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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ang Muaythai GYM/제왕회관 이야기

무에타이 vs 쿵후의 기묘한 이야기

by Ajan Master_Choi 2009. 12. 11.

한국에서 돌고 돌던 쿵후 VS 무에타이 58년도 자료가 "아우마스"라는 곳에서 처음 시작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의 이 자료는 기존의 1958년 자료보다 37년으로 앞당겨 1921년으로 가보려 합니다.

이 자료를 공개한 사람은 중국인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초판 작성이 태국 화교인일지 이방인일지 중국인의 손에 의해 쓰인것인지, 훗날에 쓰여진것인지, 어찌되었든 세세한것 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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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산타, 무에타이 경기 일부의 일을 듣고, 또한 비디오를 보고 나의 중국 무술과 무협소설의 지지자들은 적지 않게 놀라워했다.

우리의 생활 중에, 무술이 없는 곳이 없고, 공원에서, 학교에서, 태극권을 배우고 매우 많은 사람들의 취미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더하여 선전되는 무술까지 이미 무술은 중국문화의 대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공수도가 어째서 중국무술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것인가.

우리는 웅장하고 힘찬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고있는 중국무술이란 많은 것을 내포하고있다.

그러나 겉보기만 좋은 권술이 너무 많으며 실제로도 쓰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에타이는 매우 맹렬하다.

역사상 중국 쿵후와 무에타이의 첫 겨루기이다.

 

1921년 8월 6일 쿵후 VS 무에타이의 첫번째 역사이다.

싱가폴 중화총상회의 수뇌부로부터 도움을 받아 이 대회를 기획한다.

 

 

대강남북의 유명한 응조권의 대가 '자정'(상해 정무회)와 산악의 호랑이 '나이 양'의 대결이다.

방콕의 '로즈가든' 에서 간단하게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플래트폼에서 치룬다.

'자정'은 3초만에 '나이 양'에게 턱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같은 장소에 있던 해남성 출신무사 "오대건" 또한 2번의 경합만에 무릎으로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8월 7일 해남성 출신의 '한홍둔'과 신이내린 킥 이란 닉네임이 있는 '나이 타' 의 대결이다.

한홍둔의 불편해보이는 낮은자세와 싸우는자세를 주의해서 보길바란다.

태국의 고수 '나이 타' 는 1 라운드도 안되어서 발차기로 '한홍둔'의 눈 언저리에 부상을 입히며 승리하였다.

 

 

 

 

그리고 해남의 '오대건' 역시 '나이 루'를 향하는 자세를 보길바란다.

그의 싸우는 자세는 매우 위험하게 들어내고 있다.

그의 오른손은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것인가?

 

 

 

 

해남의 '부흥봉' 역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자세는 훌륭한가?

나는 추측한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볼 때 절대 그는 싸울 수 없다.

한홍둔, 오대건, 부흥봉 해남의 고수들의 실력을 시험한 결과는 어떻해 되었는가.

'자정'은 단번에 때려 눕혀졌다, 나머지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실제 전투에서 전부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태국선수 '나이 양'은 중국 쿵후를 부수었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패배의 만족하지 않았다.

그 후 방진방, 임가련같은 중국 무술가들도 모두 패배하였다.

 

 

 

1922년 5월 13일  한 태국화교는, 기골이 장대하고 단단하여 맨손으로 돌을 부수는 복건출신의 무술가 '뢰철호' 를 모셔온다. 

'뢰철호'는  소림권법의 낮은 부동의 자세로 얼굴을 모두 들어낸다.

 

상대방에게 얼굴을 공격 당할 수 있는 기회를 초래할 것이다.

' 뢰철호'는 '나이 양' 보다 9kg 더 나갔다.

그러나 그 몸무게의 차이는 전투에 있어서 다량의 효과를 내지 않았다.

그는 2라운드까지 경기를 지속했다.

그는 '자정' 보다는 더 나은 선수였다.

그러나 간신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었을 뿐, 온 몸에 부상을 입고 몇 달 동안 병원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무공이 뛰어났던 해남 출신 '이덕'은 태국으로 건너와 화교 무에타이의 고수인 '진 청'을 스승으로 삼았다.

수련을 마친 후 "산악의 호랑이" '나이 양' 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덕' 이 반드시 죽을거라 생각했지만 누가 알았을까,

3 라운드에 걸친 악전고투 속에 주먹으로 '나이 양'을 아홉 번이나 휘청이고 비틀거리게 하였다.

시합은 불상사 없이 좋게 끝났지만, 이덕의 무용은 화교들을 깊게 감동시켰다.

 

 

 

1924년 봄, 태국에서 성대한 춘절(설날) 잔치가 벌어졌다.

태국 무에타이의 고수 '나이 통'과 중국 복건 학가권의 고수가 시합을 가졌다. (이름의 언급이 없음)

 

복건 출신의 중국 무술가는 태국 남부에서 물건을 나르는 직업을 가진 짐꾼이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그가 승리하기를 바랬다.

두 고수간의 격전은 2라운드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리로 목 부위를 가격 당하자, 그대로 상대방의 다리를 붙들고 앞으로 돌진하며 공격을 가하려 하였다.

 

'나이 통'은 그 위기에 순간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릎과 팔꿈치로 상대방을 가격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학가권의 고수는 머리에 팔꿈치 공격을 받아 혼절 하였고 그 후에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 지역은 충격으로 들석거렸다.

 

그 후 수십년 동안 중국과 태국은 어떠한 무술시합도 하지 않았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