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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관산성 전투

by Ajan Master_Choi 2019. 10. 18.

 

관산성 전투

 

북한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비봉에는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서 있지.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모조품이 서 있지만 그 비석의 역사는 1천4백년이 넘어.

원래는 무학대사비라고 여겨져 왔던 걸 추사 김정희가 그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비문을 해독한 끝에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혔던 비지.

현재 우리나라 국보 3호.

이 비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555년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솥발처럼 정립하고 있던 6세기 중반.

수백 년 도읍지였던 한강 유역을 잃고 절치부심하던 백제는 한창 힘을 키워가던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게 칼을 겨눈다.

백제 역사상 유능한 임금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성왕은 군대를 일으켜 꿈에 그리던 한강 유역으로 향한다.

 

기실 백제의 수도는 500년 동안 한성이었지.

공주나 부여는 일종의 피난 수도였다고.

오랫 동안 내분과 외침에 허덕이던 고구려는 기습을 당하고 물러선다.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는 오늘날 기습을 당한 흔적이 역력한 채로 발견되는데 (무기를 정렬해 놨다거나 갑옷이 고스란히 발견된다거나) 아마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군들의 복수에 삽시간에 전멸했을 듯 해.

성왕은 한강 백사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선조들에게 고했는지도 모르지.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강이란 옛날로 치면 고속도로이자 철도였어.

즉 한강을 타고 오르면 이천 거쳐 충주 지나 영월까지 갈 수 있었단 말이야?

바꾸어 말하면 이 한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하지 못하면 그 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얼마든지 편안하게 한강 하류를 노릴 수 있다는 얘기가 돼.

여기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성왕은 이쪽에도 군대를 보낸다.

얼떨결에 한강 하류를 잃은 고구려지만 충북 단양 어간으로 추정되는 도살성 등에서 치열하게 저항하지.

백제는 도살성을 함락시키지만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다시 빼앗는 등 일진일퇴를 벌여.

 

그런데 둘이 열나게 싸울 때 불쑥 나타난 군대가 있었어.

소백산맥을 넘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던, 하지만 사기왕성한 신라군이었지.

신라 진흥왕은 막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직접 정치에 나선 첫해로 십대의 나이였지만 그 행보는 거침이 없었어.

신라군은 지칠 대로 지친 백제군과 고구려군을 쫓아내고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다.

금현성을 다시 빼앗겠다고 덤비던 백제 장수는 완전히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출했을 거야.

적벽대전 후 주유가 위나라 군대와 피튀기게 싸우고 성에 들어가려는데 조자룡이 나타나

 

“어찌 이리 늦으셨소?”

 

하는 그 장면 말이지.

이때 주유는 광분하는데 백제의 성왕도 그랬을 거다.

하지만 주유가 유비에게 그랬듯 성왕도 신라를 바로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어.

 

성왕은 어떻게든 신라를 동맹국으로 남겨 두고서 그를 이용하여 고구려에 맞서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이건 늑대를 잡겠다고 어린 호랑이 끌어들인 격이 되고 말아.

나이는 어리지만 신라 진흥왕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무슨 뜻이게?

 

“나는 고구려에는 관심이 없다. 고구려야 알아다오”

 

라는 뜻이야.

이 말을 들은 고구려가 ‘감복’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고구려가 신라와 밀약을 맺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

고구려 입장에서도

 

“한강 유역은 너희가 먹되 임진강 넘어오지는 말아 줘.”

 

하면서 신라를 달래는 게 최고의 외교적 책략이었을 거야.

한때 고구려는 신라의 종주국 행세를 할 만큼 사이가 밀접했거든.

 

“너희는 우리보다 백제 쟤들한테 볼 일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라고 신라를 꼬드겼을 가능성이 커.

결심을 내린 건 진흥왕이었지.

 

“아리수(한강)를 타고 바다까지 가자.”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을 선봉으로 신라군은 백제의 오백년 도읍지를 다시 빼앗아.

아마 성왕은 데굴데굴 굴렀을 거다.

이때 신라가 그 지역에 설치한 지명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신주’(新州), 즉 신천지.

신세계.

 

성왕도 영걸이었어.

오히려 자기 딸을 진흥왕에게 후비로 보낸다.

일종의 화친책이었지.

결혼을 통해서 신라의 한강 점유를 인정해 주는 듯한 일종의 평화공세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성왕이나 진흥왕이나 전쟁을 염두에서 지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결혼이 이뤄진 해에 성왕은 신라를 공격해서 커다란 인명 피해를 입혀.

분위기 알만하지?

 

신라는 백제의 원한을 알았고 백제는 신라의 의지를 알았어.

승부는 피할 수 없었지.

성왕은 일종의 반신라 연합군을 결성한다.

일본과 대가야까지 끌어들여서 말이야.

가장 앞장서서 전쟁을 주장한 건 일찍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태자 부여창이었지.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늙은이들 겁나시오?”

 

하는 식으로 몰아부쳤다고 해.

성왕으로서는 건곤일척의 승부.

가야군과 일본군까지 동원하고 백제 좌평이 4명 이상 참가한 총력전이 펼쳐져.

그게 오늘날 충북 옥천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야.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를 봐야 해) 용맹한 태자 부여창은 신라군을 깨뜨리고 관산성을 함락시켜.

이 소식을 들은 성왕은 관산성으로 향하게 되는데 거느린 병력이 50여 명이었다는 걸로 봐서는 그야말로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

대규모 병력을 인솔해서 가는 시간을 소요하느니 뭔가 화급하게 태자에게 합류하여 결정할 작전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루트가 신라군에게 탐지되고 말아.

오늘날의 충북 보은에 있던 삼년산성 병력들이 야음을 틈타 급히 달려가는 성왕 일행을 덮친 거야.

성왕은 포로가 됐어.

일본서기에 나오는 성왕의 최후는 자못 극적이다.

 

삼년산성의 비장 , 그러니까 높은 신분은 아닌 도도라는 자가 성왕 앞에 섰어.

도도는 성왕에게 절하고 말하지.

 

“청하오니 왕의 목을 내게 주십시오.”

 

고구려가 개로왕을 죽일 때에도 세 번 절하고 세 번 침을 뱉은 뒤 죽였다는데 당시 전쟁이 일상이던 삼국에는 왕을 죽일 때쯤 되면 뭔가 불문율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닌지.

하지만 성왕은 이렇게 대답해.

 

“왕의 머리를 어찌 너 같은 노비 (일본서기에는 도도가 노예로 기록돼 있어)에게 맡기겠는가.”

 

일종의 국왕으로서의 품위 있는 최후를 요구한 거지.

신라 왕이나 최소한 이찬 정도는 돼야 내 목을 칠만하지 않는가 하는 항변이었지.

그런데 도도는 이렇게 답한다.

 

“저희 법에는 왕도 맹세를 어기면 노비 손에 죽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진흥왕부터 죽어야 할 테지만 도도는 아무래도 딸을 시집 보내 놓고 바로 뒤통수를 쳐 신라를 공격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 같았지.

모든 것을 포기한 성왕의 외침은 참 처절해.

 

“돌이켜 생각하니 너무나 뼈 아픈 일 투성이였다.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가 고토 회복을 노리고 와신상담한 이래 미치도록 후회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겠지.

아차 그때 이랬더라면,

내가 왜 그랬을까,

이때 조금만 하늘이 나를 도왔더라면...

거의 눈앞에 목표가 다다른 순간의 추락.

고지가 바로 저긴데 까마득한 산기슭으로 떨어졌다 싶었고 다시 기어 오르다보니 이젠 절벽.

최선을 다했으나 최악의 상황에 빠진 사람의 절규.

예순은 넘었을 백발의 성왕은 홍안의 신라 왕 김삼맥종 (진흥왕 본명)을 저주하며 숨을 거뒀을 거야.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관산성을 다시 공격했고 이제는 완전히 신라땅이 돼 버린 한강 하류의 ‘신주’ 병력들이 합세하면서 백제군은 대참패를 해.

 

삼국사기에는 꽤 숫자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

2만 9천 6백명 전사.

좌평 4명, 국왕 전사.

이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는 다시 결정적인 흥성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좀 형편이 나아진 뒤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신라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멸망하고 말지.

 

관산성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역사를 바꾼 전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이 일을 복기하면서 신라의 후안무치한 배신을 성토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은 없을 거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의리는 없어,

단지 생존과 이익이 있을 뿐이지.

 

자세히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이 즈음 벌어진 삼국의 머리 싸움과 기 싸움, 정보전과 암투는 아마 삼국 정립 이후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해.

한강 하류를 장악한 백제와 중상류를 거머쥔 신라.

그리고 물러났지만 발톱이 빠지지 않은 호랑이 고구려.

삼국의 정부와 신하들과 장군들은 머리를 쥐어짜면서 자국에 가장 유리한 정세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겠지.

 

숨가쁜 막후협상과 왕의 딸까지 동원한 평화 공세,

바다 건너 군대까지 끌어들이는 총력전과 적국 수뇌부의 야간 이동을 탐지한 신라군의 정보전까지.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지 않겠니?

 

관산성 전투(554년 음력 12월)는 그 모든 것의 일단 마침표였고 관산성에서 실려온 성왕의 머리를 궁궐 계단 아래 묻은 (일본서기 기록) 진흥왕은 벅찬 마음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을 타고 오늘날의 서울에 이르러 비봉에 올라. (555년 추정)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멀리 서해 쪽을 굽어보며 호령했겠지.

 

“이곳은 신라 땅이다. 내가 다스린다.”

 

비봉을 갈 때마다 나는 진흥왕을 떠올리지만 성왕도 생각난다. 성왕 역시 저 자리에 올라

 

“우리 다시 돌아왔습니다!”

 

를 외치고 싶었을 텐데....