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금기의 대명사, 동성애와 근친상간

by Ajan Master_Choi 2013. 9. 5.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다.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던 것은 ‘골품제’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근친혼은 골품제의 영향이기 보다는 귀족들의 발호를 막기 위한 방편이 더 강했다.


서라벌 중심 부족국가에서

신라시대에 근친혼이 성행했던 이유는 ‘골품제’의 영향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가 골품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서라벌’ 중심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이고 백제 역시 고구려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인 점과 신라는 출발이 달랐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면 폐쇄적인 부족국가에서 출발을 했다.
여기에 신라 초창기에는 박·석·김 등 ‘성씨’가 다른 사람들이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더욱 폐쇄적인 부족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서라벌에 사는 ‘김씨’로만 국한해서 임금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서라벌에 사는 김씨왕족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끼리 혼인을 할 수밖에 없으면서 결국 근친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근친혼은 통일신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진성여왕과 위홍 각간의 혼인이다.
숙부와 조카딸의 관계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통일신라 당시 왕실 결혼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물론 고려도 근친혼이 성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양상이 좀 다르게 전개됐다.
고려의 출발이 호족연합국가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뒀다.
하지만 부인들은 결국 호족의 딸들이었다는 점에서 호족연합국가로 출발을 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 혜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호족들끼리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게 됐고 그것이 왕규의 난 등으로 발현됐다.
광종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귀족들의 발호를 막아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면서 호족들과의 결혼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광종은 대목왕후와 결혼했는데 이복남매 관계였다.
경종과 헌애왕후 역시 사촌간이었다.
다만 명목상 근친혼으로 보이게 하지 않기 위해 공주들은 왕씨가 아니라 외가의 성씨를 따랐다.

대표적으로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였지만 왕씨가 아니라 외할머니 가문인 황보씨였다.
고려 왕실에서 태어난 여자는 모두 근친혼을 해야 했다.
그것은 호족들과 결혼할 경우 호족들이 발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중기부터는 왕권이 강해지고 호족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근친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기울어졌다.
고려말 원간섭기에 들어오고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근친혼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가 됐다.

근친혼 금지 그런데 불똥은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나라가 되면서 근친혼이 금지됐다.
문제는 본관은 다른데 성(姓)이 같은 동성이본까지 금혼령이 내려졌다.
여기에 성(姓) 다르더라도 본관이 같으면 결혼하지 않는 이성동본 금혼령까지 내려졌다.

현대까지 내려온 것은 동성동본이고 2000년대 들어서야 폐지됐다.
그것은 조선시대 때 부계성(姓)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볼 때 동성동본 금혼령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악법이라고 할 수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근친결혼의 비극 '기형아'

고대인들에게 여성은 한 집안에 소속된 일종의 가정부였다.
여성의 권리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기형아를 낳은 여자는 악마와 관계한 것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유전적 질환이나 사회질병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의학상식이 부재한 탓도 있지만 남성들에 비해 존중 받지 못했던 정서적 배경이 컸다.

중세시대 유럽국가에서는 왕가와 가까운 귀족 간 권력 세습 때문에 혈통을 유지하려는 집념이 강했다.
그러다보니 사촌간은 물론 심지어 오빠·동생 간 근친결혼이 성행했다.
근친간의 관계로 인해 유전병이 흔히 발생한 이유다.
유럽왕가에서는 유전병의 대물림으로 고통 받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염성 및 선천성 매독까지 창궐했다.
당시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선천성 기형아가 많이 출생했다.

기형아들은 수명이 짧아 생존율이 낮았다.

당연히 사회적 진출과 안정적인 생활이 어려웠고 대중에게 놀잇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귀족가문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숨겨 키워지거나 집과 떨어져 살았다.
사회 저명인사인 부모 슬하에서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화면의 중앙에 마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총 7명의 남녀 시녀와 수행원이 등장한다.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화가를 등 뒤에 두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를 뒤편의 조그만 거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분명 이들 앞에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을 테고 왕과 왕비는 거울 뒤편에 서 있을 것이다.
화가 자신을 화폭 중앙에 놓고 그림 속 전체 장면을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처럼 그린 점이 독특하다.
피카소가 이 그림의 유형을 50여 차례나 따라 그렸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처럼 난쟁이들은 왕실이나 귀족의 시종으로 일하며 때로는 놀잇감이 돼주었을 것이다.

후안 반 데르 하멘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근친 결혼 가족간의 결혼 금지 이유는 건강한 후손을 위해서

근친 결혼 금지법은 지극히 과학적인 법이다.
이는 유전 법칙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유전자는 쌍으로 붙어 다니는데 이 중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자의 형질을 '우성', 표현되지 않는 형질을 '열성'이라고 한다.

대부분 열성 형질은 우성 형질에 밀려 겉으로 잘 드러나질 않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유전자를 물려 줄 땐, 엄마의 유전자 중 하나, 아빠의 유전자 중 하나가 떨어져 나와 새로운 쌍을 이루게 된다.
 이때 엄마, 아빠가 모두 질병을 일으키는 열성 형질을 갖고 있었다면?
자식에게 그 형질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겠다.

이런 현상이 가족끼리 결혼 할 때도 발상하는데 일단 가족은 혈연 관계라서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래서 같은 종류의 열성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런 둘이 결혼하면 자손에게 열성 유전자를 물려 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유전자가 전혀 다른 사람(타인)과 결혼하면, 열성 형질이 우성 형질에 밀려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 때문에 원시 시대에도 딸은 멀리 있는 부족으로 시집을 보냈던 거다.

근친 결혼으로 무너진 스페인 왕가!

펠리페 4세의 후예들.

순수 혈통을 뜻하는 순종은 대대로 잡종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잡종은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순종이 가지지 못한 새로운 형질이 발현될 수도 있고 이것은 생존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순수 혈통만을 고집하면 근친 결혼을 일삼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 왕가'로 불리며 온갖 유전 질환을 대물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펠리페 4세의 후예들을 통해 근친 결혼의 폐해를 확인해 보자.

 아빠 펠리페4세(1605~1655)

스페인의 국왕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답게 주걱턱이 발달해 있다.
주걱턱은 위턱에 비해 아래턱이 너무 발달해 아래턱이 튀어나온 것으로 유전성이 강하다.
아래 앞니가 위쪽 앞니보다 앞으로 나와 있어서 음식을 잘라 먹기 힘든데 펠리페4세도 주걱턱 때문에 죽같은 유동식만 먹었다고 한다.

엄마 마리아나(1634~1696)

펠리페4세의 두 번째 왕비.
펠리페 4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신성로마제국 왕비)가 낳은 딸로 펠리페4세와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녀의 부모님도 서로 사촌이었다는 것이다.

첫째딸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1651~1673)

펠리페4세와 마리아나가 낳은 장녀로 16세에 외삼촌인 레오폴트1세(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결혼했다.
자라면서 주걱턱이 발달했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둘째아들 펠리페 프로스페로(1657~1661)

마리아나 왕비가 낳은 장남.

그러나 4세에 요절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 결혼으로 인해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당시 스페인에서 10세 이전에 사망하는 어린 아는 20% 정도였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1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셋째아들 카를로스2세(1661~1700)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국왕.
대대로 내려온 유전 질환이 총집합된 비운의 왕으로 주걱턱에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였으며 7~8세가 되도록 잘 걷지도 못했다.
정신질환을 앓았고 아이를 낳을 능력도 없었다.
이 모든 증상들이 질병을 일으키는 열성 유전자 때문이었다고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렇다면 우리 고려왕조의 근친혼에 따른 유전병은 없었을까?
전설에 의하면 왕씨가문은 어깻죽지에 날개자국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일종의 유전병은 아니었을까 의심된다.

근친혼이 유전병을 일으킨다는것에 대해 아직 논란이 많은데 이웃 일본의 사촌간 결혼이 근친유전병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나보다.


열성유전자의 수직유전이 원인인지 동일염색체의 거부반응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염색체 46개가 감수분열로 부,모 염색체 23 개씩을 받는데 남매간 근친혼은 동일염색체를 가질확률이 높아진다.
조부모 증조부모의 염색체가 1/4 ,1/8 로 배열되므로 동일 염색체는 피하지만 4대 정도 내려가면 동일 염색체끼리 만날 확률이 커진다.

 

결혼이란 1~23의 페이지인 책 두권을 1 1-1 2, 2-2 이런식으로 46 장의 책이 제본되는것(출생)인데 조부모, 증조등을 내려오면서 1-1-2-1-1 이런식으로 페이지가 분화되는데 근친혼은 이런 분화의 확률이 줄어들면서 1-2-1-2-2 페이지가 다른책에도 같은 배열의 페이지와 합본되고 그런페이지가 늘게 되면 유전병의 발현 이유가 되지않을까?

 

말하자면 일본처럼 한세대의 사촌간 결혼정도는 페이지가 중복되는 유전병 확률이 약하다고 보아야겠다.

'제왕회관 휴게실 >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동차 소리로 고장 진단하는 방법  (0) 2013.09.11
.  (0) 2013.09.06
감동 알바 몰래카메라  (0) 2013.09.04
그녀 등 뒤에 서 있는 '늑대'  (0) 2013.08.02
회장의 유서   (0) 201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