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일한 박사(본명 유일형, 1895~1971, 평안도) 독립운동가, 저술가, 기업가
미시간 대학교 B,Com,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M.A, 스텐포드 로스쿨 J.D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미시간 대학교 B,Com,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M.A, 스텐포드 로스쿨 J.D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독실한 개신교 장로.
재봉틀 장사 유기연과 김기복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9살이던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큰 돈이 들지라도 자식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서 일하기를 바라면서, 미국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서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심이겠거니 하면서 미 대륙 정 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9살이던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큰 돈이 들지라도 자식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서 일하기를 바라면서, 미국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서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심이겠거니 하면서 미 대륙 정 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른 아들들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유일환은 아버지가 환전해 준 달러 를 배에서 잃어버렸고, 인솔자이자 독립 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테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유일환은 아버지가 환전해 준 달러 를 배에서 잃어버렸고, 인솔자이자 독립 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테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서인이 되어서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도 했는데, 이때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 했을 때 일본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학교 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으로 불러서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漢)자를 떠올리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부친에게 편지로 승낙을 구했고, 쾌히 승낙한 한 것을 넘어서 동생들의 돌림자 까지 ‘한’으로 모두 바꿨다.
중학교 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으로 불러서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漢)자를 떠올리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부친에게 편지로 승낙을 구했고, 쾌히 승낙한 한 것을 넘어서 동생들의 돌림자 까지 ‘한’으로 모두 바꿨다.
1919년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했다가 1922년 사표를 내고 재미중국인을 상대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눈 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우에 트럭을 들이받아 고의로 교통사고를 냈다. 작전 성공이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 병들이 도로변에 쏟아져 깨졌고, 사건을 기자들이 보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할 수가 있었고,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를 설립했다.
바쁜 와중에도 1922년 미시건대학교, 1929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 병들이 도로변에 쏟아져 깨졌고, 사건을 기자들이 보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할 수가 있었고,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를 설립했다.
바쁜 와중에도 1922년 미시건대학교, 1929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1925년 중국계 미국인 여성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얻었다.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하며 모두 쓴 서재필이 찾아와서 함께 New il-han & Co.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부인 호미리에게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했다.
1926년 종로 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 라초이를 경영할 때, 녹두 구입 차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님과 동생 들을 만났다.
가족은 유일한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은 빈곤과 기아로 질병에 허덕이며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은 유일한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은 빈곤과 기아로 질병에 허덕이며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 유학 보낸 줄 아느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해라”
라며 꾸짖 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 약 등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팔다가 1933년 개발한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다.
중국인이었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이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치료비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한국 첫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설립자이며, 많은 사회 공헌과 재산의 사회 환원으로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유일한 박사는 우리들 가슴 속에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귀감 으로 남으셨다.
유 박사는 기업 경영 당시, 친인척들이 함께 있으면, 파벌이 형성되고 회사발전에 도움 되지 않으니, 친인척들을 모두 내보내고, 전문 경영인을 두어 경영하게 하였다.
유 박사는 기업 경영 당시, 친인척들이 함께 있으면, 파벌이 형성되고 회사발전에 도움 되지 않으니, 친인척들을 모두 내보내고, 전문 경영인을 두어 경영하게 하였다.
약장수 수준에서 후발주자로 나선 다른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하게 안 밝히고 ‘만병통치약’으로 얼버무려 도 유일한은 제품 설명을 정확하게 기재 하여 광고를 했다.
윤리경영으로 법인세도 꼬박꼬박 충실하게 납세를 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사업 조직망을 총 동원하여,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 부을 각오로 1942년 재미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본인도 직접 1945년 OSS의 냅코(NAPKO ) 작전 훈련에 참가했다.
강도 높은 군사 첩보 훈련에 참가한 그의 나이 50세였으나 미식축구 선수 때부터 단련된 신체로 OSS훈련 책임자로부터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군인으로 평가 받았으나 1945년 일본이 항복하여 작전 투입이 무산됐다.
1946년 7월,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제정비 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강도 높은 군사 첩보 훈련에 참가한 그의 나이 50세였으나 미식축구 선수 때부터 단련된 신체로 OSS훈련 책임자로부터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군인으로 평가 받았으나 1945년 일본이 항복하여 작전 투입이 무산됐다.
1946년 7월,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제정비 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승만 정권이 함께 정치를 하자고 해도 거절하여 눈 밖에 나서 세무조사를 했으나 걸릴게 없어서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강제 압수하여 써먹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하에 수 차례의 세무조사를 받았던 것은 고집스럽게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하에 수 차례의 세무조사를 받았던 것은 고집스럽게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무조사를 했던 분의 회고에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았던 유일한 대기업이 유한양행이었다”
면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다른 회사들 같으면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도 자진해서 납부한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던 국세청 직원들은 생산한 의약품들을 관계 당국에서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면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다른 회사들 같으면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도 자진해서 납부한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던 국세청 직원들은 생산한 의약품들을 관계 당국에서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그럼에도 오히려 원 재료를 제조 과정 에서의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정확히 맞추었고, 그 어떤 트집거리가 없어 그대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하여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 납세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고, 세무조사를 했던 공무원들은 특진하고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
형에게서 잘 배운 막내 동생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하여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 납세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고, 세무조사를 했던 공무원들은 특진하고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
형에게서 잘 배운 막내 동생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
1969년 노환으로 은퇴하고 한국 최초로 전문 경영인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고, 생전에 유한대학교를 설립하고, 연세대병원(세브란스)에 주식 12,000주를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는 조건부로 기부했다.
195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귀국하여 전 임원진들이 아들의 입사를 반대하던 유 박사를 미국 회사들의 예까지 들어가며 설득하여 결국 부사장으로 승낙하고도 이를 안좋게 여기다가 부자간의 신념이 충돌되고 회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들을 해고했다.
195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귀국하여 전 임원진들이 아들의 입사를 반대하던 유 박사를 미국 회사들의 예까지 들어가며 설득하여 결국 부사장으로 승낙하고도 이를 안좋게 여기다가 부자간의 신념이 충돌되고 회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들을 해고했다.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던 연만희와의 대화에서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될 거야”
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그대로 실천했다.
동생 유특한과 아들 유일선이 유 박사를 상대로 건 소송 내용이 황당하다.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그는 생전에 그대로 실천했다.
동생 유특한과 아들 유일선이 유 박사를 상대로 건 소송 내용이 황당하다.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회사로 다시 반환하려는 소송을 내서 담당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다 있는가?'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남들은 서로 더 차지하려고 형제의 난도 벌이는 판국에…
동생들로는 유중한, 유신한, 유순한(여), 유명한, 유특한이 있었는 데, 돈독한 우애를 과시했던 그에게도 아픈 가족사가 있다.
미국 유학 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일본으로 유학갔던 유명한은 친일파가 되어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막내 동생 유특한과 함께 유명한과는 절연을 하며 남겼던 말이다.
미국 유학 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일본으로 유학갔던 유명한은 친일파가 되어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막내 동생 유특한과 함께 유명한과는 절연을 하며 남겼던 말이다.
“나는 동생 유명한을 둔 적은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라는 놈은 모른다”
고 했다. 결국 유명한은 한국 전쟁 때 사망했다.
1971년 3월 11일 전 재산 사회 환원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하여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1971년 3월 11일 전 재산 사회 환원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하여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한 딸 유재라의 묘소도 함께 있다.
경기도 부천시 중앙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있으며, 부천시는 경인로 유한대학 일대 구간에 '유일한로'라는 별칭을 부여 했다.
유일한 박사의 구로구 항동 사저는 성공회대학교에서 매입해 구두인관으로 명명하여 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유일한이 사망하던 해에, 실미도 사건에서 중앙청으로 버스를 몰고 돌진하던 684 부대원들이 자폭한 장소가 현 신관 옆에 있던 유한양행 본사 앞이다.
유일한이 사망하던 해에, 실미도 사건에서 중앙청으로 버스를 몰고 돌진하던 684 부대원들이 자폭한 장소가 현 신관 옆에 있던 유한양행 본사 앞이다.
유일한 박사의 유품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와 양복 세 벌, 구두 두 컬래가 전부였다.
2015년 유한양행 이정희 사장과 임직원 925명이 통일나눔펀드 20년 정기 기부를 약정 했다.
이는
"기업 활동은 공익적 가치 실현 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는 창업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회사 로고인 버드나무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끈질기고 무성하게 대성하라!"
는 의미를 담고 있다.
꽃 보다 아름답게, 바람처럼 청초한 새벽 이슬처럼 살다가신 분의 발자취를 읽으며 참된 사람만이 발할 수 있는 진정한 향기를 느낄 수가 있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꽃 보다 아름답게, 바람처럼 청초한 새벽 이슬처럼 살다가신 분의 발자취를 읽으며 참된 사람만이 발할 수 있는 진정한 향기를 느낄 수가 있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유일한 박사님의 가르침과 그 정신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유한양행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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