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14일 한국무에타이협회는 대전의 한 뷔페에서 협회임원들이 모여 상견례를 갖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상견례 자리에서 최민규 회장은 무술이 스포츠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한국무에타이협회가 스포츠적인 무에타이가 아니라 무도정신에 입각한 진정한 무에타이의 위상을 세울수 있는 단체로 자리 메김 할 수 있도록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한국무에타이협회 회원들이 임원진과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단결하여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무술단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자고 강조하였다.
최민규(한국무에타이협회) 회장이 전하는 "무에타이" 기원과 역사
"약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무에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태국이 불교국가인 점을 들어 인도나 중국의 무술이 무에타이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무에타이의 기원은 타이의 오래된 군사무술 지도서인 유타사트(yuttasart)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여기서 창, 칼이나 도끼등 무기를 이용한 전투기술과 그것의 응용으로 사람의 신체를 무기화 하는 전투기술이 무에타이로 생성되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무에타이 기술이 전해내려온 것이 아니기에 근대에 들어 많은 시합을 통해서 새로운 기술이 많들어지고 외래 기술이 편입되기도 하는등 오로지 시합에서 이기기 위한 무에타이가 아직도 갈고 닦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오랜 만큼 무에타에는 전설도 많다.
"태국 역사에는 왕자들을 대표하는 투사들이 싸워 이긴 쪽의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14세기의 왕위계승권에 관한 전설을 포함해 국가적 중요성에 관한 논쟁을 가라 앉히는 무에타이를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대이전 무에타이의 결정은 18세기 초반 지방 경기대회에서 비밀스럽게 마스크를 쓰고 싸웠다고 전해지는 타이거왕의 통치동안이었다고 태국인들은 믿는다. 초기의 기록들중의 하나이고 가장 유명한 전설은 18세기 사람인 나이 카놈 톰(Nai khanom tom)에 관한 일화이다."
나이 카놈 톰은 태국 최대의영웅으로 해마다 3월 17일이면 모든 경기장에서그를 기리는 행사가 벌어진다고 한다.
"1767년 미얀마가 타이를 침략 당시 수도였던 아유타야(Ayutthaya)를 불태우고 포로를 붙잡아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 포로 중에 나이 카놈 톰이 있었다. 1774년 미얀마의 왕이었던 망그라는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파고다에서 일 주일 간 공양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이 행사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혀 있던 타이 복싱 선수들과 미얀마 선수의 시합을 마련했다. 이 시합에서 나이 카놈 톰은 10명의 미얀마 선수들과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이에 감탄한 망그라는 그에게 자유를 주었고 무사히 타이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은 그 사년후에 2명의 프랑스 복싱선수들이 타이를 방문하여 지역 타이복싱 선수들에게 도전하였지만 Meun Phlaan에 의해 두 명 모두 패했다고 한다.
"현대 이전 무에타이는 정치적 제도의 드라마였으며 현재는 상업적인 공연이 됐다. 태국에서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삶의 중심인 통치자의 지위는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러한 구경거리들은 축제에서 치러지는 얽은 사람 대 멀쩡한 사람, 짐승과 짐승 그리고 심지어 사람과 짐승이 겨루는 시합 등이다."
"Theravade 불교도들의 본토인 남동아시아의 통치자들은 이 유혈 구경꺼리의 형식을 레슬링과 무에타이로 바꾸어 놓았다. 통치자들의 힘은 경기를 주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사가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시위됐다. 20세기 전까지 무에타이는 중요한 변화들을 겪지 않았다. 1893년까지 복서들은 사찰안의 그라운드에서 훈련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승려들도 적지 않았다."
chulalongkom(rama4)왕은 1902년에 교리의 강조와 범어 경전에 의한 불교의 순화로 sangha의 개혁을 실시하고 복싱이 사찰 운동장에서 행해지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간주하였다.
복싱은 사찰에서 행해지지 않게 되고 현대들어 정부의 관리하에 국가적 스포츠가 되었다.
"링과 라운드의 채택 그리고 심판들의 기용은 서양 복싱 전통에 따라 제정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전에 자주 유리나 모래에 살짝 담가 사용하였던 주먹붕대 대신에 복싱 글러브를 사용하게 됐고 안전을 위해 단지 글러브와 급소 보호대를 걸친 채 이러한 방식으로 시합이 이어졌다. 무에타이 시합의 기원은 상업적인 공연의 실행으로 설정되었다."
복서들에게 태국에서 복싱(무에타이)은 계속적으로 내기와 같은 뜻의 말이었고 지방 토너먼트들은 단지 내기를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겨루기일 때만 성공적이었다.
"복서들은 모두 이러한 시합들로부터 수입을 획득하고 만약 그들이 계속 이기다면 계속적으로 싸울 수가 없었다. 현대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 무에타이 라자담논 챔피언 이었던 디노이는 너무 강해서 내기가 불가능해 은퇴가 강요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복서들은 아홉 살부터 열두 살에 이르는 어린 나이에 복서 생활을 시작하지만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인 이십대 중반경에 주로 은퇴하며 몇몇 복서들은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지속적으로 관여 한다."
"시합하기전 복서들은 wai khruu의식에 참가하여 트레이너에게 가르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절하고 경기를 도와주고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기원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고 상대방을 위협하며 악마를 몰아내는 ram muay준비 체조를 한다. 와이 크루는 이러한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의식의 특별한 내용과 ram muay섀도우 복싱의 구성은 트레이닝 하는 체육관 마다 다르다."
"나이카놈톰(Nai Khanom Tom)의 전설 때문인지 타이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Muay Thai가 세계 최고라고 믿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가라테나 쿵후 등 다른 무술이나 격투기 챔피언들을 초청해 Muay Thai 선수들과 시합을 하게 한다."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Muay Thai선수들은 외국의 챔피언들을 어김없이 때려 눕혔다.
몇 년 전에는 다섯명의 가장 강한 홍콩 쿵후 선수들이 Muay Thai 선수들과 시합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모두 1회전에 K.O 당하고 말았다.
1977년 3월 12일, 미국에서 가라데와 경기를 가질 때, 무에타이 선수는무릎과 팔꿈치 등을 쓰지 못하게 되어 불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쉽게 이겼다.
1977년 9월 6일 화요일, 방콕의 룸피니(Lumpinni) 복싱 경기장에서 2명의 무에타이 선수가 가라데 선수들을 상대로 싸웠는데, 가라데 선수들이완전히 전멸했었다.
일요일 오후에는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텔레비젼으로 무에타이 경기를 시청한다.
몇년 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STAR TV에서매주 두번씩(1회는 재방송) 태국의 시합을 중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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