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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삶 이야기

지문 헐고 ....발가락 굽은....

by Ajan Master_Choi 2017. 6. 3.



지난 5월 20일 TV에서 본 장면이다.

1m53cm의 클라이밍 선수가 잠실 롯데월드타워의 외벽을 오르고 있었다.

바로 ‘암벽 여제’ 김자인이었다.

높이만 무려 555m였다.

외벽에 홀드를 부착하지 않고 최소한의 안전장비만을 갖춘 채였다.

그녀는 잠깐 쉴 때마다 연신 손을 털었다.

이는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의미였다.

그 손을 본 적 있기에 그 아픔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5년 전 그녀의 손과 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의 인터뷰를 통보받았을 때도 먼저 손과 발이 궁금했었다.

손가락 지문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벗겨지고 아물고 헐기를 반복한 탓에 손가락 지문이 없을 정도라 했다.

또한 발가락은 안으로 곱아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심한 굳은살 탓이라 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손·발·얼굴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사진을 구상했다.

고민 끝에 유리판을 떠올렸다.

그녀를 유리판 위에 올려서 하늘을 배경으로 찍으면 해결될 듯했다.

구상대로만 된다면 이른바 ‘하늘에 오른 암벽 여제’가 되는 것이다.

먼저 유리판을 올릴 적당한 장소를 찾는 게 관건이었다.

근처 빌딩에서 폭 1m30cm, 높이 2m50cm가량의 통로를 발견했다.

빌딩 측에 사정을 설명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다행히도 관리 담당자가 김자인의 팬이라 했다.

그다음 통로에 올릴 유리를 구매해야 했다.

사람이 올라서도 깨지지 않는 특수유리여야만 했다.

행여나 ‘암벽 여제’에게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될 터였다.

유리 판매자에게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미심쩍어 점프까지 해보았다.

촬영 당일, 준비된 유리판 위에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에 조심스러움이 비쳤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를 미심쩍어 하는 듯했다.

유리를 구매하면서 나 또한 그랬었다.

안심부터 시켜야 했다.


“깨지면 유리 밑에 누워서 사진 찍는 내가 먼저 죽으니 걱정 말아요”


라고 농담을 했다.

그녀가 웃었다.

그제야 포즈가 자연스러워졌다.

준비할 땐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곧 흐려질 기세니 분초를 다투어야 했다.

구상과 준비에 들인 시간에 비해 촬영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게다가 전신을 찍다 보니 손과 발의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손과 발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노란색과 핑크색을 교차로 칠한 발톱 매니큐어가 눈에 거슬렸다.

더구나 거칠어져 있었다.


“매니큐어를 지우고 사진을 찍으면 안 될까요?”


“제가 보기엔 예쁜데요, 남들이 뭐라든 저는 자랑스러워요. 제 발이…. 저는 심지어 힐을 신고 발을 내놓고 다니는 걸 좋아해요.”


뜨끔했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잣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굳은살,

곱은 발가락,

까진 매니큐어.

헌 지문.

이 모든 게 그녀를 만들어 온 삶 그 자체였다.

그러니 스스로에겐 대견하고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게다.

알량한 사진쟁이의 잣대를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든 ‘암벽 여제’ 김자인의 손과 발,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견줄 수 없는 삶의 증명이었다.

그녀는 지문이 지워진 손가락과 곱은 발가락으로 2시간29분38초 만에 555m에 올랐다.

도전을 끝낸 그녀가 클라이밍 슈즈를 벗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2시간30분 동안 곱았던 발이 보였다.

그녀는 이내 두 손으로 발을 보듬었다.

지문 없는 손가락과 곱은 발가락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역사였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