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기력 vs 자기 핸디캡
야구는 확률의 스포츠라고들 말한다.
어딘들 확률이 없겠느냐마는 야구가 특히 그런 이유는 야구에서는 어떤 상황이 그대로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모든 선수들이 끊임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대부분의 다른 구기종목들과는 달리, 모든 선수가 정해진 위치에 자리 잡은 다음에야 플레이가 시작되는 게 야구다.
축구에서는 모두가 멈춰선 순간이 예외적이지만 야구에서는 모두가 움직이는 순간이 예외적이다. 그래서 야구에는 모든 경우에 대한 확률을 내놓을 수 있다.
타자의 타율도 왼손투수에 대한 타율, 1루에 주자가 있을 때의 타율, 2스트라이크 이후의 타율... 이런 확률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야구 경기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그게 영화 <머니볼>에서 보여준 실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진 일들은 야구가 산출하는 수많은 확률 중에서 ‘출루율’이라는 것 실제 경기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증명하는 과정이고, 경영자가 남들이 간과한 사실을 믿고 실천했을 때 자기 회사에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영학 간증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인 빌리 빈(브래드 피트)의 선택이다.
2001년 까지 오클랜드를 이끌었던 거물 3인방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퇴물 혹은 2류로 평가받던 선수들로 메꿔서 메이저리그 최다연승 신기록을 세운 후,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단장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메이저리그 신기록급 고액 연봉과 보스턴 레드 삭스라는 재정 빵빵한 명문구단의 단장 자리를 포기하고 다시 그 가난한 오클랜드 야구단의 단장으로 남은 거다.
아무리 봐도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가 현재의 조건에 백프로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짠돌이 오클랜드 구단에 대단한 애착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가 오클랜드 구단을 통해서 증명한 공식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보스턴으로 간다고 전처나 딸과 의절할 것도 아니다. 오클랜드에 남아있을 이유는 별로 없고 보스턴으로 가야할 이유는 잔뜩이다.
그럼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에서는 그 이유를 그의 충실한 부관 피터 브랜드(조나 힐)의 입을 빌어 암시한다.
레드삭스의 제안을 받고 고심 중이던 빌리 빈에게 브랜드는 한 마이너리그 선수의 플레이장면을 비디오로 보여준다.
그 선수는 지나치게 무거운 덩치 때문인지 아무리 큰 안타를 쳤어도 절대로 1루 이상 진루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가 1루를 지나 2루까지 가볼까 하는 낌새를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1루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 친 안타는 홈런이었다.
1루에 멈췄어야 할 이유도, 허겁지겁 되돌아가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는데 그는 강박증 환자처럼 1루에 집착하고 있었던 거다.
피터 브랜드는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빌리 빈에게 “당신에게 오클랜드 구단은 저 마이너리거에게 1루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 하다.
지금 홈런을 쳤으므로 1루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고민하지 말고 보스턴으로 가라는 뜻이었다.
물론 가는 김에 자기도 같이 데려가주면 더 좋을 거고 말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해 피터 브랜드가 진단한 빌리 빈의 문제는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할 수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스키너 상자Skinner box 속의 쥐가 지렛대를 눌러 먹이를 얻어먹는 법을 배울 수 있듯이, 지렛대를 아무리 눌러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배울 수도 있다.
지식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무기력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리 빈도 무기력을 학습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가 단장인 오클랜드 구단은 애매한 팀이다.
실력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중상위 성적을 유지하고 종종 포스트시즌 까지도 간다.
하지만 언제나 거기까지, 결승전 바로 앞에서 좌절한다.
빌리 빈은 본인이 여전히 지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가 가장 익숙한 것은 패배와 좌절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미식축구계에서도 야구계에서도 그를 원했다.
스탠포드대학 장학생 자격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프로야구계에 들어선 이후 그의 경력은 처음 기대에 비하면 지극히 실망이었다.
아예 못하면 포기라도 할 텐데 애매한 성적이라서 포기도 못한 채로 형편없는 경력을 이어가야 했다.
선수의 경력을 접고 스카우터로 시작해 단장이 된 지금에도 그는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는 시즌을 반복한다.
심지어 아내도 그와 이혼하고 자기보다 훨씬 더 잘나가는 남자와 산다.
그의 인생은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면 그 좌절에 익숙해지고 당연히 여기며 심지어 자발적으로 좌절을 선택하는 일이 벌어진다.
보스턴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클랜드에 남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자기 핸디캡self handicapping 전략이 그것이다.
자기 핸디캡 (혹은 자기불능화) 전략이란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들을 미리 부각시켜놓아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놓는 일종의 꼼수를 말한다.
이렇게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으면 실제로 실패를 해도 미리 말해둔 이유 탓을 대면되니까 자존심을 상하지 않을 수 있고, 혹시라도 성공을 하면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니 더욱 좋은 일이 된다.
기말고사 당일 날 공부 열심히 했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공부 못했고 시험 망쳤다고 엄살 피우는 인간들만 가득한 것도 자기 핸디캡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성적이 잘 나오면 공부를 못했는데도 성적이 잘나오는 능력자가 되고, 성적이 나쁘면 내가 뭐랬냐며 오히려 큰소리 칠 수 있게 된다.
빌리 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우리 오클랜드 구단의 여건은 바닥이라고 그런 불리한 여건에서는 중간정도의 성적만 거두어도도 대단한 일이고, 2002년처럼 20연승까지 하면 그건 완전 초대박이다.
불리한 여건이 오히려 빌리 빈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거다.
하지만 보스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 많은 돈과 훌륭한 선수들을 데리고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우승 뿐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다.
무엇이 정답일까?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심리학자 토마스 길로비치는 자기 책 <인간, 속기쉬운 동물>에서 이런 전략이 미국 사회에서 통하는 걸 보면, 미국도 사실은 굳은 의지와 끈질긴 노력 같은 후천적인 요소보다는 아름다운 외모나 타고난 운동감각 같은 선천적인 요소를 더 중시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자기 불능화 전략의 요점은 자신이 '재능은 평범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이 아니라 '잠재력은 충분한데 노력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빌리 빈 자신이 한때 “잠재력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보스턴 행을 포기한 이유도 다시는 그렇게 과대평가 받다가 실망시키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자기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스스로 정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내 보기에도 자기 주제를 모르고 방방뛰는 인간들보다는 지나친 겸손일지라도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자신의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 가치있는 기여를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답이 뭐든 빌리 빈은 괜찮은 선택을 했다.
빌리 빈의 딸은 노랫가사를 통해 그에게 “아빠는 루저 맞아. 하지만 그럼 어때? 어차피 세상은 수수께끼로 가득한 걸.. 그냥 쇼를 즐겨” 라고 말한다.
아마 그게 맞는 말 일거다.
야구계의 규칙을 영원히 혁신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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