀치력 자체는 의문부호가 들었고 수비형의 복싱스타일은 자신의 장점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클로티는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자 한차례의 방어전도 없이 타이틀을 반납해 왕좌는 또 다시 공석으로 남았다.
IBF의 타이틀 박탈에도 불구하고 <WBA>는 <안토니오 마가리토>를 사실상의 통합챔피언으로 인정해 슈퍼챔피언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잠정챔피언인 우크라이나의 <유리 누즈넨코>를 정규챔피언으로 승격시켰다.
누즈넨코는 펀치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접근전을 선호하는 인파이터로 끊임없는 압박을 통해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나 <비야체슬라프 센첸코>와 갖은 우크라이나 최초의 동국인 간 세계타이틀전에서 상대의 효과적인 아웃복싱에 막혀 첫 방어에 실패하며 6개월만에 야인이 되었다.
비교적 큰 키에 안정적인 공수를 갖추었던 센첸코는 특히, 레프트잽과 라이트스트레이트의 연결이 부드러웠지만 유연하지 못한 허리는 아웃복서로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 사이 한껏 주가가 오른 마가리토는 생애 최고의 대전료를 챙기며 <쉐인 모슬리>를 상대로 첫 방어전에 나섰는데 한물간 줄 알았던 모슬리의 스피드와 강타 앞에 패퇴해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경기 전 부정 밴디지 파문까지 일어나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메이웨더의 은퇴로 비어있던 <WBC>에는 무패의 <안드레 베르토>가 미구엘 앙헬 로드리게스를 7RTKO로 꺽고 왕좌에 올랐다.
아이티 태생으로 흑인 특유의 탄력있는 움직임과 타고난 순발력에도 불구하고 엉거주춤한 자세에 가드가 허술해보였지만 빈 곳을 찌르는 빠르고 강력한 펀치는 차세대 에이스로 촉망받기에 충분했지만 너무나 정직한 복싱을 구사한 탓인지 스티브 포브스 전에 이어 루이스 콜라조와의 2차방어전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자 회의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BO의 후원으로 WBA 슈퍼챔피언 모슬리와의 통합타이틀전이 성사됐으나 2010년 1월 조국 아이티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가족들 걱정에 다 차려놓은 밥상을 걷어차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후 전 WBO 챔피언 퀸타나를 상대로 잠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주로 네임밸류가 부족한 B급들을 상대하며 흥행력마저 곤두박질 치더니 Jr.웰터급에서 올라온 <빅토르 오르티즈>를 맞이해 2차례나 다운을 주고받는 처절한 승부를 펼친 끝에 석패해 6차방어에 실패했다.
<WBO> 왕좌에 복귀한 윌리엄스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메인 스트림 진입이 여의치 않은데다가 마가리토마저 재대결을 거부하자 체중문제를 고려해 미들급으로 월장하며 타이틀을 반납했고 후임에는 <미구엘 앙헬 코토>가 무명의 마이클 제닝스를 가볍게 제압해 7개월만에 다시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으나 첫 방어전에서 전 IBF 챔피언 조슈아 클로티의 강력한 압박에 아웃복싱으로 간신히 타이틀을 방어해 아직도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어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웰터급까지 치고 올라온 필리핀의 <매니 파퀴아오>의 표적이 되어 매라운드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 맞으며 또 다시 비참한 패배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미 1년 전 호야를 상대로 괴물성을 입증하며 P4P 넘버원에 올랐던 파퀴아오는 링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로부터 2008년에 이어 2009년에도 최고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웰터급에서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핸드스피드를 과시하며 초자연적인 빠르고 현란한 스텝과 함께 도무지 각도를 예측할 수 없는 폭발적인 펀치로 프로복싱의 흥행을 이끌어 갈 대형 슈퍼스타로 각광받으며 전세계 복싱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첫 방어전에서 코토를 괴롭혔던 클로티를 여유있게 제압한 뒤 자격정지에서 풀려난 마가리토를 상대로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놓고 격돌해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며 호야에 이어 두 번째로 6체급을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IBF>의 비어 있던 왕좌는 마이너기구를 전전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이작 흘라츠와요>가 델빈 로드리게스를 꺽고 차지했다.
솜방망이같은 펀치력에도 근접전을 선호했던 흘라츠와요는 이 체급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으로 정상에 오른 케이스로 무명의 <얀 자벡>에게 불과 3R만에 레퍼리 스톱을 당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슬로베니아 최초의 세계챔피언 자벡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과감한 공격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름도 알 수 없는 손쉬운 상대를 골라가며 고국에서 방어행진을 펼쳤으나 재기를 노리던 전 WBC 챔피언 <안드레 베르토>에게 걸려 들어 심각한 눈부상 속에 경기를 포기해 4차방어에 실패했다.
한편, <WBA> 슈퍼챔피언 모슬리는 베르토와의 통합타이틀전이 무산되면서 1년 넘게 링에 오르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으나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를 제압하며 링복귀를 선언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빅매치에 나서 2년 가까운 공백을 무색케하는 메이웨더의 날카로운 카운터펀치와 효과적인 디펜스에 허무하게 판정패를 당해 그의 복싱인생도 어느덧 종착역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경기는 메이웨더가 WBA에 승인료 지불을 거절하는 바람에 논타이틀전으로 벌어져 모슬리의 챔피언쉽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20여일 뒤 WBA가 돌연 타이틀을 박탈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겉으로는 정규챔피언 센첸코와의 지명방어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메이웨더 전에 대한 화풀이 성격이 강해 뒤끝이 작렬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로써 WBA의 유일한 챔피언으로 남게 된 센첸코는 홈링에서 2류들을 상대로 무패가도 속에 휘파람을 불었지만 4차방어전에서 전 IBF Jr.웰터급 챔피언 <폴 말리그나지>의 빠르고 예리한 잽과 스트레이트에 왼쪽 눈이 퉁퉁 부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호야의 월장 이후 잠시 외면을 받았던 이 체급은 물고 물리는 혼전 양상을 거쳐 2000년대 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다관왕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의 상륙으로 또 다시 전세계 복싱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제 양강의 대결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으나 이들의 대결은 공수표만 남발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좀처럼 실현되지 않아 복싱팬들의 애간장만 태웠다.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2010년 필리핀의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까지 진출한 6관왕의 <WBO> 챔피언 <매니 파퀴아오>는 당대에 P4P 최강으로 군림했는데 거추장스러운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 벨트를 풀어버린 후 총기가 사라진 쉐인 모슬리에게 한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넉넉한 판정승을 거두어 프로복싱의 지존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링 밖에서는 메이웨더 진영이 파퀴아오의 약물복용설을 제기해 법정다툼으로 비화됐고 메이웨더 자신도 혈액검사를 통한 도핑테스트를 거부하는 파퀴아오를 비난하며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여 이들 양강의 대결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이로 인해 파퀴아오는 차선책으로 오랜 숙적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와 세 번째 대결에 나섰는데 선수비 후역습으로 나온 마르케스에게 의외로 고전해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12년 6월 <티모시 브래들리>와의 4차방어전에서는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2-1의 석연치 않은 판정패를 당해 사실상 왕좌를 강탈당했다.
경기 후 WBO는 이례적으로 재심단까지 구성해 파퀴아오의 승리를 확인해주었지만 결과를 번복하지는 않았다.
실의에 빠진 파퀴아오는 3차전에서 판정 논란이 있었던 마르케스를 상대로 반년만에 재기에 나섰지만 6R 강력한 라이트카운터펀치를 맞고 실신하는 충격적인 장면과 함께 그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음을 실감케 해주었다.
사상 최악의 판정으로 2관왕에 이름을 올린 브래들리는 여전히 변화무쌍한 움직임과 한박자 빠른 컴비블로우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펀치력 부재와 수비 위주의 경기스타일로 인해 이 체급을 대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예회복이 절실했던 첫 방어전에서 루슬란 프로보드니코프의 거친 공격에 최종회 다운까지 내주며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파퀴아오를 KO시킨 마르케스에게도 간신히 승리해 체면을 구겼다.
결국, 거의 2년만에 재회한 <매니 파퀴아오>의 빠른 스피드와 노련한 경기운영 앞에 1차전의 판정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멕시코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던 <WBC> 챔피언 <빅토르 오르티즈>는 사우스포임에도 불구하고 사나운 공격력과 폭발적인 연타로 언제나 화끈한 경기를 펼쳐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선한 청량감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과도하게 공격에만 치중한 탓에 자주 다운을 허용했던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 되었고 사소한 자극에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
첫 방어전에서 1년반 만에 컴백을 선언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의 복귀전 상대로 낙점되어 4R 찬스를 잡고도 흥분한 나머지 고의적인 버팅으로 감점을 받더니 지나친 사과 제스처를 취하다가 무방비 상태로 좌우훅을 맞고 침몰하는 어이없는 해프닝에 희생되었다.
경기당 천만 달러 이상의 대전료를 챙겨 흥행의 보증수표로 떠오른 메이웨더는 링네임마저 '머니'(Money)로 바꾸며 3관왕의 WBA 슈퍼웰터급 챔피언 미구엘 앙헬 코토를 판정으로 누르고 역대 최고의 대전료 기록을 경신해 마침내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인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처럼 전 여자친구에 대한 폭행죄로 실형이 선고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 충격을 주었다.
두달만에 출소한 뒤 1년여의 공백을 깨고 로버트 게레로를 가볍게 제압해 웰터급 타이틀을 방어한 데 이어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인 무패의 사울 알바레스를 누르고 양대기구 통합챔피언에 오르며 또 한번 대전료 기록을 갈아치워 프로복싱의 흥행을 주도하는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입증했다.
이후 메이웨더는 SNS에 고급 승용차나 장식품, 현금 등의 사진을 올리며 노골적인 돈자랑에 나섰고 스스로를 ‘TBE’(The Best Ever)로까지 칭하며 밉상(?)을 자처했지만 경기를 앞두고 상대를 도발하는 트래쉬 토크로 언론의 관심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가벼운 몸놀림의 전형적인 아웃복서였던 <WBA> 챔피언 <폴 말리그나지>는 첫 방어전부터 훌리오 세자르 카노에게 다운을 당하며 불안한 모습을 드러내더니 두 체급을 월장한 <애드리언 브로너>의 습격을 받아 근소한 차의 패배로 왕좌를 물려 주었다.
프로 데뷔 5년만에 24살의 나이로 무풍지대 속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브로너는 메이웨더를 잇는 차세대 슈퍼스타 후보로 떠오르며 복싱팬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유연하고 탄력있는 움직임에 빠른 스피드와 탁월한 수비는 물론 화려하면서도 폭발적인 연타까지 갖추어 제2의 메이웨더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아르헨티나의 강타자 <마르코스 마이다나>와의 첫 방어전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날아드는 상대의 주먹에 한계를 드러내며 두차례의 다운을 당하는 예상밖의 패배를 당해 그저 메이웨더의 짝퉁이었음을 고백하고 말았다.
이후 체급 차이를 절감한 브로너는 아랫체급으로 내려가 4체급을 석권했지만 훈련 부족과 기행을 일삼으며 중요한 경기에서 잇달아 패배해 평범한 복서로 전락해가고 있다.
링지는 물론 다수의 미디어로부터 2013년 최고의 이변에 선정되며 Jr.웰터급에 이어 2번째 왕관을 머리에 얹은 마이다나는 그동안 스피드 때문에 아웃복서에게 약하다는 수군거림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종일관 강력한 프레스와 함께 도끼로 내려치는 듯한 좌우훅으로 브로너를 압살한 덕분에 몸값이 고공행진을 하며 점차 빅네임들의 추파를 받기 시작했다.
한때 약물 복용설에 휩싸이기도 했던 <IBF> 챔피언 <안드레 베르토>는 게레로와의 WBC 잠정챔피언 결정전이 확정되자 타이틀을 반납했고 넘버원에 랭크됐던 <랜달 베일리>가 무패의 유망주 마이크 존스를 11R에 기가막힌 라이트어퍼컷으로 KO시켜 왕좌에 올랐다.
무려 12년만에 왕좌에 복귀하며 2관왕을 달성한 37살의 노장 베일리는 아직도 원펀치 파워만큼은 살아있었지만 경험에 의존하는 복싱으로는 더 이상 젊은 상대의 빠른 움직임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첫 방어전에서 <데본 알렉산더>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3년 후 AK프로모션과 계약을 체결해 우리나라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겨우 한 경기만 치루고 자유계약신분으로 떠나버려 국내팬들은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웰터급에 월장해서도 날카로운 카운터펀치를 앞세워 루카스 마티세와 마이다나를 연파해 하드펀처를 요리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알렉산더는 특유의 까다로운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2013년 무서운 기세로 치솟던 신예 <숀 포터>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며 첫 방어에 실패해 2관왕에 만족하며 세대교체를 받아들였다.
베이징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후 프로에 입문한 포터는 단신의 인파이터로 강타자는 아니었지만 마이크 타이슨을 떠올릴 만큼 엄청난 체력과 뛰어난 순발력을 소유해 기대를 모았다.
폭풍같이 퍼붓는 좌우연타가 인상적이었고 용수철이 튕기는듯한 레프트훅은 이미 아마추어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재임을 노리는 말리그나지를 초반부터 무자비하게 몰아붙여 4R에 넉아웃시켰으나 2차방어전에서 영국의 복병 <켈 브룩>을 만나서는 무리한 공격으로 헛스윙만 남발한 채 판정으로 패해 적쟎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2014년 <WBO> 왕좌에 복귀한 파퀴아오는 이전과 다름없는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마르케스에게 일격을 당했던 악몽 탓에 치고 빠지는 복싱을 구사하며 무리한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크리스 알지에리같은 약골에게는 무려 6차례나 다운을 안겨줄 정도로 아직은 썩어도 준치였다.
같은 해 라이벌이었던 <WBC> 챔피언 메이웨더는 자신의 상품가치를 더욱 더 높여줄 <WBA> 챔피언 마이다나와 통합타이틀전에 나서 일반의 예상과 달리 마이다나의 터프하고 집요한 압박에 어렵게 승리해 쇠퇴의 기미를 드러내는 듯 했다.
하지만 넉달 후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까지 건 리매치에서는 상대의 공격패턴을 읽어내며 노회한 공수로 압승을 거두어 복싱 도사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
그 사이 <WBA>는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를 슈퍼챔피언으로 올리고 잠정챔피언으로 있던 미국의 <키스 서먼>을 정규챔피언으로 승격시키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맞이한 2015년 새해 벽두 우연히 프로농구 코트에서 마주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가 전격적으로 대결에 합의해 드디어 전세계 복싱팬들이 학수고대했던 꿈의 대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늦은 대결이었지만 역대 최고의 ‘창과 방패 간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던 이들의 경기는 3억7천만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대전료와 엄청난 흥행수입 때문에 세기의 대결로 일컬어지며 경기 전부터 복싱팬들은 물론 지구촌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경기내용은 글자 그대로 쫓고 쫓기는 범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메이웨더가 승리해 수많은 팬들이 실망을 넘어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으며 일반대중들로부터 프로복싱에 대한 회의감만 안겨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결은 그동안의 흥행기록을 모두 뛰어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급의 위력을 과시했는데 PPV 판매 440만개 및 판매수익 4억달러, 입장수입 7,100만달러, 여기에 스폰서 수입과 해외중계권료 등 총 수익이 5억달러 이상으로 집계돼 프로복싱 역사상 흥행측면에서 신기록을 남겼다.
최후의 적수였던 파퀴아오까지 누르고 <WBA> <WBC> <WBO> 통합챔피언에 오른 38살의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는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했다.
고별전 상대 베르토와의 통산 5차방어전을 여유있게 마무리해 1950년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던 록키 마르시아노의 49연승 기록과 동률을 이루며 무패로 은퇴해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누구보다도 찬사와 비난이 공존했던 메이웨더였지만 천재적인 복싱 실력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계속된 월장으로 줄어든 파워때문에 수비 위주의 복싱을 구사하면서도 초인적인 반응속도와 상대를 농락하는 유연하고 민첩한 몸놀림, 여기에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아 순간적으로 빈틈을 공략하는 능력은 복싱머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완벽했다. 특히, 극강의 숄더롤을 기반으로 한 디펜스 능력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상 최초로 무패로 5체급을 석권하면서 호야, 모슬리, 코토, 알바레스, 파퀴아오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쟁쟁한 톱복서들을 모조리 꺽고 불패신화 속에 은퇴해 21세기 지구 최강을 자임했다.
비록 잦은 구설수와 비호감적인 언행, 지루하고 재미없는 복싱(?)으로 인해 안티가 가장 많은 복서이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이슈 메이킹과 SNS를 이용한 셀프 마케팅을 통해 악동의 이미지를 마다하지 않고 복싱팬과 언론으로부터 끊임없이 화제를 몰고 다녔고 매번 흥행기록을 스스로 경신해 프로복싱의 상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은퇴 후 2년만인 지난 2017년 8월 종합격투기 UFC의 슈퍼스타 코너 맥그리거를 상대로 또 한번 세기의 돈잔치를 벌이며 10RTKO승을 이끌어내 여전히 죽지않은 인기와 실력을 과시했다.
메이웨더와 공존하다가 <WBA>의 유일한 챔피언으로 남게 된 서먼은 레게 머리를 묶은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는데 베이징올림픽이 좌절되자 프로에 데뷔해 활발한 움직임을 통한 안정된 공수와 무서운 파괴력으로 KO가도를 질주했다.
첫 방어전에서 게레로를 그로기에 빠뜨리며 압승을 거두었고 난적으로 평가됐던 포터를 상대해 인-아웃복싱의 조화가 빛을 발하며 최고의 스릴러를 연출해 복싱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서먼을 슈퍼챔피언으로 격상시킨 <WBA>는 잠정챔피언인 러시아의 <다비드 아바네시안>을 새로운 정규챔피언으로 인정했는데 노욕을 부린 45살의 모슬리를 누르고 잠시 이름을 알렸던 그는 별볼일없는 펀치력에도 불구하고 양훅을 앞세운 과감한 공격이 인상적이었지만 <라몬트 피터슨>의 노련한 공수를 극복하지 못해 6개월만에 과분한 자리에서 물러났다.
2관왕에 오른 피터슨은 1년 가까이 방어전에 나서지 못하다가 IBF 챔피언 스펜스와의 대결이 확정되자 타이틀을 반납했다.
이어 세계챔피언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아르헨티나의 <루카스 마티세>가 태국의 테와 키람을 물리치고 뒤늦게 왕좌에 올라 중량급 거포로서 매니 파퀴아오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
<WBC>쪽은 호시탐탐 웰터급 월장을 노리고 있던 <대니 가르시아>가 기회를 잡아 게레로를 날카로운 카운터펀치로 제압하고 무난하게 2체급을 석권해 자연스럽게 <키스 서먼>과의 통합전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서로 포스트 메이웨더를 장담한 가운데 가르시아가 서먼의 약점인 보디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나왔으나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서먼이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으로 양대기구를 통일시키며 통산 4차방어를 달성했다.
챔피언에 오르기 전부터 이 체급의 새로운 기수로 주목받았던 <IBF> 챔피언 브룩은 기본적으로 테크닉과 스피드가 좋고 깨끗하고 깔끔한 복싱을 구사했는데 타점높은 고감도의 스트레이트와 예리한 어퍼컷은 불을 뿜는 화력을 자랑했다.
홈링에서 세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KO로 장식한 뒤 2016년 대뜸 미들급 3대기구 통합챔피언으로서 16연속 KO방어를 기록 중인 게나디 골로프킨에게 도전장을 던져 전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체급 차이를 실감하며 5R만에 물러나 용감한 전사로 기억되는데 만족해야 했다.
골로프킨 전의 심각한 후유증으로 타이틀 반납을 권유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명방어전에 나서 미국의 신성 <에롤 스펜스 주니어>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타이틀을 내주었다.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의 스펜스는 젊은 패기와 체력이 돋보이는 사우스포로서 화려한 스텝과 함께 안정적인 스탠스를 바탕으로 사냥감을 몰 듯이 집요하게 압박한 뒤 속사포같은 연타로 상대를 가라앉히는 테크니션이다.
이 체급의 명장 슈거 레이 레너드의 일단마저 엿보이는 차세대 웰터급의 스타 후보로 첫 방어전에서 2관왕의 라몬트 피터슨을 가볍게 제압하며 목하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진군 중이다.
한편, 베르토 전에 앞서 메이웨더의 타이틀을 박탈한 <WBO>는 잠정챔피언에 올라 있던 <티모시 브래들리>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잠정챔피언 결정전에서 제시 바르가스에게 최종회 레퍼리의 실수로 죽다 살아난 브래들리는 브랜든 리오스를 상대로 이전보다 빠르고 과감한 공격을 선보이며 모처럼 시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6년 필리핀 상원의원 출마와 함께 은퇴를 선언한 파퀴아오와의 러버매치가 확정되면서 지명방어전을 이행할 수 없게 되자 타이틀을 반납한 뒤 파퀴아오의 화려한 피날레의 희생양이 되었다.
공석이 된 왕좌에는 재도전의 기회를 잡은 <제시 바르가스>가 그림같은 라이트훅으로 사담 알리를 잠재우고 차지해 2관왕을 달성했다.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공격이 눈에 띄었던 바르가스는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컴백을 선언한 <매니 파퀴아오>의 제물이 되어 8개월만에 무관이 되었다.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왕좌에 복귀해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운 파퀴아오는 메이웨더가 떠난 프로복싱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호주에서 열린 첫 방어전에서 홈어드밴티지를 이용한 <제프 혼>의 더러운 플레이에 유혈극을 펼친 끝에 예상밖의 판정패를 당해 복싱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테크닉은 떨어지나 다부진 체격에 지칠줄 모르는 체력을 보유한 혼은 파퀴아오 전에 보여주었듯이 거칠고 강력한 압박이 장기였다.
머리부터 들이대거나 상대를 잡고 때리는 더티 파이터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가운데 Jr.웰터급 4대기구 통합챔피언 출신인 테렌스 크로포드와의 2차방어전이 최대의 고비가 될 전망이다.
2010년대 프로복싱 최고의 흥행을 주도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화려한 역사를 써내려간 이 체급은 비록 양강이 기대와 달리 세기의 졸전을 펼쳐 대중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인기체급의 명성을 잇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이목을 사로잡았다.
어느덧 올해로 체급 신설 130주년을 맞이한 웰터급은 그 어느 시대에서나 다이나믹한 경기력과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하며 복싱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프로복싱 역사에 헤비급 못지 않은 슈퍼스타의 산실로 손꼽히며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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