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멧세니아 전쟁의 발발(BC 685)
뤼쿠르고스가 라케다이몬에 귀환할 무렵, 라케다이몬인들은 한창 '2차 멧세니아 전쟁(The Second Messenian War)'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1차 멧세니아 전쟁의 결과로 멧세니아가 멸망하고 라케다이몬의 헤일로타이로 전락한 많은 멧세니아인들은 아리스토메네스(Aristomenes)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스토메네스와 멧세니아인들은 라케다이몬의 세력 확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르고스, 엘리스, 아르카디아 등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멧세니아가 멸망한 지 40여 년이 되던 BC 685년, 아르고스의 지원을 받은 멧세니아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2차 멧세니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멧세니아 반군과 라케다이몬군은 라코니케 평야의 데레스라는 도시에서 치열하게 맞부딪혔습니다.
처음에는 멧세니아 반군이 밀리는가 싶더니, 엘리스와 아르카디아 지원군이 합세하면서 혼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고, 마침내 무승부로 끝이 났습니다.
첫 대규모 전투가 무승부로 끝났다고는 해도, 피해는 멧세니아보다 라케다이몬 측이 더 컸습니다.
이 당시 라케다이몬의 주력은 중장보병이 아닌 경장보병이었습니다.
반면, 라케다이몬과 인접해 있으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을 두고 훗날 라케다이몬과 앙숙 관계가 되는 아르고스의 별동부대와 일찌기 아카이오이족 중장보병 기술을 받아들인 아르카디아의 주력군이 멧세니아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라케다이몬의 군세(軍勢)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여러 크고 작은 전투에서 라케다이몬군에 대해 연승 가도를 달리던 멧세니아 반군.
아리스토메네스는 라케다이몬의 수도 스파르테까지 진격하고, 혈전 끝에 라케다이몬군은 간신히 수도를 방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라케다이몬군은 멧세니아 반군을 지원하던 아르카디아의 왕 아리스토크라테스 2세를 매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수작전은 성공하여, 그레이트포스 전투에서 아르카디아군이 갑자기 후퇴하면서 멧세니아 반군은 무참히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레이트포스 전투에서 많은 지휘관과 병사를 잃은 멧세니아 반군은 에이라 산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아리스토메네스는 산 속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습니다.
멧세니아 반군은 10년이나 에이라 산에서 라케다이몬군과 대치하지만, BC 668년, 결국 멧세니아 반군은 괴멸되었고, 일부 살아남은 멧세니아 반군들은 아르카디아로 도주했습니다.
이렇게하여 2차 멧세니아 전쟁도 라케다이몬의 승리로 끝을 맺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멧세니아인들은 다시 라케다이몬의 노예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시켈리아(오늘날의 시칠리아)로 탈출하여 훗날 멧시나라는 폴리스를 건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멧세니아의 영웅 아리스토메네스는 로도스로 가서 영웅으로 추앙받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2차 멧세니아 전쟁을 겪으면서 라케다이몬인들은 수도인 스파르테까지 탈탈 털리기 일보직전까지 간 끝에서야 현실적인 문제를 바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안그래도 안으로 극심한 빈부갈등과 사치 및 부정부패 등의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 밖으로 멧세니아 반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라케다이몬인들은 대대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외로 나가있던 뤼쿠르고스를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뤼쿠르고스의 개혁
<정치 체제 개혁>
뤼쿠르고스는 우선 정치 체제 개혁부터 단행했습니다.
그는 '게루시아(Gerousia)'라고 불렀던 '원로회'와 '아펠라(Apella)'라는 '민회', 그리고 '에포로이(Ephoroi)'라는 '집정관'을 신설했습니다.
개혁 이전의 라케다이몬은 두 명의 왕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구조였습니다.
헤라클레스의 자손인 '아기아다이(Agiadai)' 가문과 '에우뤼폰티다이(Eurypontidai)' 가문에서 각기 한 명씩 왕을 정했는데, 이들은 동등한 자격을 가짐과 동시에, 서로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가졌습니다.
두 명의 왕들은 종교와 사법, 군사적 권한과 의무를 가졌습니다.
왕들은 정치적인 통치자이면서 종교적으로 최고 제사장이었고 전쟁이 벌어지면 사령관직도 겸임했습니다.
이처럼 왕을 두 명으로 정했던 것은 서로 견제함으로써 어느 한 명의 왕이 지나친 권력을 갖고 독재를 하는 것을 막고,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침탈하는 참주정의 출현을 막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참주정을 끔찍이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폴리스가 참주정이 들어서면 여지없이 해당 국가의 내정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까지 했죠.
예컨대 앞서 소개한 아테나이의 참주정을 무너뜨리는데 라케다이몬군이 아테나이를 침공했던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왕들을 견제하고, 라케다이몬의 시민이자 귀족이었던 '스파르티아타이'의 참정권 요구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멧세니아 및 아르카디아 지역 일부의 영토를 복속하면서 불어난 토지를 스파르티아타이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하면서, 강력한 경제력을 소유한 이들이 참정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공공연하게 왕들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뤼쿠르고스는 왕권을 유지하면서 귀족인 스파르티아타이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방편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신설했습니다.
'원로원'은 민회에서 선출했는데, 후보자격은 60세 이상의 스파르티아타이로 28명으로 제한했습니다.
또한 두 왕 역시 원로원에서 의원의 역할도 겸하게 함으로써,
원로원 의원의 최종 수는 30명으로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들은 땅의 소유와 군 복무, 시민들의 공동식사에 지출되는 공동비용 등과 같은 각종 주요 행정 사항에 대한 법안을 발의하여 민회에 상정하는 일부터 각종 민사 및 형사 소송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민회'는 스파르티아타이와 비시민권자이나 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 중 30세 이상의 남성들로 이뤄졌습니다.
이들은 법안을 인준, 거부하는 일과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 등의 외교와 관련된 일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원로원 의원과 후술(後述)할 '집정관'을 선출하는 일도 했습니다.
원로원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항상 두 개의 법안을 제출해야 하는데, 민회는 이 두 법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반면, 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이 부당하게 통과되었다고 생각되면 원로원은 그 결정에 대해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감독관인 '집정관'을 뒀습니다.
이들은 매년 민회에서 그 구성원들 가운데 선출된 5명으로 구성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습니다.
이들은 법령의 집행, 군과 경찰 업무 및 비밀경찰 크립테이아의 운영과 같은 업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들의 업무상 권한은 원래 왕들의 것이었기에, 이들의 권력은 사실상 왕권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뤼쿠르고스는 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를 왕정(두명의 왕), 귀족정(원로원), 민주정(민회와 집정관)이 혼합된 형태로 개편하여, 귀족 중심의 명문가 권력을 약화시키고 시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는 한편, 개인이건 집단이건, 귀족이건 일반 시민이건 그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여 독재를 할 수 없도록 정치적으로 시스템화했습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뤼쿠르고스의 정치 개편에 의한 법을 철저하게 잘 지켰습니다.
이러한 라케다이몬의 혼합 정치 체제는 후대의 로마인들이 응용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정치 체제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경제 개혁>
정치 체제의 개혁 못지않게 뤼쿠르고스가 주안점을 두고 추진했던 것이 경제 개혁입니다.
당시 라케다이몬인들은 본인들의 폴리스가 있던 라코니케 지방은 물론, 이웃한 멧세니아와 아르카디아 중 정복을 통해 얻은 광범위한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얻은 토지는 대부분 소수의 귀족들의 차지가 되었고 이는 곧 극심한 경제적 빈부격차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뤼쿠르고스가 제일 먼저 추진한 경제 개혁이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그가 추진한 토지 개혁의 골자는 라케다이몬의 대중들이 균등하게 분배된 토지를 받고, 그 땅에서 헤일로타이를 통해 얻은 수확물의 절반을 받아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뤼쿠르고스는 일단 모든 귀족들의 토지와 노예를 몰수하여 귀족이나 평민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균등한 조건으로 토지를 재분배했습니다.
물론 토지의 균등 배분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크기를 제한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추진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라케다이몬인들이 최소한의 동등한 경제적 생산 수단을 소유함으로써 자립 가능한 자영농으로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 그는 화폐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토지 소유의 불균형에 따른 빈부격차 못지않게 사치 풍조 역시 당시 라케다이몬의 경제를 갈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치 풍조를 일소하기 위해 금화나 은화, 각종 귀금속을 몰수하고 대신 산(酸)에 담가둔 녹슨 쇠 화폐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녹슨 쇠 화폐는 단위 무게 당으로 가치를 환산해서 귀금속 화폐와 비교했을 때 훨씬 많은 수를 필요로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숨기거나 옮기거나 도둑질을 하기 매우 힘들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녹슨 쇠 화폐의 낮은 효용성 때문에 사용을 꺼려했고, 이로인하여 자연스럽게 화폐 유통과 관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화폐를 이용한 재산 은닉과 비리가 사라졌습니다.
<검소·절제·극기의 삶을 통한 평등사회 구현>
이외에도 뤼쿠르고스는 이른바 '라케다이몬식 생활양식'이라 일컫는 '검소(儉素)·절제(節制)·극기(克己)의 삶을 통한 평등사회 구현'을 핵심으로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전술한 토지의 균등 분배와 화폐 개혁 역시 이러한 라케다이몬식 생활양식의 기반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토지 뿐만 아니라 주택의 크기와 형태도 가구수에 따라 엄격히 제한하여 모든 라케다이몬인들이 동일한 주거 양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가구나 의복 등의 생필품의 수준도 제한하여 사치를 근절시켰습니다.
아울러 공동 식당을 구역 단위마다 설치하여 공동 식사를 하게 했습니다.
(공동 식사는 다른 폴리스들도 이미 하고 있던 정책이었는데, 라케다이몬이 비교적 늦게 출발한 것이나 그 어떤 폴리스들보다 엄격하고 검소했다고 합니다.)
재산 관리는 남성과 여성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성 여성 모두에게 비슷한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 라케다이몬은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이 실현되던 국가였습니다.
라케다이몬의 여성들은 참정권은 없었지만, 남성들처럼 군사훈련 및 체력단련을 꾸준히 해야 했으며, 남성이 전쟁에 나가면 여성들에 짐에 머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육아에 있어서도 신체적, 정신적 교육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뤼쿠르고스의 개혁은 검소와 절제, 극기의 삶을 통해 평등사회를 구현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평등한 사회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막강한 군국주의 체제를 완성하는데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라케다이몬인들의 삶이 엄격하기만 하고 비인간적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철저한 의무 못지 않게 일상생활에서의 권리도 충분히 누렸습니다.
뤼쿠르고스는 라케다이몬인들에게
"상업은 천하고 계산적이어서 탐욕과 사치를 부추긴다."
고 가르치며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라케다이몬인들은 재산이나 돈을 모으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시에는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 축제나 사냥, 체육 경기 등으로 일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한, 교육에 특히 열중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뤼쿠르고스와 알칸드로스
그러나 뤼쿠르고스의 개혁이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개혁 초기, 뤼쿠르고스는 많은 귀족들로부터 거센 저항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폭동이 일어났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뤼쿠르고스는 몸을 피하려 신전으로 향했습니다.
신전 앞에 막 다달았을 무렵, 갑자기 어떤 덩치가 우람한 청년 한 명이 뤼쿠르고스에게 달려들어 들고 있던 곤봉으로 뤼쿠르고스의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면 쓰러진 뤼쿠르고스. 그 자리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그를 급히 피신시키는 한편, 몇몇은 뤼쿠르고스를 공격한 젊은이를 뒤쫓아 불잡았습니다.
젊은이를 붙잡은 친구들은 그를 뤼쿠르고스가 피신해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치료를 받던 뤼쿠르고스는 그 젊은이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알칸드로스'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뤼쿠르고스는 그가 몹시 거칠고 난폭하지만 원래의 성정만은 순수하다고 판단하고는 그를 시종으로 삼았습니다.
그 날부터 뤼쿠르고스의 시종이 된 알칸드로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뤼쿠르고스의 인간됨에 감복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뤼쿠르고스의 죽음
뤼쿠르고스의 죽음은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지만 전승에 따르면 상당히 신비롭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뤼쿠르고스는 모든 개혁을 완료하자, 이 개혁의 내용이 얼마나 라케다이몬인들을 이롭게 할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델포이로 향했습니다.
그는 델포이로 떠나기 전, 라케다이몬인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법을 고치지 않겠노라고 서약을 했습니다.
델포이에서 신탁을 물어본 뤼쿠르고스는 자신이 만든 법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답을 얻고 만족한 채,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서약에 따라 라케다이몬인들이 법을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라케다이몬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때까지 300여 년간 뤼쿠르고스의 법을 한번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이후 라케다이몬은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 아래, 헬라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막강한 육군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성장하고 있는 아테나이를 견제하고 헬라스 세계의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라케다이몬은 BC 500년까지 무력을 동원하여 개별적으로 여러 폴리스들과 군사조약을 체결했는데(숙적인 아르고스는 제외), 이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입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체결되고 10년도 안되어 헬라스 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고, 라케다이몬은 아테나이와 일시적으로 협력하여 대제국과의 전쟁에 합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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