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정신병의 증상 가운데 '쓰레기 수집'도 있어요.
대관절 사람의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열이든 강박이든 어떤 원인에 의해 그 회로에 이상이 생기면 세상의 모든 쓰레기들이 다 아까와 보이고, 심지어 음식 쓰레기까지도 애지중지 모아 두게 된다고 하지요.
할 때 이런 분들 무척 많이 만났습니다.
언젠가 한 할머니에 대한 제보가 왔어요.
무슨 피난민처럼 머리에 장대한 봇짐을 이고 등에는 잡동사니 그득한 배낭을 메고 시장을 쏘다니며 구걸도 하고 냉이(?)도 판다는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그 집에 갔을 때 나는 괴기 영화 세트와 맞닥뜨려야 했어요.
부산에서 동네 형편이 안좋기로 이름난 동네의 골목길의 열평 남짓한 단독주택의 1층이었는데 문을 연 순간 망연했던 게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만큼 쓰레기가 들어차 있고 오징어 썩는 냄새 비슷한 역한 냄새가 코를 유린하고 들어오더군요.
형광등 줄 끝에는 작은 인형이 달려 있었는데 그 인형은 영화 에서 괴물 거미 쉴롭의 거미줄에 칭칭 감겨진 프로도 베긴스처럼 거미줄에 빈틈없이 싸여 있었어요.
집이 좁으니 쓰레기 양은 다른 곳보다 적을 수 있었지만 쓰레기 밀도(?)는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았을 겁니다.
2층에 가건물 올리고 사는 며느리는 사연 얘기를 하며 실실 웃어요.
"아무리 말려도 어머니가 안들으시니까.. 호호.... 저희도 치워 봤는데 호호..... 노다지 다시 쌓아놓으시니까 포기했죠 호호....."
이상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한 마디 던져 봤어요.
"그래도 잘 웃으시네요."
그러자 며느리의 눈에선 바로 닭똥같은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안하면 바로 미쳐 버릴 거예요."
시아주버니네, 즉 큰아들네는 이미 할머니 때문에 이혼한 상황이었고 어머니를 끼고 사는 둘째 아들네도 형편이 어려웠어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사는 상황인데다 할머니 때문에 친정과는 발 끊고 살고 있었지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려고 해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에 엄두가 안나고, 부양 가족이 있으니 의료 혜택을 받기도 무망했던 겁니다.
할머니가 모아오는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쌈박질도 하고 악도 써 봤지만 헛수고일 뿐, 1층 할머니의 방은 쓰레기천지가 되어 갔던 거예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랬는가?
들으니 기구하고 거듭 새기자니 처량합니다.
구구절절 사연은 생략하기로 하지요.
암튼 남편 없이 애 둘 먹여 살리느라 악착같이 살아가던 어머니는 그 과정 속에서 점차 이상해졌대요.
자꾸 뭔가를 모아 오고, 아무리 봐도 쓸데가 없어 뵈는 물건들을 주워서 쌓아놓더라는 거지요.
언젠가 쓸모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자꾸 개입하고 만류하니까 홀연 할머니가 사라지셨어요.
아직은 추운 겨울인데 행여 어디 가서 얼어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백두산이었지요.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본들 바람같이 오가는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는 국정원도 모를 거 같더라고요.
그때 아들이 고향 얘기를 했어요.
좀체 안가시기는 하는데 가끔 고향에 움막같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거예요.
득달같이 달려갔더니 할머니가 그곳에 계시긴 하더군요.
간 김에 이웃들에게 할머니의 과거를 물어 봤어요.
아들들이 모르는 과거......
거기서 뜻밖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가 아버지가 보도연맹으로 죽었어요. 엄마는 즉시 다른 데로 개가해뿌고 큰집에서 크다가 나이 열댓 먹었을 때 대처 식모로 보내뿠지요. 불쌍한 아라.. "
지리산 자락의 동네였습니다.
전황이 국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기 전,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은 왕년의 좌익 혐의자는 물론 그 언저리를 모아 묶어 세웠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습니다.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겁니다.
할머니의 호적 등본을 떼어 봤을 때 할머니의 아버지의 사망신고는 80년 12월 31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온 동네가 다 알고 할머니의 불행의 시작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은 30년 뒤에야 신고되었던 겁니다.
병원으로 모시려고 할머니를 설득했을 때 할머니는 완강했습니다.
나를 때리려고도 했고 자식에게는 호통도 쳤지요. 도무지 설득이 먹혀들지를 않았어요.
물론 설득이 통할 정도면 그 지경이 안됐겠지만 별 수 없이 강제로 모실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이송 요원들이 할머니 앞에 이르렀을 때 전혀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할머니의 표정과 말투가 돌변한 거예요.
"나 때문에 온 거라요? 내가 가야 되는 겁니꺼?"
"네 할머니 가시지요."
"가지 뭐. 가서 의사 만나고 병 있으면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니가."
어이가 없어도 분수가 없게 없더군요.
아주 미소까지 지으며 순순히 걸어서 자기 발로 앰뷸런스에 오르십니다.
일체의 저항도 거절의 말 한 마디도 없었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 죄다 어리둥절할 뿐이었지요.
그때 후배가 한 마디를 했어요.
"할머니가 역시 제복을 무서워하시네요."
아 제복!
앰뷸런스를 타고 오신 분들은 죄다 제복을 입고 있었어요.
어깨에 은빛 견장을 다신 것이 경찰 비슷했지요.
그 제복의 등장에 할머니의 기세가 순식간에 숙어 버린 겁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가면서 할머니에게 옛일을 여쭤 봤어요.
엉뚱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라고 하시던 할머니는 얘기하는 와중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과거의 고리들을 꺼냅니다.
매우 간략하지만 날카로운........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하고 한목에 (한꺼번에) 죽었다고 하대요. 와 죽었는지는 나는 몰라. 정말 몰라. 우리 할아버지가 장죽을 물었거등요. 긴 담뱃대. 내가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날 보고 울었어요.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울었어요. 와 그랬는지는 나는 몰라 정말 몰라."
그렇게 얘기하면서 할머니는 서럽게 울었어요.
그 울음을 들으며 내 머리 속도 참 많이 헝클어지더군요.
민간인 학살은 히틀러만 한 것이 아니고 좌익 빨갱이들만이 한 것도 아니며 정통성 있다고 자부하고 UN에 의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정부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해 져 버린 듯한 과거가 이렇게 오늘의 비극과 맥이 닿아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범상할 수는 없잖아요.
정말 이거 하나는 기억해 둬야 할 거 같아요.
일본 제국주의가 학살의 형태로 죽였던 조선인들의 수......
그러니까 의병 전쟁과 3.1운동 진압과 간토 대지진과 경신대참변 등에서 죽여없앤 조선인들의 수보다 더 많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6.25가 시작되고 한 달 사이에 죽어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교전 중인 군인도 아니었고 반 대한민국 봉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고 이적행위의 현행범도 아닌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변호도 없이 꾸역꾸역 실려와서 차례차례 죽어가서 차곡차곡 쌓여져서 두리뭉실 처리되었다는 거예요.
빨갱이들이 그만큼 지독했으니 그런 거 아니냐는 소리 하지 마세요.
빨갱이들이 지독했다는 것이 우리가 악마가 된 사실을 합리화하지는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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