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판단이 내려지면 그 근거를 하나둘 만들어내 그것들이 자신이 내린 판단의 설명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것은 사실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후 합리화는 본원적 인과관계에서 모순을 내포하며 결과적으로 책임회피이다.
삶이 내가 원하던 것과 늘 다른 식의 선택을 요구한다는 이중성의 혼란을 겪을 때 자기합리화란 참 유용한 것이다.
요리를 하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이는 일이나, 책을 읽다가 새 책에 손등을 베이는 일은 똑같이 아플 것이다.
어차피 사는 건 상처를, 굴욕을, 멀어지는 꿈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자기가 감당할만큼에서 스스로를 컨트롤 해갈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아집과 과신, 완고함. 경박한 자기 확신 강화, 헛된 망상, 혼돈, 위선과 가식, 후회, 꾸물거림, 되돌리고 싶은 욕망 등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여정에는 이같은 무거운 짐들이 수 없이 많다.
이처럼 확고하고 때론 어리석은 합리화는 보다 궁극적인 질문에는 완벽히 답하지 못한다.
왜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결과가 되지 못하는 걸까?
왜 더 나은 내가 되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난 후 몇 시간, 며칠 만에 그 계획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걸까?
변명이나 잘못된 믿음들보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게 하는 보다 더 큰 트리거가 존재한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내재된 타고난 '본성'과 특수성으로 길들여진 ‘주변 환경’에 익숙해진 아집과 습관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허수아비 참새 디자이너 같은 일이다.
참새들에게 깜짝 놀랄 아침을 선물하기 위하여 밤의 공책을 메꾸지만 그건 사실 세상 밖의 일이고 무엇보다 참새들에게 허수아비는 비호감이다.
선택에 대한 포기의 비용을 기회비용이라고 하고 그것은 장사꾼에게 이문이 남지 않는 일을 하느니 돈놀이를 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지만 철수가 미자 대신 순자를 사랑해서 순자를 선택하고 미자를 포기해서 얻는 이익이란 이익의 관점일 뿐이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계산 자체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도 없을 것이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인지부조화의 허위의 몸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수아비 디자이너의 만족이 어느정도 인지를 묻는 본래적 감정과는 다르게 우리는 오늘도 허수아비 없는 텅빈 들판에서 참새들의 형식적 감정의 합리화를 바라 보는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만큼의 의식만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감당할수 있는 감정수준에서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삶을 진정성과 책임감을 갖고 사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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